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글터

남명 조식 유적 답사기

 

이 혜 랑
경북대 동양어문학부 3학년

 

일요일 새벽. 단잠에서 깨어나 부산을 떨며 찾아간 곳은 문화 예술 회관 앞이었다. 남명 조식의 유적을 답사하기 위함이다. '예술마당 솔' 우리 것을 아는 모임 중 진달래·간석기반4에서 <남명 조식과 영남 사림파>라는 제목으로 답사를 주최하였다. 나는 '예술마당 솔'과 전혀 관계 없었으나 학과 스승님의 비호(?) 아래 이 답사에 참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었다. 7시를 조금 넘어 버스는 대구를 출발했다. 나는 이번 답사에 대한 사전 공부를 하지 않은터라 자리에 앉자마자 당황스런 마음으로 안내 책자 이곳 저곳을 살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 버스는 고령군으로 접어들었다. 답사의 첫여정으로 발을 디딘 곳은 도로가에 위치한 월담 정사현 유적지였다. 버스에서 내려 이슬이 가시기 전의 촉촉한 풀잎을 아작아작 밟으며 크게 한 번 아침 공기를 들이마셨다. 남명의 매부인 정사현의 비석 및 묘소와 남명의 누이 조씨 부인의 묘소를 둘러보고 묵념하였다. 마중 나온 정사현의 후손들과 인사도 나누었다. 남명은 이 지방에 자주 와서 월담과 교유하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 아침의 멍함과 처음 접한 유적지라서 그런지 아직 남명의 숨결을 느끼기엔 부족한 느낌이 있었다.

발길을 돌려 영남 사림의 총수 점필재 김종직의 종택으로 행했다. 종택에 다다르니 그의 후손 또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선조의 일생과 업적을 자부심을 갖고 얘기하였다. 굶어 죽어도 선비정신은 버리지 않듯이 빠듯한 종택 살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술과 음식으로 예를 표했다. 종택의 후한 인심이 고맙기는 하나 종가 며느리의 고충을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합천의 함벽루였다. 황강의 물줄기를 끼고 세워진 누각에 오르니 말 그대로 한폭의 산수화가 눈앞에 펼쳐졌다. 먼 나무와 산들은 마치 중국의 계림을 축소해서 옮겨 놓은 듯 했다. 누각 안에는 이러한 자연과 어울려 남명과 퇴계의 시가 마주하여 걸려 있었다. 남명의 '함벽루'라는 시를 감상하며 그의 도가적 면모를 느꼈다. 누각을 내려와 남명이 합천 군수 이증영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썼다는 이영공유애비가 있는 입구쪽으로 갔다. 비에는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백성에 대한 남명의 애정이 간접적이지만 짙게 배여 있었다. 비 주변에 대구에서 오신 교수님과 제자들이 탁본 작업을 하고 있어 오래 머물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다음 여정지인 황계폭포는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20여분을 걸어가야 했다. 전혀 폭포가 나올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려고 하는데 어디선가 커다란 물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 앞에 절벽이 가로놓이며 그 절벽을 따라 하늘에서 쏟아지는 시퍼런 물줄기가 보였다. 순간 숨이 딱 멈추는 것 같았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자연이란... 역시 자연은 자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명이나 나같은 범인은 똑같이 자연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남명을 나와 동일시한 것은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명이 이제까지의 나와는 달리 자연을 인식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이 밀려 왔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남명이 폭포를 바라보며 그것을 닮으려고 했던 그의 정신을 생각하며 물줄기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남명은 폭포로 변해 내 앞에서 그 거대한 모습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돌아나오는 길. 일행들의 삼행시를 들으며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남명의 자취를 찾아 뇌룡정으로 향했다. 어린아이 하나가 지나갈만한 좁은 문을 몸을 굽혀 들어가니 담장에 둘러싸여 있던 네모 반듯한 아담한 뜰과 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마루에 앉아 남명의 신명사도를 떠올렸다. 신명사도와 똑같은 뇌룡정의 구조에 놀라면서 말이다. 눈과 입, 그리고 귀로 나 있는 세 개의 문을 지킴으로써 즉 인욕을 막음으로써 자기 내면의 의식을 깨끗하게 유지하고자 했던 남명. 신명사도를 그리며 생활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려 했던 남명의 철저한 정신에서 일종의 전율이 느껴진다. 전쟁터에서 적과 마주한 비장한 모습의 장군과 같이 자신의 정신을 지키고자 외부에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으려고 스스로와 싸운 남명. 그의 치열한 삶에 비친 나의 삶이 참으로 부끄러워 내가 들어온 인욕의 문을 슬그머니 닫아본다. 나의 이런 마음. 많은 사람들이 남명을 흠모하고 그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노력하는 이유가 아닐까? 여정 때문에 들어온 것과 반대되는 좁은 문을 나는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명이 물리치고자 했던 인욕의 세계로 다시금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온통 펼쳐져 있는 인욕 세계의 광대함을 새삼 피부로 느끼며 조금 떨어진 단속사지로 향했다. 그곳의 정당매를 보기 위해서였다. 옛절은 간 데 없고 한쌍의 석탑만이 서로를 의지하며 서 있고 나무 그늘 밑의 평상에는 동네 노인들이 모여 계셨다. 유적지라기보다는 평범한 동네같은 느낌이었다. 마을 안쪽에 정당매가 있었다. 그것은 철조망에 둘러싸여 다시는 꽃을 피우지 못할 것 같은 앙상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 나무는 강회백이 소년 시절 단속사에서 공부할 적에 심은 나무로 수령이 6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이 매화 나무가 주목되는 이유는 남명이 '단속사정당매'라는 시를 지어 강회백의 지조 없음을 비판하며 풍자의 세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풍자의 매개물로 이용된 정당매는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하였다.

그곳을 서둘러 떠나 마지막 답사지인 지리산 일대로 오니 어느새 해가 지려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남명이 말년을 보내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산천재가 있고 그가 묻혀 있는 묘소,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덕천서원 등이 있다. 작년 겨울 이후로 반년이 지나서 다시 온 산천재는 고즈넉하고 그 너머 개울가는 공사로 인해 황량했다. 풍수지리학적으로도 좋지 않다는데 왜 그리 자연을 파괴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하나하나가 조상의 숨결인데 말이다. 남명이 늘 창을 열고 대했을 천혜의 스승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이 아쉬워 그저 멀리 구름에 반쯤 가려진 천왕봉만 바라보았다.

산천재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신도비를 잠시 보고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 남명의 묘소에 묵념한 후 덕천서원으로 향했다. 서원의 마루에 앉아 지친 여정을 잠시 풀고 '제덕산계정' 한 수를 읊었다. 남명의 시를 실내에서 접하는 것과 그의 체취가 스며있는 현장에서 읊조리는 것은 참으로 달랐다. 남명과 그의 문학은 책상 앞에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새삼 느꼈다. 이것은 아마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그 현실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했던 남명의 현실주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이번 답사는 비록 하루라는 짧은 시간과 부분적인 남명의 유적 답사였지만 책상 앞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얻었다. 답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은 어둡고도 길었지만 남명을 생각하니 지금껏 나약했던 나의 정신이 깨이는 듯하여 참으로 상쾌하였다. 남명은 달밝은 밝은 밤 휘둘러진 한줄기 칼날의 섬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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