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冥先生評傳 ○

제1장 생애- 3. 講學과 自我定立(4)

 

李 商 元
(本院 硏究委員)

이 해 7월에 인종대왕께서 승하하셨다. 淸江 李濟臣이 와서 선생을 뵈었다. 그는 字가 夢應으로 本貫은 全義인데, 벼슬은 참판에 이르렀다. 처음에 선생은 그를 ‘遠大’로 기약하였고 선생이 돌아가시자 제문에서 ‘어려서부터 敬義의 가르침을 받았다’라는 말이 있다.

10월에 대사간 李霖(1495∼1546), 참봉 成遇(1497∼1579), 사간 郭珣(1502∼1545), 헌납 李致의 부음을 들었다. 이들의 죽음은 남명에게 있어 평생 동안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을사사화에 연루된 이들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하여 남명은 자신의 출처와 현실인식에 대하여 더욱더 온축각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의 하나로 1545년 명종이 즉위하던 해에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중종에게는 세 왕비가 있었는데 정비 신씨는 중종 즉위 직후 후사없이 폐위되고, 첫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호(인종)을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문제로 조신간에 일대 논란이 벌어져 윤지임의 딸이 두 번째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곧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명종)의 어머니이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지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격화되고 무고한 살륙이 자행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사림들에게 화가 미쳐 죽음과 귀양이 연이어 일어났다. 대사간 이림 등은 모두 남명과 두터운 정의가 있었는데 이들의 죽음을 보고나서 평소에도 이들에게 말이 미치면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고 죽을 때까지 잊지 않으셨다고 「연보」에 적고 있다. 남명은 살아서 세 번의 사화를 보게된다. 즉 4살(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에는 外系의 趙之瑞(1454∼1504)가 화를 당했다. 선생의 조부 曺永이 감찰 趙瓚의 딸 林川趙氏와 혼인하였는데 조지서는 바로 이들 소생으로 그는 연산군 세자 시절 그의 스승으로 나중에 연산군에게 小人으로 낙인찍혀 억울한 화를 당하였다.

또 19살(1519)에는 기묘사화를 당하여 숙부 彦卿이 연루되어 낙향하였다.

이 같은 세 번의 사화로 인하여 무고한 사류가 희생당하는 것을 겪고 난 남명은 평생 동안 자신의 몸가짐과 현실인식에 대하여 통절한 각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까닭에 그 자신은 엄정한 출처관을 견지하고 현실에 대하여 과단한 비판을 서슴치 않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을사사화에 희생되었던 李霖과 관련된 글을 선생의 문집에서 볼 수 있다. 이림의 字는 仲望이며 본관은 咸安이다. 벼슬이 병조참의와 대사간에 올랐으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義州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賜死되었다. 다음 글은 '꿈을 적어 하군에게 줌(記夢贈河君)'의 五言絶句에 붙은 序文이다.

남명은 1565년 李霖의 외손이자 남명의 조카 사위인 河天瑞에게 序文을 붙여 「記夢贈河君」이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

李公亮의 사위인 하천서는 남명을 무척 따랐으며 자주 찾아와 정이 두터웠다. 또한 혼인 관계의 정의 때문에 마음이 서로 각별하였던 것인데, 하루는 하군이 찾아왔다. 남명은 을사사화로 죽은 친구 이림이 남명의 꿈에 나타나 함께 정담을 나누었는데, 채 정담이 끝나기도 전에 사라졌음을 아쉬워 하며, 이 정한의 마음을 시에 기탁하여 아울러 서문을 병서하여 하천서에게 준 것이다.

이같이 을사사화로 입은 친구의 억울한 죽음은 남명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時流의 상처가 되어 오랫동안 머물러 평생 동안 잊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또 이 때 희생당한 한 사람의 知己인 成遇도 남명에게는 잊지 못할 통절한 마음을 볼 수 있는데, 遊頭流錄에 이 사실에 대하여 적고 있다. 즉 남명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신응사에 이르러 옛날에 성중려와 더불어 이 절을 찾아 보았고, 그 뒤 거의 삼십 년 만에 하중려와 함께 와서 한여름 내내 머문 적이 있었다고 술회하였다.

남명이 지리산을 여행한 이 때는 명종 13년 58살 되던 해(1558) 음력 4월 경인데, 이 때의 道程에서 저 세상 사람이 된 成遇에 대한 회한의 그리움을 다음 같이 간절하게 그렸다.

成遇는 大谷 成運의 仲兄으로 남명과는 어릴 때부터 벗이었다.

이러한 성우의 죽음을 평생 간직하며 살았던 남명의 두터운 우정은 생전에 그에게 준 시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중려가 보낸 짧은 편지를 오랜만에 받고서 서로의 곤고한 삶에 대하여 자책하면서 읊은 것인데, 友誼가 매우 돈독하였음을 서로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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