기획시리즈 3

南冥文學의 現場 踏査記(14)

겨울에 본 스승의 여름 지리산(2)
- 칠불암과 쌍계사 -

 

정 우 락
(경북대 강사)

고운의 선골·진감의 선등     - 서산대사

칠불암(七佛庵) 가는 길은 가팔랐다. 하늘로 오르는 길 같았다. 스승이 신응사에 머물면서 이곳을 올라와 보았다는 기록은 없다. 1558년 4월 20일 신응사로 들어오면서 칠불암에서 내려오는 계곡물 주위에 일행과 함께 늘어 앉기도 하고, 신응사에서 10리 정도가 된다면서 칠불암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신응사를 떠날 때 그 주지 옥륜과 지임 윤의가 칠불계수(七佛溪水)에 놓아준 다리를 건넜을 뿐이다. 스승이 염두에 두긴 했지만 찾지는 않았던 그 칠불암은 현재 '칠불사'로 승격되어 있다. 이 절의 원래 이름은 운상원(雲上院)이었다고 한다. 인도의 허황후(許皇后)와 가락국 김수로왕 사이에서 난 열 명의 아들 중 일곱 명이 외삼촌 옥보선사(玉寶禪師)를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운상원을 짓고 수도에만 힘을 쏟았는데, 이렇게 한 지 6년만인 8월 보름에 모두 부처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일곱 부처가 난 집'이라는 뜻에서 후인들은 '운상원'을 '칠불암'으로 고쳐 불렀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바다를 통해 바로 건너왔다고 해서, 이 절은 불교가 고구려를 거치지 않고 가락국에 전해졌다는 소위 불교 남래설의 진원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운상원은 현금(玄琴)의 전수장이기도 했다. 『삼국사기』(권32,「악」)에 의하면 신라의 옥보고(玉寶高)가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50년 동안 현금을 배웠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가락 30곡을 지어 속명득(續命得)에게 전하고, 속명득은 귀금(貴金)선생에게 전하였다. 귀금선생이 운상원에서 나오지 않자 신라왕은 금도(琴道)가 끊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이찬 윤흥(允興)에게 일러 그 음률을 전수 받게 했다. 이에 윤흥은 안장(安長)과 청장(淸長)을 지리산으로 보내 귀금선생이 비장(秘藏)한 음률을 배워 오게 했다. 그러나 귀금선생은 이들에게 기초적인 것만 가르쳐 줄 뿐 자신이 깨친 금도에 대해서는 몇 년이 지나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에 윤흥은 그의 아내와 함께 술과 잔을 받쳐들고 귀금선생을 찾아가 말했다. "임금께서 저희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선생님의 기술을 전해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3년이 지났으나 선생님께서는 금도를 전해 주시지 않으시니 제가 임금님께 복명(復命)할 길이 없습니다." 이같은 간절한 마음을 말하자 귀금선생은 비장하던 표풍(飄風) 등 세 곡을 안장과 청장에게 전했고, 안장은 그의 아들 극상(克相)과 극종(克宗)에게  전하여 귀금선생이 비장해 오던 옥보고의 금도가 신라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칠불암 도량을 들어서면 '동국제일선원(東國第一禪院)'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유명한 아자방(亞字房,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선원을 갖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정조실록』(1785년 3월 23일조)에는 이렇게 적어두고 있다. "취령 아래 칠불암이 있는데, 그 문귀에 달린 현판에는 '동국제일선원'이라 쓰여 있습니다. 그 안에는 아자형(亞字型)으로 된 승방이 있는데, 대사라 일컬으며 하루 종일 벽을 향하여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사람이 아홉 명이나 됩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흩어집니다." 이 글은 물론 선전관 이윤춘(李潤春)이 지리산에 숨은 수상한 도당에 대하여 정조에게 보고한 내용 중 일부이지만 당시 칠불암 아자방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을 상상할 수 있어 흥미롭다.

칠불암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때 구들도사로 알려진 담공선사(曇空禪師)가 처음 만든 것으로 2중의 온돌구조로 된 선방이다. 네 모서리의 높은 곳은 좌선하는 곳이고 십(十)자형의 낮은 곳은 경전을 공부하는 곳이라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번도 고치지 않았지만 일곱 짐의 화목을 한 번 때면 49일 동안이나 상하 온돌은 말할 것도 없고 벽면까지 따뜻하다고 한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도 이 곳에 와서 수도했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이 절의 기와를 새로 얹고 시를 한 마리 남기기도 했다.
「칠불암개와낙성시(七佛庵盖瓦落成詩)」(『淸虛集』권6)가 그것이다. 이 시에서 서산 대사는 '지리산 속의 칠불암은 신라 때 지은 옛 절'이라고 하면서 그 동안 지붕의 처마와 기와가 깨어져 얼음 녹은 물과 눈이 들어오고 부처의 얼굴에도 비가 온 후에는 이끼가 돋는다고 했다. 그러나 이를 걱정하는 많은 스님과 신도들이 힘을 모아 법당을 새로 단장하니 '용과 코끼리가 서로 앉아 법악(法樂)을 듣는 듯하고, 사람과 하늘이 서로 교감하여 난새와 뛰는 말을 보는 것 같다' 고 하면서 기와를 이기 전의 마음과 이고 난 후의 느낌을 잘 그려 놓았다.

칠불암 아자방은 전설도 남기고 있다. '목마 탄 사미승'이야기가 그 대표적이다. 조선 중기에 새로 부임한 하동군수가 쌍계사로 초도순시 차 왔다가 그 말사인 칠불암에 있는 아자방 선원이 보고 싶었다. 외인의 출입을 금했지만 이 군수는 억지로 선방문을 열게 하였다. 늦봄이기 때문인지 점심 공양을 마친 스님들은 혹은 천장을 쳐다보며, 혹은 고개를 떨구고, 혹은 좌우로 흔들거리며, 혹은 방귀를 뀌면서 졸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돌아온 군수는 이들을 혼내 줄 심산으로 '목마로 동헌 마당을 타고 돌면 후한 상을 내리고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준다'면서 쌍계사에 통문을 띄웠다. 통문을 받은 쌍계사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묘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 한 사미승이 자신이 이 일을 맡겠다며 다른 스님들에게 목마 만들어 주기를 부탁했다.

스님들이 만들어 준 목마를 메고 하동 관아로 간 사미승은 자신이 그것을 타고 동헌을 돌아보겠다고 군수에게 이야기했다. 군수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자신이 아자방에서 본 것을 사미승에게 이야기했고 거기에 따라 사미승은 답변하였다. "칠불암에 도인이 많다더니 내가 접 때 가보니 참선한다는 중이 모두 졸기만 하더구나." "도인이라고 하여 특별한 사람은 아니지요." "천장을 쳐다 보며 졸고 있는 것이 무슨 공부란 말이냐?" "앙천성수관(仰天星宿觀)이지요. 하늘을 우러러보며 별을 관찰하는 공부로 상통천문(上通天文) 하여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며 조는 자는?" "지하망명관(地下亡命觀)이지요.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게 되는데 그들을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몸을 좌우로 흔들며 조는 것은 무엇이란 말이냐?" "춘풍양류관(春風楊柳觀)이지요. 있음과 없음에 집착해도 안되며 전후좌우 어느 것에도 얽매여서는 안된다는 달관의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귀는?" "타파칠통관 (打破漆桶觀)이지요. 사또같이 우매한 칠통배들을 깨닫게 하는 공부입니다." 말을 마치고 사미승은 목마를 타고 동헌 마당을 한바퀴 빙돌더니 공중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쨌든 아자방은 많은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이는  그만큼 세인들의 주목을 받으며 널리 알려졌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우리 일행도 선방문을 열어보았다. 거기 불청객이  문을 여는 것도 모르고 스님 한 명이 왼쪽 귀퉁이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앙천성수관'이나 '춘풍양류관' 등 어떤 행관(行關)도 없이 말이다. 겨울 지리산에서 느끼는 적막함 뿐이었다. 1655년 김지백은 이곳에 와서 지리산에 있는 370개 절 가운데 이 곳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고, 1724년 정식은 아자방에서 스님들이 밤새워 종을 치며 예불을 드린다고 했다. 1800년 이 절은 불탔고 30년 뒤 복구 되었으나, 1948년 여순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시 재로 변하였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절은 1980년대에 복원하여 옛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채로이다. 우리는 '무상' 혹은 '허무'와 같은 단어를 떠 올리며 가야의 왕이 부처가 된 아들 그림자를 보았다는 영지(影池)로 갔다. 얼음 밑에선 잉어 몇 마리가 깡마른 연꽃 줄기를 주둥이로 들이받고 있었다.

칠불암을 벗어나 쌍계사로 향하였다. 선정에 든 반야봉 어깨 위로 구름에 반사되는 겨울 햇살이 건너가고, 골짜기는 귀금선생이 연주하는 표풍곡(飄風曲)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늘의 고요와 골짜기의 힘, 나는 여기서 스승이 중시했던 '시동처럼 가만히 있으면서도 용처럼 나타나고, 연 못처럼 고요하면서도 우레의 소리를 낸다(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는 말이 생각났다. 비록 하늘이 고요하고 골짜기가 요동을 쳐서 상하가 서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이같은 생각을 하며 쌍계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겨울이라 절 입구에 늘어서 있는 가게는 한산하였고, 장식용 물레방아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근처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고 바로 쌍계사로 들어갔다. 쌍계사 입구에는 최치원(崔致遠)이 썼다는 '쌍계(雙磎)'와 '석문(石門)' 이라는 글자가 좌우의 바위에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다. 김일손(金馹孫)은 이 글씨를 보고 아이들이 습자해 놓은 것 같다고 했는데, 스승은 1558년 4월 16일 이 글씨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홍지(泓之)는 김홍(金泓)의 자이고 강이(剛而)는 이정(李楨)의 자이다. 이들과 쌍계사로 들어서 면서 이 글씨를 보고 스승은 '자획의 크기가 사슴 정강이 만하고' '바위 속 깊은 데까지 새겨져 있어' 몇 천 년을 내려올 수 있었으며 앞으로도 또 몇 천 년을 내려갈 지 모른다고 했다. 약 500년 뒤에 우리가 이렇게 이 글씨를 보며 최치원과 함께 스승 자신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이나 하셨을까? 스승은 쌍계석문을 지나며 절 이름이 쌍계사가 될 수 있었던 내력도 생각했다. 서쪽에서 시냇물 하나가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을 굴리면서 아득히 백 리 밖에서 흘러오는 것은 곧 신응사(神凝寺)가 있는 의신동(擬神洞)의  물이고, 동쪽에서 시냇물 하나가 구름 속에서 새어 나와 산을 뚫고서 아득하게 흘러 그 지내 온 곳을 알 수 없는 것은 불일암(佛日庵)이 있는 청학동(靑鶴洞)의 물인데, 절이 두 시내 사이에 자리 잡았으므로 쌍계(雙磎)라고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일주문에는 최치원과 관련지어 그렇게 된 듯 '삼신산쌍계사(三神山雙磎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고, 금강문(金剛門)과 천왕문(天王門)을 지나면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영루(八詠樓)가 나온다. 팔영루에 오르면 대웅전 앞에 단아하게 서 있는 옛 비를 만나게 된다. 바로 최치원이 짓고 쓴  저 유명한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국보 제47호)」이다. 스승 역시 쌍계사에 와서 이 비석을 주목하면서 그 주변도 함께 관찰하였다.

절 문으로부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높이가 열 자나 되는 비석(碑石)이 귀부(龜趺) 위에 우뚝 서 있었는데 그것은 곧 최치원(崔致遠)의 글과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었다. 앞에 서 있는 높다란 다락집은 현판(懸板)에 팔영루(八詠樓)라고 쓰여 있었다. 그 뒤에 있는 비전(碑殿)은 아직 중수(重修)하는 중이어서 기와가 채 덮여 있지 않았다.

쌍계사는 의상(義湘)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723년 창건한 것인데 원래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였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에 "육조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에 의해 혜능의 머리를 평장한 뒤 그 이름을 옥천사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쌍계사에 '육조정상탑전(六祖頂相塔殿)'이 있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 뒤 최씨 성을 가진 혜소(慧昭, 774-850)가 840년에 이 절을  중창하였다. 혜소는 왕이 만나기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모두 거절하고 수도에만 열중하였다. 그는 특히 중국으로부터 차나무를 들여와 사찰 주변에 재배하였으며, 불교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사회의 여러 층에까지 보급하였다. 현재 화개일대에 차가 유명한 것도 이 때문이며 혜소가 범패를 교육하던 '팔영루'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850년 혜소가 76세(법랍 41세)의 나이로 죽자 헌강왕은 진감(眞鑑)이라 시호하고 탑이름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하였으며,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던 최치원으로 하여금 그 비문을 짓고 글씨도 쓰게 했다. 이에 최치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체인 변려문(騈儷文)으로 2cm 크기의  해서(楷書) 총 2,417자를 신의 손결에 의탁하여 써내려 갔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스승이 58세 되던 해 4월에 보았던 '높이가 열 자나 되는' 그 비석이었던 것이다.

스승 일행은 4월 16일부터 19일까지 4박 5일동안 이 절에 머물렀다. 19일은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청학동과 불일폭포를 다녀왔고, 16·17·18일은 꼬박 여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간 동안 스승 일행은 이 절에서 무엇을 하였을까? 16일에는 이 절의 스님인 혜통(惠通)과 신욱(愼旭)으로부터 차·과일·산나물 등으로 빈주지례(賓主之禮)의 대접을 받으며 이곳 저곳을 구경하였고, 17일에는 비가 많이 왔기 때문에 법당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담소하였다. 그리고 18일에는 산길 이 비에 젖어 움직이지 못하고 신응사 지임인 윤의(允誼)등 여러 사람의 방문을 받았다. 스승은 여기서 수행을 통해 기른 힘이 없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지기석(支機石) 위에 앉아 창자에 가득 한 티끌을 토해내고, 금화산(金華山)의 무한한 정기를 빨아들여 늘그막의 절반 약식으로 하지 못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스승은 '창자의 티끌'은 토해내야 하는 것이고, '금화산 정기'는 빨아 들여야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인욕제거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였다. 이는 스승이 49세 되던 해 감악산(紺岳山) 아래의 '가매소'에서 목욕을 하며 불렀던 노래와 같은 맥락에 있다. '사십 년 동안  쌓인 온 몸의 때를, 천 섬 맑은 물로 다 씻는다. 만일 진토가 오장 안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浴川」)라는 것이 그것이다.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청학동과 불일폭포 가는 길목, 청학루(靑鶴樓) 앞에서 우리는 서성거렸다. 청학동과 불일폭포까지 갔다 오는 것은 시간적으로 무리가 따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가고 싶었으나 모두 내일을 기약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여기서 황현(黃玹, 1855-1910)의 시가 나의 뇌리를 스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었다. 1889년, 그도 바로 이 자리에서 서성거렸다. "무슨 이유로 덧없는 인생은 흰 머리만 길어가는가? 붉은 잎과 푸른 이끼는 세상을 달리하지만, 문창(文昌)과 옥보(玉寶)는 여기가 고향이지. 내 풍진세상 속에서 온 것이 부끄럽고 나. 청학루 앞에서 길을 잃어 버렸네."라고 탄식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황현이 부끄러워 했던 풍진세상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거기엔 술과 열정, 그리고 아름다운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스승 일행이 이때 봉월이, 옹대, 강아지, 귀천이, 그리고 피리 잘 부는 천수 등을 데리고 들어 와 쌍계사 법당에서 술 마시며 풍악을 즐겼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준다. 풍진계과 신선계, 그 어떤 세계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움을 준다는 것이다. 하동 여여식당의 소주와 재첩회도 '여여(如如)'하게 우리의 혼을 섬진강에 누인다. 옥보선사의 거문고 음률에 맞추어 최치원은 변려문으로 노래부르고, 진감국사는 단성선률(單聲旋律)의 가락을 뽑아 올린다. 맵싸한 소주 향기가 쓸개를 지나며 짜릿하다. 복통이 오면 소합원이나 청향유로 처방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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