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선생 묘갈명(墓碣銘)

대곡 성운
번역/이창호

 

조(曺)씨는 옛부터 드러난 성(姓)이라 대대로 인물이 났으니 그 선대에 고려 태조 때 벼슬하여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낸 휘 서(瑞)라는 분이 있었는데 덕궁공주(德宮公主)가 그 어머니이다. 그 뒤로 서로 이어 현창(顯昌)하여 휘 은(殷)은 중랑장(中郞將)이니 공(公)에게 고조이고, 이 분이 휘 안습(安習)을 낳았으니 성균생원(成均生員)이며, 생원이 휘 영(永)을 낳았으니 벼슬하지 않았다. 그 아들 휘 언형(彦亨)은 처음에 재예(才藝)로 뽑히어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으나 꼿꼿하고 남과 어울림이 적어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벼슬로 별세 했으며 부인 이씨는 충순위(忠順衛) 국(菊)의 따님으로 곤범( 範)이 있어 남편을 섬김에 덕을 어김이 없었다. 공은 그 둘째 아들이니 식(植)이 이름이고 건중(楗仲)은 그 자(字)이다.

공(公)은 태어남에 체격이 우람하고 용모가 빼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정중함이 어른과 같아 또래들을 따라 장난치지 않았고 놀이 도구도 또한 손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판교공이 사랑하여 말을 할 때부터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시서(詩書)를 가르쳤는데 응대하여 문득 글귀를 외워 잊지 않았다. 나이 8-9세에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모부인이 근심스런 안색을 지으니 공이 자세를 가다듬고 기운을 내어 거짓 차도를 보이며 고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사람을 낼 때 어찌 헛되이 하겠습니까? 지금 제가 다행히 남자로 태어났으니 하늘이 반드시 부여한 바가 있어 저에게 이룰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늘의 뜻이 여기에 있는데 제가 어찌 오늘 갑자기 요절함을 근심하겠습니까?”라고 하니 듣는 이가 비범하게 여겼다. 점점 자람에 온갖 서적을 널리 통달하였고 더욱 좌구명(左丘明) 류종원(柳宗元)의 문장을 좋아하였으니 이런 까닭으로 문장이 기고(奇高)하고 기력(氣力)이 넘쳤다. 경물(景物)을 읊고 일을 기록함에 처음부터 뜻을 기울이지 않은 듯 하였으나 말이 엄하고 뜻이 세밀하여 엄연히 법도가 있었다. 과거로 인하여 유사(有司)에서 문예(文藝)를 바치니 유사가 대책(對策)을 보고 크게 놀라 제일(第一) 제이(第二)로 발탁한 것이 무릇 세 번이었으며 고문(古文)을 배우는 이들이 다투어 전송(傳誦)하여 본보기로 삼았다. 가정(嘉靖) 5년(1526)에 판교공이 세상을 떠나니 공은 경사(京師)로부터 상여를 받들어 향산(鄕山)에 안치하고 모부인을 맞아 돌아와서 시양(侍養) 하였다. 공이 어느 날 글을 읽다가 노재 허형(魯齋 許衡)의 말 중에 “이윤(伊尹)의 뜻을 뜻 삼고 안연(顔淵)의 학문을 배우라”는 글귀를 보고는 깊이 깨달아 발분하고 뜻을 가다듬더니 육경(六經) 사서(四書)및 주자(周子) 정자(程子) 장자(張子) 주자(朱子)의 유서(遺書)를 강송하며 이미 하루 해를 다하고 또 밤중까지 계속하면서 힘을 다하고 정신을 쏟아 연구 탐색하였다. 공은 학문에는 경(敬)을 지니는 것보다 요긴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일(主一)공부에 전념하여 밝게 깨어 혼매(昏昧)하지 않았으며 몸과 마음을 거두어 지켰다. 또 학문에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극기(克己)에 힘써서 찌꺼기를 씻어 내고는 천리(天理)를 함양하였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였고 깊은 곳에 홀로 있을 때에도 성찰하여 앎이 이미 정묘한 가운데 더욱 그 정묘함을 구하였고 행함에 이미 힘쓴 가운데 더욱 그 힘을 기울였으며 몸소 돌이켜 체험하고 실지를 밟는 것으로 노력하여 반드시 그 경지에 도달함을 구하였다. 중종(中宗) 24년에 모부인 상을 당하여 선친의 묘 왼편에 장사하였다.

공은 지혜가 밝고 식견이 높아 진퇴의 기미를 잘 살폈으니 일찍이 스스로 보건대 세도(世道)가 상실되어 인심이 이미 그릇되고 풍속이 각박해져 대교(大敎)가 침체 되었으며 또 현인의 벼슬길이 기구하여 재앙의 기미가 은밀히 드러나니, 이 때를 당해서는 비록 교화를 만회 시킴에 뜻을 둔다 해도 도(道)가 때를 만나지 못하여 결국 내가 배운 바를 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런 까닭으로 과시에도 나가지 않고 벼슬도 구하지 않았으며 뜻을 거두어 산야에 은둔하였으니 남명(南冥)이라 자호(自號)하고 그 정자를 산해(山海)라 일컬었으며 사(舍)를 뇌룡(雷龍)이라 하였다. 최후에는 두류산 수굴운동(水窟雲洞)으로 들어가 8∼9개의 서까래를 얽어매고 산천재(山天齋)라 편액하였으니 몸을 깊이 감추어 스스로 닦은 지 수 년이 되었다. 중종조(中宗朝)에 천거되어 헌릉참봉(獻陵參奉)을 제수 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명종조(明宗朝)에 또 유일(遺逸)로서 재차 전생서(典牲署)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를 제수하고 이어 단성현감(丹城縣監)으로 옮겼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인하여 글을 올려 이르기를 “국사가 날로 그릇되고 민심이 이미 떠났으니 그 반전의 기틀은 구구한 정형(政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 사지(司紙)를 제수하였으나 병으로 사양하였으며 또 상서원판관(尙瑞院判官)으로 불러 들여 전전(前殿)에서 인견할 때에 주상(主上)이 치도(治道)를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고금(古今)의 치란(治亂)은 책 속에 실려 있으니 신(臣)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컨대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의(情義)가 서로 부합하여 환연히 틈이 없어야 더불어 다스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옛날 제왕들은 신하 대접하기를 벗과 같이 하여 더불어 치도(治道)를 밝혔으니 신하의 말을 듣고 칭찬하며 감탄한 성대함이 있게 된 까닭입니다. 바야흐로 이제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서로 흩어짐이 마치 어지러이 흐르는 물과 같으니 마땅히 서둘러 구하기를 불난 집에 불을 꺼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또 학문하는 방법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인주(人主)의 학문은 다스림을 내는 근원이고 학문은 마음으로 체득함이 제일 귀합니다. 마음으로 체득하면 천하의 이치를 궁구할 수 있고 사물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어 만 가지 기미를 모두 잡아 스스로 무사할 것이니 그 노력은 단지 경(敬)에 있을 뿐입니다.” 하였으며, 또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일을 묻자 대답하기를 “반드시 인물을 얻어야 한실(漢室) 회복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에 세 번이나 찾아간 것입니다.”하니 주상이 칭찬하였다. 융경원년(隆慶元年, 1567)에 선조(宣祖)가 자리를 이어 받아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였고 이어 징명(徵命)이 있었지만 또 사양하면서 소를 올려 “청컨대 구급(救急)이란 두 글자를 받쳐 몸 바침에 대신합니다.”하고 시폐(時弊) 열 가지를 진언했다. 선묘(宣廟) 2년에 부름을 입었으나 사양하고 또 봉사(封事)를 올려 말하기를 “도(道)는 인주(人主)의 명선성신(明善誠身)에 있으니 명선성신은 반드시 경(敬)으로써 주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하고 인하여 서리(胥吏)의 폐단을 극언하였다. 한참 후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을 제수하였으나 또 사양하였으며, 신미(辛未, 1571)에 큰 흉년이 들어 임금이 곡식을 내리자 글로써 감사를 드리고 인하여 말하기를 “여러 번 소(疏)를 올려 말씀을 드렸으나 말이 그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하였으니 말이 매우 간절하고 곧았다. 임신년(壬申年, 1572)에 병이 심해지자 임금이 의원을 보내 병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도착하기 전 그 해 2월 8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2세이다. 산천재 뒷산에 자리 잡아 4월 6일에 장사 지냈다.

공은 천자(天資)가 영달(英達)하고 기우(氣宇)가 고매하며 단엄방직(端嚴方直)하고 강의정민(剛毅精敏) 하였다. 조행이 확고하여 움직임에 법도를 따랐으며 눈으로는 나쁜 것을 보지 않고 귀로는 엿듣는 일이 없었다. 장중한 마음을 항상 흉중에 지니고 태만한 모양을 밖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항상 깊은 방 안에 조용히 거처하여 발걸음이 문 밖을 나가지 않았으니 비록 기둥을 연하여 사는 이들도 그 얼굴 보기가 드물었다.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일어나 관을 쓰고 띠를 두르고는 자리를 바로 하여 시동(尸童)처럼 앉아 어깨와 등이 꼿꼿하였으니 바라봄에 마치 도형이나 조각상 같았다. 책상에 먼지를 털고 책을 펴면 심안(心眼)이 집중되고 묵관잠사(默觀潛思)하여 책 읽는 소리를 내지 않았으니 방안이 적적하여 마치 사람이 없는 듯 하였다. 위의(威儀)와 거동이 느긋하고 한가하여 스스로 법도가 있었으며 비록 급하고 놀란 때를 당해도 법도를 잃지 않았으니 매우 볼 만 하였다. 집에서는 엄하게 가족을 다스려 규문(閨門)과 외정(外庭)의 남녀 모두가 정숙하였으니 가까이 뫼시는 몸종들도 머리를 거두어 쪽을 단정히 아니하면 감히 나오지 못했으며 비록 부부 사이라도 또한 그러했다. 벗을 사귐에 반드시 단정하여 그 사람이 벗 할만 하면 비록 포의(布衣)라도 왕공(王公)처럼 높여 반드시 예로서 공경했고 벗하지 못할 사람이면 비록 벼슬이 높고 귀하여도 흙으로 만든 인형같이 여겨 함께 앉기를 부끄러워 하였다. 이 때문에 사귐이 넓지 못했지만 그러나 그 더불어 아는 이는 학행과 문예를 지니어 모두 당세의 이름난 선비 중에 선택된 사람들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환하게 밝아서 사람들이 숨길 수 없었으니 어떤 신진(新進) 소년이 청반(淸班)에 올라 명성이 드러났거늘 공이 한 번 보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 재주를 끼고 스스로 뽐내며 기세를 부려 사람 대하는 것을 보니 뒷날 어질고 능한 이를 해치는 일이 반드시 이 사람을 연유할 것이다.”하였으니, 그 후 과연 높은 벼슬에 올라 몰래 흉악한 괴수와 결탁하여 법을 농간하고 위세를 부려 사류(士類)를 섬멸하였다. 또 어떤 선비가 글재주는 있으나 급제하지 못했는데 그 사람됨이 음험하고 시기심이 많아 어진이를 원수같이 여겼다. 공이 우연히 모임 중에서 보고 물러나 친구에게 말하기를 “내 그 사람의 미간을 살펴보고 그 사람됨을 짐작컨대 외모는 호탕하지만 흉중에 남을 해칠 마음을 품었으니 만일 벼슬을 얻어 심술을 부리면 선인(善人)들이 위태할 것이다.”하니 친구가 그 밝음에 탄복했다.

매양 국기일(國忌日)을 당하면 풍악을 듣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더니 하루는 두 셋 높은 관리가 공을 청하여 절에 모여 술자리를 벌였다.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아무 대왕의 기일(忌日)이 오늘인데 여러분은 어찌 잠시 잊었는가?”했더니, 좌우가 깜짝 놀라 사과하고 서둘러 풍악과 고기를 물리고는 술만 한두 잔 돌리다가 이내 헤어졌다. 천성이 효우(孝友)에 돈돈하여 어버이 곁에 있을 때는 반드시 온화한 얼굴로 잘 봉양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며 부드러운 옷과 맛있는 음식을 또한 두루 갖추었다. 상(喪) 중에는 애모(哀慕)하여 피눈물을 흘렸으며 질대( 帶)를 벗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떠나지 않았으니 비록 병이 들어도 또한 즐겨 빈소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알맞게 익었는지 깨끗하게 씻었는지를 부엌 하인에게만 맡기지 아니하고 반드시 몸소 살폈다. 조문하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엎드려 곡하고 절할 뿐 함께 앉아 말하지 않았으며 하인에게 분부하여 상을 마치기 전에는 집안의 번잡한 일로 찾아와 고하지 말게 하였다. 그 아우 환(桓)과 더불어 우애가 매우 두터웠으니 말하기를 “지체(支體)는 떨어질 수 없다”하고 한 울 안에 같이 살면서 출입에 문을 달리 하지 아니하고 밥상과 잠자리를 함께 하며 즐겁게 지냈다. 재산을 덜어 형제 중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고 털끝 만큼도 스스로 갖지 않았으며 남들이 상사의 슬픔을 당했다고 알리면 자기가 당한 듯 아파하면서 달려가 도우기를 수화(水火)의 재난을 구하듯 하였다. 능히 세상을 잊지 못해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근심하더니 매양 달 밝은 밤이면 홀로 앉아 슬피 노래하고 노래가 끝나면 눈물을 흘렸으나 곁에 있는 이들이 그 까닭을 알지 못햇다.

공은 만년에 학문이 더욱 진보하고 조예가 정심하였으며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각기 그 재능에 따라 독실하게 하였으니,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의심스런 뜻을 분석하여 그 말이 추호도 남김이 없어 듣는 이로 하여금 환히 통달하게 한 다음에야 그만 두었다. 또 배우는 이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지금의 학자들이 지극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높고 먼 것을 좇으니 병통이 적을 뿐만 아니다. 학문이란 처음부터 부모를 섬기고 형을 공경하며 어른에게 공손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만일 여기에 힘쓰지 않고 갑자기 성명(性命)의 오묘함을 궁구하고자 하면 이것은 인사(人事) 상에서 천리(天理)를 구하는 것이 아니니 결국 실지로 얻음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옛 성현의 유상(遺像)을 그려 놓고 아침마다 배알하며 엄숙히 공경하기를 스승 앞에 앉아 가르침을 듣는 듯이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학자는 잠을 많이 자지 말 것이니 사색 공부는 밤중에 더욱 전념할 수 있다”하였다. 매양 글을 읽다가 긴요한 말이 있으면 반드시 세번 거듭 읽었으며 붓으로 이를 기록하여 『學記』라 이름했다. 손수 신명사(神明舍)를 그리고 인하여 명(銘)을 지었으며 또 천도(天道)·심(心)·성정(性情) 및 도(道)와 덕(德)에 나아가는 당실(堂室)과 등급을 그렸으니 그런 것이 하나 만이 아니었다. 또 창과 벽 사이에 경의(敬義) 두 글자를 크게 써서 학자에게 보이고 또 스스로 경계하였으며 병이 위독함에도 오히려 경의설(敬義說)을 들어 간곡히 문생(門生)에게 훈계하였다. 임종시에 부인들을 물리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죽음을 편안히 여겨 마음의 동요없이 조용히 잠자듯이 하였다. 주상이 제문을 내리고 곡식을 부의했으며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으로 증직하였다. 부인은 남평(南平) 조씨(曺氏)로 충순위(忠順衛) 수(琇)의 따님이니 공보다 먼저 별세하였다. 아들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일찍 죽었고 딸은 만호(萬戶) 김행(金行)에게 시집가 이녀(二女)를 낳았으니 맏사위 김우옹(金宇 )은 현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이고 둘째 사위 곽재우(郭再祐)는 학문을 닦고 있다. 방실(旁室)에서 삼남일녀(三男一女)를 낳았으니 아들은 차석(次石) 차마(次磨) 차정(次 )이고 딸은 제일 뒤에 태어나 어리다.

아! 공은 학문에 독실하고 실행에 힘썼으며 도를 닦고 덕에 나아가 깊은 조예와 넓은 견문은 비견할 이 드물었으니 또한 전현(前賢)에 미루어 짝이 되고 후세 학자의 종사(宗師)가 될 만 하나 혹자들이 알지 못하여 그 논평이 상이하다. 그러나 어찌 반드시 금일의 사람에게만 알아 주기를 구하겠는가! 단지 백 세(百世)를 기다려 아는 이만이 알아 줄 뿐이다. 내 외람되이 벗의 반열에 끼어 종유(從遊)한 지 제일 오래인지라 전후에서 덕행(德行)을 보아 또한 남들이 미처 알지 못한 바가 있다. 이는 모두 눈으로 본 것이지 귀로 들은 것이 아니기에 가히 믿고 전할 수 있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덕(德)을 내려 어질고 곧았으니, 거두어 몸에 지녀 자용(自用)하기 넉넉했네. 남에게 펴지 못해 은택 보급 못했으니, 시세(時勢)인가 명운(命運)인가 백성 무록(無祿) 슬플 뿐!

 

우인 창녕 성운(友人 昌寧 成運)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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