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冥先生評傳 ○

제1장 생애- 3. 講學과 自我定立(3)

 

李 商 元
(本院 硏究委員)

警齋 郭恂과 같이 雲門에 가서 三足堂 金大有(1479∼1552)와 逍遙堂 朴河淡(1470∼1560)을 방문하였다. 경재는 字가 伯瑜, 本貫은 玄風人으로 남명과 從遊하였는데, 연산군때 태어나 을사사화에 화를 입었다. 선생이 평하길, 백유는 好賢樂善한 사람이라 하였다.

三足堂은 字가 天祐, 金海人으로 성종때 태어났는데 탁영 김일손 선생의 조카이다. 남명선생과 從遊 하였는데, 나중에 문과에 급제하여 漆原 현감을 지냈다.

남명이 당시 淸道 고을 원으로 지내던 周南 李有慶(1497∼1558)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三足堂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삼촌 탁영과 함께 鄕所에 사당을 세워 배향하도록 주선하고 있다.

여기서 介子推는 춘추시대 진나라 사람인데 진나라 文公을 따라 떠돌다가 귀국한 뒤에 封祿을 받지 못하고 그 어머니와 함께 綿山에 숨어 살았다. 뒤에 문공이 찾았으나 나오지 않자, 산에 불을 질렀다.끝내 나오지 않고 불에 타 죽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넋을 기려 그날은 불을 피우지 못해 찬밥을 먹었으므로 이로부터 寒食이 유래하였다.

이 글에서, 남명은 金大有의 인품을 개자추에 빗대어 鄕人들이 그를 사모함이 지극함을 말하고, 그를 사당에 모셔 향사할 것을 간청하였다.

남명과 삼족당은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道義之交로 사귀었는데, 두 사람의 관계는 남명집에 실린 그를 위해 쓴 시와 묘갈명을 살핌으로써 대략을 엿볼 수 있다.

三足堂이 죽으면서, 남명의 가난함을 걱정하여 그 아들에게 해마다 곡식을 보내도록 유언으로 명하였는데, 남명은 이를 사양하는 시를 지어 그 마음을 실었다.

중국 송나라 학자인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하다가 어려운 곳이 있으면, 당대의 史學者인 유도원에게 물어서 책을 저술하였다. 도원이 남쪽으로 떠날 때 그가 너무 가난하여 옷가지 몇 벌을 굳이 보냈는데, 도원은 영주 땅에 이르러 이를 봉하여 다시 돌려보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옛 일을 의탁하여 남명은 金大有에게 극진한 사양의 뜻을 시로써 풀어낸 것이다. 이를 보면, 두 사람의 情宜가 얼마나 돈독했으며, 또 남명의 처신이 얼마나 단정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또 三足堂에게 준 시에서,

세월의 흐름에 대장부의 뜻도 함께 부침함을 읊었는데, 道를 펴지 못하는 世事不利의 정한을 빈 배에 의탁하여 情人에게 준 시이다.

이 같은 깊은 友宜에도 불구하고, 三足堂은 74살의 일기로, 남명보다 20년 먼저 세상을 떠난다. 사실 三足堂은 남명보다 22살 위로, 그가 세상을 뜨자 남명은‘선무랑호조좌랑 김공묘갈’을 지었다.

그 대략을 보면, 남명은 그에 대하여 대단한 믿음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명은 묘갈에서 三足堂의 모습을 매우 치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선생은 그가 때에 맞지 못하여 크게 쓰이지 못함을 매우 애통해 하였다.

한편 逍遙堂은 字가 應千, 本貫은 密陽으로 당시에 淸道의 雲門山 아래 訥淵이라는 곳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때 남명선생께서 곽경재, 김삼족당과 함께 방문하였다. 소요당의 저술로는 逍遙堂逸稿가 있다. 그의 아우 朴河澄(1484∼1566)의 字는 聖千, 號는 甁齋, 혹은 西巖인데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고 호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그의 문집 甁齋集에는 南冥先生과 人性에 대하여 문답한 ‘問答說’이 실려있다.

소요당과 그의 아우 병재와 함께 남명선생은 청도 운문산에서 시를 읊으며 노닐었다.

이때 형제에게 써 준 시가 있는데 어느 봄날 회포를 풀고나서 서로 작별하면서 내년 봄을 기약하는 아쉬움을 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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