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3

南冥文學의 現場 踏査記(13)

겨울에 본 스승의 여름 지리산(1)

 

정 우 락
(경북대 강사)

 

도시에는 겨울이 없다. 꿈꾸는 들판과 그것에 반추되는 하늘도 없다. 들까마귀 한 마리 침묵의 나뭇가지를 빙빙 돌고, 오두막집의 굴뚝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얼음같은 창공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며 거기 생명이 있음을 아는 그런 통찰은 더더욱 없다. 도시엔 오직 허무와 추위만 있을 뿐이다. 이 허무와 추위는 도시인을 위협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얼어붙은 폐수, 그 검은 부조리 위에서 존재에 대한 의미 부여를 위하여 쟁투할 것을 다짐한다. 붉은 머리띠를 이마에 동여매고 속았다며 목이 터져라 외쳐보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속임'의 주체를 아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허무와 추위에 휩싸인 도시를 탈출하여 스승의 여름 지리산을 찾아보기로 했다. 때는 1999년 1월 초9일, 기묘년(己卯年)의 둘째 토요일이었다. 오전 8시 30분 나의 아파트 마당에서 설석규 선생님의 반가운 인사와 재미있는 웃음을 만났다. 같은 학교에서 강의하지만 정작으로 학교에서는 잘 뵙지 못하고 스승과 관련된 일련의 일이 있을 때만 이렇게 만나는가 싶었다. 우리는 대구 남대구 IC를 빠져나가 구마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를 번갈아 달렸다. 약 100km/h의 속도 위에서 남명학에 있어서의 내암(來庵)과 동강(東岡)의 역할 등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이 분들은 스승에게서 칼과 방울을 받았으니 소위 의발(衣鉢)을 전수 받은 제자라 할 만하다. 우리가 그 속도 위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는 대체로, '내암이 과연 남명학을 추락시켰을까?'라든가 '동강이 당대의 정치구도 하에서 군자와 소인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했을까?'하는 것들이었다. 하동IC는 이렇게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도착했다. 10시가 조금 덜 되었다.

스승이 김홍(金泓)·이공량(李公亮)·이희안(李希顔)·이정(李楨) 등과 섬진강에 배를 띄우고 하동을 지나 간 것은 1558년, 그러니까 58세 되던 해 음4월 15일 밤이었다. 오광대로 유명한 사천의 가산에서 배에 올라 남해 바다의 밤물결을 바라보며 스승은 '달이 낮같이 밝고 은같은 물결이 거울을 닦은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삼태성(三台星)이 문득 하늘 복판에 오자 동풍이 살짝 일어나므로 서둘어 돛을 달고 배를 몰아 하동을 거슬러 올라갔다. 스승은 이때 배 안에서 여러 벗들과 함께 섞여서 잠을 잤는데, 처음에는 김홍의 이불 한 쪽을 빌어서 누웠었다. 그리고 점점 나머지 부분을 차지하고 급기야는 김홍을 이불 밖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스승이 이렇게 지나간 섬진강의 물결은 참으로 푸르다. 강 저편에선 전라남도 광양시의 대나뭇잎이 겨울 햇살에 반짝이고 강 이쪽에는 경상남도 하동의 배나무가 단아한 자태로 겨울 하늘을 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섬진강은 남쪽 바다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하늘과 함께 잔잔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흐르고 있었다. 차창가로 지나가는 섬진강의 물살을 보노라니 갑자기 정태춘의 노래 「나 살던 고향」이 생각났다. 그는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을 일본 관광객들이 유린한다며 담담한 음성으로 고발하였다. 후꾸오까에서 비행기를 타고 섬진강 유곡나루로 은어잡이 나온 일본 관광객, 그들은 신깐센 왕복 기차값인 육만엔이면 아이스박스 가득히 은어를 잡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급호텔 사우나에 몸풀면서 긴밤 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의 서비스 역시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자본의 논리에 무참히 짓밟히는 우리 고향의 비극적 현실을 비판적 시각에서 노래한 것이라 하겠다.

하동에서 송준식·김경수·사재명·박라권 제선생님을 만났다. 김국장은 집이 하동이지만 모두 진주에서 오늘 답사를 위해 오신 분들이었다. 오랜만의 해후였다. 서로 반갑게 손을 맞잡았다. 김국장의 차에 옮겨 타고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면서 구체적인 답사계획을 세웠다. 신응사터 → 칠불사 → 쌍계사 → 불일암과 불일폭포 순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스승이 도탄(陶灘)에 배를 정박시키고 도보로 쌍계사 → 불임암과 불일폭포 → 신응사로 기행했던 것과 조금 다른 순서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서 왼편으론 비탈진 산에서 향기를 키우고 있는 차나무들이, 오른편으론 은가루를 뿌려 반짝이는 섬진강이 언뜻언뜻 지나갔다. 악양(岳陽)도 그렇게 지나갔다. 스승은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며 악양에서 한유한(韓惟漢)을 떠올렸었다. 한유한은 고려가 망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는 조정에서 대비원 녹사(大悲院綠事)로 불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이곳으로 와서 살았다. 스승은 그의 깨끗한 절개를 생각하며 술을 가득 부어 놓고 거듭 삽암을 위하여 탄식하였다. 악양의 삽암( 岩)이 그가 살던 옛집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소성 아래에 있는 동정호에서 평사리 쪽으로 가다 보면 취적대(取適臺)라고 각석된 바위가 바로 삽암이라고 이 지방 사람들은 믿었다.

화개면 덕은리(德隱里)를 지났다. 스승은 여기서 함양출신의 유종인 정여창(鄭汝昌)을 떠올렸었다. 정여창이 살던 옛집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여창은 1498년 무오사화로 인해 종성에 유배 갔다가 1504년 거기서 죽었는데,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다시 부관참시 되는 비운을 맞은 인물이다. 스승은 정여창에 대하여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의 실마리를 이어주신 분'으로 높게 평가하였다. 이같이 높이 평가할 만한 인물인 데도 불구하고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실로 운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면서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명철(明哲)의 행불행(行不幸)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한 것이다.

용강리와 황장리를 지나 옛 신응사터에 도착하였다. 신응사는 뒤에 신흥사(神興寺)로 불리기도 했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그 뒤 다시 조그마한 신흥암으로 복구되어 적어도 1743년까지는 보존되었다. 김지백(金之白)은 1655년에, 정시한(丁時翰)은 1686년에 이곳으로 여행하였으나 신응사의 남은 터만 보았을 뿐이고, 정식(鄭拭)이 1743년 이곳에 와서 신응사터에 세워진 조그마한 신흥암만 보았다. 당시 스승이 신응사 대웅전에서 본 것은 여러 꽃들이었다. 부처 앞에는 모란이, 바깥으로 나있는 들창에는 복사꽃 국화가 꽂혀 있었다. 그 빛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한다면서 스승은 우리 나라의 절에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라 하였다. 127년 뒤 정시한이 이곳에 왔을 때는 사정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신응사터를 보면서 '시냇가에다 계단을 쌓아서 네모 반듯하고 평평하게 하여 마치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 같았다'고 하고, 또한 그 위에 단을 만들어 철불(鐵佛)을 모시고 있었다고 했다. 이로써 우리는 당시부터 땅을 많이 돋우어서 절 마당을 만들었으며 신응사에서는 철불을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응사의 옛 터엔 지금 왕성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 일행은 초등학교 뒷뜰 차밭을 둘러보면서 주위의 지리적 배경 등을 고려하며 나름대로 당시 신응사의 금당이 위치했을 법한 자리를 생각해 보았다.

스승이 이곳을 찾았을 때 이 절에는 주지인 옥륜(玉崙)과 지임인 윤의(允誼)라는 스님이 술과 과일을 소반에 갖추어서 맞아주었다. 스승은 당시 신응사 앞 개울의 풍경을 '시냇물이 불어 돌에 부딪혀 치솟아 올라 부딪치고, 때로는 마치 만 섬 구슬을 들이마시고 내뿜고 하면서 다투어 쏟는 듯하고, 때로는 마치 천가닥 우레가 거듭쳐서 씨근거리며 으르릉거리는 듯하다'고 묘사했다. 또한 '깊은 못은 용과 뱀이 비늘을 숨긴 듯이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높이 솟은 돌들은 소와 말이 모습을 드러낸 듯 뒤섞여 셀 수 없다'고도 했다. 스승이 본 지리산은 이처럼 풍성했던 것이다. 조물주의 빼어난 솜씨에 조금이라도 부응하고자 시를 짓고 음악을 연주하며 정신을 고양시키려 하였으나 자연의 거대한 넓이와 깊이 앞에서는 나약한 인간일 따름이라는 것을 스승은 절감하였다. 시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지만 큰 항아리 안에서 나나니 벌이 우는 정도에 그칠 뿐이었다. 스승은 이 때 명산을 겸허한 태도로 대하며 마음을 씻을 도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과 같은 시는 바로 이같은 심경에서 제출된 것이다.

 

앞의 작품 1·2구에서 물과 산을 제시하였다. 뒤의 작품 1·2구 역시 마찬가지다. 물은 구슬을 토해내듯 우레와 벼락이 싸우듯했다. 맑으면서 동시에 장대한 힘이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산은 청제의 얼굴보다 짙기도 하고 해와 달을 갈 듯 높기도 했다. 푸르면서 동시에 거대한 높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보였다. 이같은 산수 속에서 스승은 인간이 마땅히 지녀야 할 '겸손'과 '자부심'를 생각했다. 앞의 작품 3·4구는 이를 말한 것이다. 겸손과 자부심이 지나치면 '비굴'과 '오만'으로 그 성질이 바뀌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자연을 통한 심성수양이라 할 것이다. 뒤의 작품 3·4구에서 보이는 '고담(高談)'과 '신우(神宇)'는 자연 속에서 가질 수 있는 인간의 '소득(所得)'이며, 그것은 결국 군자의 진실된 모습이 아닌 다른 무엇이 아닐 것이다.

스승이 신응사를 찾은 것은 세 번이었다. 한 번은 성우(成遇)와, 또 한 번은 하천서(河天瑞)와,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유두류록」을 쓸 당시인 이공량 등 40여명과 함께 온 것이 그것이다. 세 번째로 신응사를 방문했을 때 스승은 지난 번에 친구와 함께 온 것을 회상하며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두류산에 크고 작은 절이 얼마나 있는 줄을 알지 못하지만 신응사의 산수가 그 으뜸임은 분명하다. 옛날에 성중려(成中慮)와 더불어 상봉(上峯)에서 이 절을 찾아온 적이 있고, 그 뒤 거의 삼십 년만에 하중려(河仲礪)와 함께 와서 한 여름 내내 이 절에서 머문 적이 있었다. 다시 이십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 두 사람은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만 홀로 오니 마치 은하수 사이에 이르러 망연하게 언제 뗏목이 올지를 몰라 하는 것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에 같이 온 친구는 모두 저 세상으로 가고 스승 혼자 이렇게 다시 왔다. 여기에서 스승은 비감이 없을 수 없었고 이것을 은하수 사이에서 뗏목이 언제 올지 몰라 안타까워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신응사의 주위가 지리산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이 더욱 그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우와 이곳에서 며칠 간 묵은 지는 알 수 없고, 하중려와는 여름 한 철, 이공량 등 40여명과는 3박 4일 동안 이곳에서 머물렀다. 특히 두 번 째 여기에서 여름 한 철 가량 머물며 독서할 때는 주세붕의 시운(詩韻)을 따서 백운산(白雲山)에서 온 스님에게 시를 써서 그의 떠도는 생활을 위로하기도 하고, 독서하는 여가에 느낀 바 있어 「독서신응사(讀書神凝寺)」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독서신응사」라는 시를 이러하다.

이 작품은 스승이 자연을 통해 도를 즐기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현실을 강하게 인정하는 쪽으로 의식을 전이시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중요하다. 1구와 2구에서 볼 수 있듯이 우선 자연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다. 푸르름이 가득한 봄 산과 옥같은 시냇물을 먼저 제시하고 거기서 늦도록 앉아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3구와 4구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않을 수 없다면서 현실을 강하게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긍정을 통해 결국 4구에서 보이듯이 '수운(水雲)'으로 대표되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돌려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스승의 언어로 남아 있는 글에서 다양하게 검출되는 데 위의 작품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스승 의식의 귀착점이 현실주의와 닿아 있기 때문에 지리산 깊은 곳에 있는 신응사에 와서도 도탄에 빠진 생민을 잊을 수 없었다. '쌍계사와 신응사 두 절이 모두 두류산 한복판에 있어 푸른 산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흰 구름이 문을 잠근 듯하여 마치 사람의 연기가 드물게 이를 듯한데도, 이곳 절까지 관가(官家)의 부역이 폐지되지 않아 양식을 싸들고 무리를 지어 왕래함이 계속 잇달아서 모두 흩어져 떠나가는 형편에 이르렀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행정은 번거롭고 세금은 과중하여 백성과 군졸이 유망(流亡)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보호하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사정이 이같은 데도 뒤에서 여유 있게 산천을 찾아 노닌다면서 스스로를 냉혹하게 반성하기도 했다.

스승은 신응사에서 호남 선비 기대승(奇大升) 일행이 상봉에 올라갔다가 비 때문에 내려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홍명(鄭弘溟)은 그의 작품집 『기암집(畸庵集)』에는 스승이 당시 지리산 여행시 31세의 젊은 기대승을 보고 그 인물됨을 혹평했다고 전한다. 소식을 들었다는 것과 직접 만났다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지만 스승과 기대승은 서로 허여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이(李珥)는 그의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식이 기대승을 보고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득세한다면 반드시 나라 일을 그르칠 것이다" 하였고, 기대승 역시 조식을 유자(儒者)가 아니라고 하여 둘이 서로 허여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로 보아 이같은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응사터 앞에는 최치원이 심었다는 600년이나 된 푸조나무가 겨울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고, 앞개울 건너 넓다란 반석에는 최치원이 그의 귀를 씻은 곳이라는 뜻에서 썼다는 '세이암(洗耳岩)'이 있었다. 그리고 신흥교에서 칠불사 쪽으로 30미터쯤의 거리 왼쪽 상점 마당에 역시 최치원의 글씨로 알려진 '삼신동(三神洞)'이라는 암각이 있었다. 그러나 1686년 정시한도 이곳에서 이 글씨를 보면서 의심한 바 있듯이 과연 최치원의 친필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스승이 이곳을 다녀간 4년 뒤인 1561년 스승 일행을 술과 과일로 맞았던 신응사 주지 옥륜은 도우(道友)인 조연(祖演)의 도움을 받아 쌍계사와 칠불암으로 통하는 다리를 놓고 그 위에 다섯 칸의 누각을 세웠다. 다리는 홍류교(紅流橋)라고 하였고 누각은 능파각(凌派閣)이라 하였다. 그리고 서산대사에게 「능파각기(凌派閣記)」를 부탁했다. 서산대사는 이 글에서 '화개동 골짜기에 너댓집이 모여 사는 한 마을이 있다. 꽃과 대나무가 어지러이 비치고 닭울음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린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의관이 순박하고 머리카락이 예스럽다. 그들은 단지 밭을 갈거나 우물을 파서 먹고 살 뿐이다.'라며 도가적 세계에서 제시하는 이상향인 무릉도원을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 홍류교와 능파각이 사라진지 오래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다리가 신흥교라는 이름으로 지리산의 살 속 깊이 박혀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 다리를 밟으며 홍류교와 능파각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불교가 중국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서 바로 우리 나라에 전해졌다는 이른 바 불교 날래설(南來說)의 진원지인 칠불사를 찾았다. 비취색 하늘과 깡마른 나무들, 개울에선 얼음 밑으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지리산의 겨울은 무지개를 꿈꾸며 이렇게 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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