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雷龍亭 遺蹟碑 有感

吳  二  煥
(慶尙大 철학과 교수)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의 機關誌인 『南冥學硏究』 제7집은 웬일인지 그 간행이 매우 늦어 1997년도 분이 98년 9월말에야 입수되었다. 그 내용은 남명학 관계 논문이 세 편, 문헌 해제가 다섯 편, 그 외의 동양학 관계 논문 여덟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간호로부터 제6집에 이르기까지 권말에 매번 실려왔었던 影印資料는 보이지 않는다. 그 중 중국인이 쓴 중국문학 관계 두 편의 글은 현지에서 이미 간행되었던 것을 번역 전재한 것인데, 아마도 譯者와의 개인적 면식의 인연으로 말미암은 것이겠지만 이러한 글들이 『남명학연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 외에 이번 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창간호 이래 권두 畵報의 머리에 계속 실려 온 남명선생 影幀 바로 다음 張에 97년 3월 1일자로 이 연구소에 의해 뇌룡정 대문 옆에 비석 형태로 새로 건립된 유적지 안내 표지판의 사진 두 장이 실려 있고, 권말 彙報의 첫머리에도 그에 관한 설명 및 비의 全文이 수록되어 있는 점이었다. 이 비문을 읽어보고서 그 가운데 몇 가지 착오 및 근거나 표현이 불명확한 점들이 눈에 띄었으므로, 그것을 비문의 순서에 따라 고증해 두어 이후의 수정을 위한 참고에 제공하고자 한다.

1. 「시내건너 산기슭에 鷄伏堂을 지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았고」: 계부당은 생가 터 및 뇌룡정과 더불어 兎洞에 있는 남명의 대표적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관하여는 來庵이 찬한 행장에 「[모친의] 삼년상을 마치자 이어서 本家에 거처하였다. 옛집 가까이 따로 한 채를 지어서 鷄伏堂이라 하고, 앞 시내를 굽어보는 곳에 초가집을 지어서 雷龍舍라 하였다(服;, 因居本業. 近舊宅, 構一室, 曰鷄伏堂, 府前流, 結茅屋, 曰雷龍舍)」고 하였고, 「南冥年譜」 47세 丁未年(1547) 및 48세 戊申年條에도 대체로 같은 내용이 보인다. 이에 의하면, 남명은 모친의 친정 마을인 토동에 그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옥과 田庄이 있었던 것이며, 모친의 삼년상을 마친 후에는 당분간 그 옛집에 거처하다가, 얼마 후 그 부근에 따로 精舍를 한 채 지어 계부당이라 이름하고, 마을의 시내 가에다 초가집을 지어 뇌룡사라 이름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계부당은 옛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별채 같은 것이었으며, 그 옛집이란 마땅히 마을 가운데에 있었을 것이다. 『三嘉縣邑誌』의 뇌룡정 조에도 「또한 근처에 계부당의 遺址가 있다(又傍近有鷄伏堂遺址)」고 하였으므로, 계부당은 뇌룡정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어 매일 오고가기에 편리한 곳이었던 것이다. 나는 일찍이 이 마을 故老의 인도를 따라 그 장소라고 하는 곳에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뇌룡정으로부터 시내와는 반대 방향으로 건너다 보이는 마을 안의 대나무 숲에 면한 곳이었으며, 지금은 다른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南冥編年」 61세 辛酉年條의 注에는 남명이 진주의 덕산으로 옮겨가게 되자 「이에 이르러 토동의 田庄을 남김없이 그「동생 桓」에게 주어 거처하게 했다(至是, 悉以兎洞田庄與之, 仍居焉)」고 보이므로, 당시 이 토동의 건물과 토지는 모두 동생에게로 소유권이 양도되었던 것이었다.

 2. 「근처 절벽에는 선생이 노닐던 곳인 暎波臺가 있었다고 한다」: 이 구절은 상기 계부당에 관한 설명에 잇달아 있으므로, 영파대는 계부당 근처에 있고, 따라서 남명이 자주 오르던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영파대에 관하여는 『慶尙南道輿地集成』 所收 「삼가현읍지」 形勝條에 映波臺라 적고, 그 注에 「縣의 남쪽 십리에 있는데, 곧 뇌룡정의 동쪽 기슭이다. 호수같이 고요한 물에 모래가 산뜻하고 산 그림자가 푸르게 잠겼으니, 남명선생이 風詠하던 곳이다(在縣南十里, 卽雷龍亭東岸. 平湖明沙, 山影沈碧, 南冥先生風詠之所)」라고 하였는데, 『嶺誌要選三嘉新舊邑誌』에는 暎波臺라 적고, 「岸」字가 「崖」자로 바뀌어 「곧 뇌룡정의 동쪽 절벽이다(卽雷龍亭東崖)」라고 하였다. 「風詠」이라 함은 『德川書院誌』 宣祖 15年 壬午條에 洗心亭을 지어 「風詠遊息之所」로 삼았다고 하였고, 光海君 3년 辛亥條에도 「風詠亭」을 옛터에다 재건하였다는 표현이 보이는 바와 같이 「諷詠」과 같으며, 詩歌를 읊조린다는 뜻이다. 后山 許愈가 찬한 「雷龍亭重建上樑文」에도 「暎波臺 세 글자가 빈 골자기에 빛을 남기고(暎波臺三字, 空谷留光)」라고 보이므로, 이 절벽에는 刻石된 글자가 있음을 알 수 있다. 「暎」은 「映」과 같은 字로서 비친다는 뜻이니, 暎波臺란 뇌룡정 건너편의 절벽 일대가 시내에 비치어 물 그림자를 이루며, 시내 주변의 모래밭 등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 하겠다. 「삼가현읍지」 뇌룡정 조에 三淵 金昌翕이 이곳을 방문하여 남긴 五律 한 수를 수록하고 있는데, 그 第2·3聯에 「雷龍 우뚝하여 정자 있었네. 노을 낀 봉우리 교교함을 머금었고(雷龍屹有亭, 霞峰含皎皎)」 云云이라 한 것은 바로 뇌룡정 터에서 바라보이는 영파대 일대의 풍경을 읊은 것으로서, 남명이 이곳에다 터를 잡은 것도 건너편 절벽과 시내가 이루는 수려한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파대란 뇌룡정에서 시내 건너편으로 바라다 보이는 바위 절벽을 통칭하는 명칭이며, 지금도 이 절벽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外吐里 입구의 진입로를 거쳐 상당한 거리를 둘러서 산길을 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남명이 여기에 올라 노닐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3. 「"乙卯辭職疏(일명 丹城疏)"를 지어 올린 곳도 바로 이곳이다」: 을묘년은 남명이 55세 되던 해이니 토동에 거주하던 시기임은 사실이나, 사직소를 지은 장소가 뇌룡사라는 것은 문헌적 근거가 없다.

4. 「선생은 61세 때까지 이곳에서 지낸 뒤 德山으로 옮겨갔다」:남명은 61세 때 토동에서 덕산으로 이주하였으므로, 비문의 첫머리에 보이는 바와 같이 「48세(1548년) 때부터 61세(1561년) 때까지」 여기서 강학했다고 함은 可하지만, 「61세 때까지 이곳에서 지낸 뒤」라고 함은 61세 때는 이곳에서 보냈다는 의미가 강하므로, 부적절한 표현이다.

5. 「雷龍舍는 정유재란 때 손실된 뒤」: 「정유재란 때」라고 함은 어떤 문헌에 근거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6. 「합천군 봉산면 界山에 있었던 龍巖書院」: 용암서원의 위치에 대하여는 「삼가현읍지」 학교 조에 「縣의 북쪽 界山에 있다(在縣北界山)」고 보이는데, 이것은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상 三嘉縣 界山에 속한다는 뜻이다. 水沒되기 전 그곳의 주소는 陜川郡 鳳山面 竹竹2區 書院里였으며, 1985년도에 수정된 합천 지역 5만분의 1 지형도에는 陜川郡 鳳山面 竹竹里에 書院이 위치해 있고, 界山里는 거기서부터 苧浦里를 지나 동북쪽으로 떨어진 곳에 따로 있다.

7. 「1868년 서원훼철령에 의해 용암서원과 함께 훼철되었다」: 용암서원의 훼철 시기는 邑誌에 보이지 않으므로, 1868년이라 함도 어떤 문헌에 근거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원 조에 의하면, 흥선대원군은 1861(고종 1)년에 이미 민폐 문제를 구실로 祠院에 대한 조사와 그 처리를 廟堂에 맡겼으며, 1868년과 1870년에 未賜額書院 및 사액서원으로서 祭享者의 후손에 의해 주도되면서 민폐를 끼치는 서원에 대한 훼철을 명령하였고, 1871년에는 一人一院 이외의 모든 疊設 서원을 일시에 훼철토록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본격적인 훼철령이 내려진 것이 1868년부터였으므로, 院祠의 훼철을 말할 때는 이 해를 흔히 들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전국의 서원이 이 때 한꺼번에 훼철된 것은 아니었다.

8. 「현재의 건물은 曺禧奎의 발의에 따라 현감 申斗善의 협조로 1883년에 許愈, 鄭載圭 등 三嘉 유림들이 원래의 자리에 중건한 것이다」: 토동에다 뇌룡정을 중건한 시기 및 그 주체에 대하여는 「삼가현읍지」 뇌룡정 조에 「辛巳[1881, 高宗 18]年에 현감 尼山「梨山」 申斗善이 사림과 더불어 중건하였다(辛巳, 縣監尼山申斗善與士林重建)」고 하였고, 申斗善 자신이 撰한 「雷龍亭重建記」에 의하면, 「불행히도 兵火의 厄을 만나 빈터가 되자 사림이 매우 아쉽게 생각하여 중건을 도모하였으나 그럴 겨를이 없었다. 현의 북쪽에 예전 사액서원이 있었다가 또한 훼철되자 이에 亭을 세우려는 계획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리하여 乙酉「1885, 고종 22]年에 다들 분발하여 재물을 모아 그것을 세웠다…縣의 碩儒로서 南黎 許愈와 艾山 鄭載圭가 있으니 蔚然히 영남에서 촉망받는 인물이다. 이 役事를 실로 주관하였으며, 낙성하고 나자 또한 여기서 스승 역할을 하였다…당시 나는 때마침 현감의 직책을 더럽히고 있어 두 사람과 벗삼아 친하게 지냈으므로 마침내 더불어 그 役事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不幸厄于 而爲墟, 士林痛惜, 謀重建未遑. 縣北舊有額院, 而亦見撤, 於是乎亭謀愈切.  至乙酉, 齊奮而鳩財建之…縣之碩儒, 有許南黎愈·鄭艾山載圭, 蔚然嶠南之望也. 是役也實尸之, 旣落之, 又師之…時余適 縣符, 與二人友善, 遂得與聞其役)」고 되어 있다. 정재규가 현감에게 보낸 「答申侯梨山」에서는 토동에 남명의 계부당·뇌룡정 遺址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용암서원이 훼철된 이후 「고장의 인사들이 이것을 애석하게 여겨 遺址에다 집을 한 채 세워 추모하는 마음을 깃들이고자 하였으나, 議論이 여러 번 발하였어도 매번 수령이 저지하는 바가 되었(鄕人士慨然於此, 欲立一堂於遺址以寓慕, 而議累發, 每爲長民者所沮)」다고 설명하면서, 이 사업을 위한 구체적인 자금 조달 계획까지 진술하면서 「중론이 대체로 같으니, 官에서 사업 추진을 맡아주면 비용 마련은 문제없(衆議大同, 自官擔荷區劃, 則於鳩財也何有)」다고 설득하고 있다. 허유의 상량문에서도 중건의 공을 全的으로 현감에게 돌리고 있으며, 그리하여 「굳게 기한을 정해 착수하니 모두의 논의가 한결같다(剋期經始, 詢謀僉同)」고 표현하였다. 邑誌와 記文에 적힌 중건 연도에 4년의 차이가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하나 어쩌면 공사에 착수한 시기와 낙성한 시기를 각각 가리킨 것인지도 모르겠는데, 1883년이라 함은 또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이상의 문헌들로 미루어 볼 때 뇌룡정 중건의 주체는 삼가현이며, 현감의 문교 행정에 사림과 縣民이 찬동하여 협조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曺禧奎 한 사람의 주창에 의한 것은 아닌 듯하니, 그의 이름을 굳이 비문에 넣어 후세에 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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