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2

南冥연원을 찾아서(11)

각재(覺齋) 하항(河沆)

송 준 식
(진주전문대교수)

 

하항(河沆, 1538∼1590)의 자(字)는 호원(灝源)이고, 호(號)는 각재(覺齋)이며, 본관(本貫)은 진양(晋陽)이다. 수곡(水谷)에 거주하였다. 그에 관한 기사는 주로 그의 문집인 『각재집(覺齋集)』과 그와 종유한 인물의 문집 및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에 남아 있다. 그의 문집은 사후 후손 진현(晉賢) 등이 1813년 진주(晋州) 대각서원(大覺書院)에서 목판으로 간행된 것으로 분량은 3권 1책으로 총 77판이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김굉(金土宏)이 지은 각재의 「行狀」과 「남명선생년보(南冥先生年譜)」, 『죽각집(竹閣集)』, 『동곡실기(桐谷實紀)』, 『송암선생문집(松 先生文集)』, 『죽각집(竹閣集)』, 『모촌집(茅村集)』,『초료당실기( 堂實紀)』, 『부사집(浮査集)』, 『설학선생문집(雪壑先生文集)』, 「옥동선생년보(玉洞先生年譜)」를 근거로 하여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20세 이전에 이미 남명선생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문익성(文益成, 1526∼1584), 오건(吳健, 1521∼1574)과 각별히 지내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남명선생은 각재가 재주가 있고 또 학문에 뜻이 독실함을 사랑하여 마침내 여러 성리서(性理書) 읽기를 권하였다. 이로부터 각재는 전적으로 몸을 위하는 학문을 숭상하고 의리상의 공부에 전념하였으며, 남명선생이 매양 사람을 얻어 가르친다고 하였다. 1556년 8월에 남명선생에게 공부하러 온 이광우(李光友, 1529∼1619)와 함께 수학하면서 벗으로 사귀었다.

24세 때(1561년, 신유) 오건, 최영경(崔永慶, 1529∼1590), 이조(李晁, 1530∼1580), 김우옹(金宇 , 1540∼1603), 유종지(柳宗智, 1546∼1589)와 서로 오가며 강마하였다.

26세 때(1563년, 계해) 2월에 남명선생이 남계서원을 참배하였고, 강익(姜翼, 1523∼1567)과 더불어 임훈(林薰, 1500∼1584)의 집을 방문할 때에 그는 조종도(趙宗道, 1537∼1597), 하응도(河應圖, 1540∼1610), 유종지, 진극경(陳克敬, 1546∼1617)과 함께 남명선생을 모셨다.

27세 때(1564년, 갑자) 겨울에 정사현(鄭思賢, 1508∼1555), 최영경이 박제현(朴齊賢, 1521∼1575)에게 정사시(精舍詩)를 주었다.

29세 때(1566년, 병인) 이정(李楨, 1512∼1571), 김우옹, 노진(盧 , 1518∼1578), 강익, 정유명(鄭惟明, 1539∼1596), 정구(鄭逑, 1543∼1620), 조종도, 이광우와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斷俗寺)에서 모여 산천재(山天齋)로 가서 수학하였다. 이 해 봄에 이정(李瀞, 1541∼1613)과 더불어 남명선생을 모시고 임훈을 방문하였는데, 이 때 하응도, 유종지도 함께 갔다. 노진의 집에 이르자 노진이 강익 및 제공들을 불러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수양하였다.

30세 때(1567년, 정묘) 식년 생원에 제1등으로 합격하였고(『사마방목』), 덕천에서 이광우의 죽림정사를 방문하였다.

36세 때(1573년, 계유) 유덕룡(柳德龍, 1563∼1644)이 와서 배웠고, 39세 때(1576년, 병자) 최영경, 유종지, 성여신(成汝信, 1546∼1632), 이조, 손천우(孫天祐, 1533∼1594), 이천경(李天慶, 1538∼1610), 이정(李瀞)과 더불어 덕천서원의 건립을 의논하였으며, 서로 오가며 남명선생의 사우를 배알하였다.

8월에 덕천에 남명선생의 사우(祠宇)를 세웠고, 최영경, 손천우, 유종지, 하응도, 이천경, 이로, 이조, 권세륜(權世倫, 1542∼?), 이광우 등이 힘을 합쳤다.

40세 때(1578년, 무인) 1월 11일에 경상 감사가, "진주(晋州)에서 사는 생원(生員) 하항(河沆) 등은 학식이 정밀하고 밝으며 조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것으로 계본을 올렸다."(『선조실록』 11년)41세 때(1579년, 기묘) 봄에 수곡으로 이광우가 방문하였고, 46세 때(1584년, 갑신) 이대기(李大期, 1551∼1628)를 방문하였고, 47세 때(1585년, 을유) 이정(李瀞), 유종지 등의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진주의 공옥대(拱玉臺)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남명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을 입고, 덕천서원의 원장이 되어서는 일시의 사표가 되었다. 『서원지』와 『산해연원록』을 찬술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1590년(선조 23년, 경인)에 12월 19일에 내복재(來復齋)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3세였다. 부인은 대구 유(柳)씨로 현감 예원(禮源)의 딸이다. 슬하에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소(鏡昭)이고, 딸은 사인(士人) 유덕룡(柳德龍)에게 시집갔다.

그는 음양, 의학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특히『소학』과『근사록』을 존신(尊信)한 것으로 보아 남명의 학풍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제자교육을 통해서 스스로 남명의 실천적 학풍을 전수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남명선생이 그를 설중한매(雪中寒梅)라고 하였고, 최영경은 사상백로(沙上白鷺)라고 하였으며, 오건은 기상항정(氣象沆靜), 처사종용(處事從容)이라고 하였고, 정구(鄭逑)는 각재와 수우당은 기상은 비록 같지만, 대절에 임하는데 있어서는 가히 뺏지 못하는 것이니 각재 역시 그러하다. 학문에 있어서는 더욱 공(功)이 있다고 하였다.

비록,『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는각재에 대해 악의에 찬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율곡 이이를 폄하하는 내용을 담은 그의 상소와 내암 정인홍과의 관계에 기인한 당쟁의 소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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