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3

南冥文學의 現場 踏査記(12)

사미정(1),
강산풍월의 무언설(
無言說)

정 우 락
(경북대 강사)

 

자연은 신이 쓴 위대한 책이다.

-W. 하베이-

 

단풍잎은 선명한 혈관을 드러내며 화사하게 죽어가고 있다. 마지막 삶을 위한 힘겨운 항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 격렬한 항거는 우리로 하여금 아름다운 감동에 젖어들게 한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은 '대저 죽음이란 것은 친(親)이 끝나는 것이며, 인도(人道)의 커다란 변화'라고 했다. 육체에 있어서의 최후의 변화인 죽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예외도 없으며 중간도 없는 이 죽음은 모든 것을 절대적 허무의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사물의 존재성이 스스로 까마득한 어둠으로 육박해 오르는 열반, 그것을 나뭇잎은 저리도 화사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스승의 정신을 탐색하기 위하여, 동공에 가득 가을 단풍을 담고 합천호를 지나갔다. 스승과 절친했던 사미(四美) 문경충(文敬忠, 1494-1555)의 소요지인 대병면의 사미정(四美亭)을 찾아 가기 위해서이다. 차창 밖으로 본 합천호는 '천광운영(天光雲影)'이 함께 배회하고 있는 신의 거울같았다. 그 거울은 황매산·월여산·악견산·허굴산이 벌이는 가을 축제를 낱낱이 담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인식 깊숙이 감추어진 존재의 무게까지 담아내고 있었다. 가을 하늘을 닮은 그 진실된 호수의 모습에 무서움까지 몰려들었다.

합천군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대병면은 합천호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삼가군 지역으로 고현면(古縣面)이라 하여 상천리 등 5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군면 통폐합으로 대평면(大平面)의 오동리 등 7개 동리와 병목면(幷木面)의 유전리 등 4개동리를 병합하여 대평면의 '대'와 병목면의 '병'을 따서 대병면이라 하였다. 예로부터 남평 문씨·은진 송씨·안동 권씨가 대성(大姓)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는 곳이라 하겠는데, 지금은 물 속으로 사라졌지만 스승의 후처 은진 송씨 역시 이곳 출신이다.

대병면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삼양다방에서 사미의 후손 문병춘(文炳春, 1932년생)씨와 문점환(文点煥, 1941년생)씨, 그리고 문기주(文琪柱, 1945년생)씨 등을 만나 사미를 비롯한 마을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어 문점환씨, 문기주씨와 함께 대지리(大枝里)에 있는 사미정을 찾아갔다. 정자 앞에는 '사미정중건기적비(四美亭重建紀績碑)'가 세워져 있었는데 정자는 세운지 얼마되지 않은 듯이 보였다. 사미가 소요하던 터에 1898년 중건하였다가 퇴락해지자 최근에 다시 개축을 시작하여 완공을 본 것이라 한다. 정자의 뜰에는 합천현감을 지냈던 정간(鄭杆) 찬(撰)으로 된 좀 더 오래 되고 키가 작은 '호음문선생유허비(湖陰文先生遺墟碑)'와 같은 사람이 쓴 같은 내용의 좀 덜 오래되고 키가 큰 '사미문선생유허비(四美文先生遺墟碑)'가 나란히 서 있었다. 이로써 문경충의 호가 그 후손들에게서 '호음' 혹은 '사미'로 불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자 안에는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470)이 사미에게 주었던 시뿐만 아니라 거기에 차운한 스승의 시, 사미가 스승에게 준 시, 그리고 정자의 중건을 기념하여 지은 여러 선비들의 시들이 걸려 있어 옛청취를 흠뻑 느끼게 하였다.

사미의 관향은 남평으로 이름은 경충, 자는 겸부(兼夫)이며 사미는 그의 정자 이름인 동시에 호이다. 할아버지 문여녕(文汝寧)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역임하였으며, 아버지는 문규(文珪)로 진사를 지냈다. 아버지대에 비로소 합천에서 삼가의 병목 연화동(蓮花洞)으로 옮겨와 세거하게 되었는데, 전주 이씨를 아내로 맞아 성종 갑인년에 사미를 낳았다. 7·8세때부터 아이들과 놀면서 대나무 활과 쑥대 화살을 사방에 쏘면서 '대장부는 마땅히 이것으로 일을 삼아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가 걱정하시자 사천사(舍川寺)에 올라가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독서의 여가에 무예를 닦기도 했다. 삼포왜란(1510년) 이후 임금이 국방에 대하여 근심하자 정광필(鄭光弼)이 사미를 추천하고 그 역시 1516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구녕(仇寧) 만호(萬戶)로 2년동안 근무하다가 노모의 봉양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을묘년(1519)에 선비들이 재앙을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할 뜻을 완전히 버리고 정자 하나를 지어놓고 학문에 매진하였다.

배정휘(裵正徽, 1645-1709)가 지은「행장」에 의하면 스승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고 하였으며 '사미정'이라는 정자의 이름 역시 스승이 명명한 것이라 한다. 사실 「차남명선생사미정명명운 (次南冥先生四美亭命名韻)」이라는 시와 스승의 원운이 사미의 작품집인 『호음선생유집 (湖陰先生遺集)』에 실려 전하기도 한다. 스승의 원운이 사미정 들보에는 「제문겸부정자 (題文兼夫亭子)」라는 이름으로 게판되어 있는데, 사미가 차운한 것이라는 작품과 함께 들어보면 이러하다.

앞의 작품은 스승의 시이다. 먼저 요임금 시절의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왕좌(王座)를 마다하고 숨어 살았다고 하는 영천(潁川)과 사미정 앞으로 흐르는 사천을 대비시켜 사미의 뜻이 소부·허유와 일치한다는 것을 보였다. 3구에서 보듯이 여기에 다시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는 『논어』의 고사를 빌어 사미가 바로 이와 같다고 했고, 4구에서는 바람과 달 역시 다정하다는 것을 보였다. 3구에서 인자와 지자를 말한 것은 '산(山)'과 '수(水)'를 내세우기 위해서인데, 4구의 '풍'과 '월'을 더하여 결국 2구의 '사미(四美)'를 이룬다는 것이다.

뒤의 작품은 사미의 것으로 스승의 시에 대한 차운이다. 소부나 허유가 왕좌를 마다하였듯이 공명과 부귀를 보잘 것 없게 여기고 작은 집, 즉 사미정을 지어 산다고 했다. 공명과 부귀를 버렸으니 작은 집이 어울리고, 강과 산, 바람과 달 역시 작은 집에 조화로울 수 있었다. 3구에서 보인 '강산풍월'을 감추었다는 것은 이를 노래한 것이다. 공명과 부귀의 대척적 거리에 있는 '작은 집'을 먼저 제시하고 다시 '작은 집'과 이웃하고 있는 '강산풍월'을 제시하면서 그 속에서 아름다운 우정 펼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미의 자연친화적 태도를 분명히 읽게 된다.

사미는 사미정을 짓고 스스로 「사미정기(四美亭記)」라는 글을 썼다. 이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연을 사랑하고 있으며 자연에 동화된 모습으로 살아가길 희망하는지 알 수 있다.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사미정기」는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나 이규보(李奎報)의 「경설(經說)」 등에서 두루 볼 수 있듯이 객이 묻고 내가 대답하는 문답의 형식을 빌었다. 자신의 정자 이름이 사미정인 까닭을 제대로 밝히기 위해 이같은 글쓰기 방법을 선택한 것은 물론이다. 위의 글은 그 서두인데, 어진 이나 지혜로운 이라야 산과 물을 좋아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은 이것을 감당할 수 없으며, 인품이 고결하고 흉금이 탁트여 진리를 터득한 사람이라야 바람과 달의 원리에 대하여 알기 때문에 이 역시 자신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 했다. 이 말을 듣자 객은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강산풍월', 이 네 글자를 이용하여 정자의 이름을 취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주인은 자신의 깊은 뜻을 객에게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강산풍월을 사랑하는 이유를 분명히 읽을 수 있다. 흔히 어짐(仁)과 지혜(智)나 탁트인 흉금(道) 때문에 이들 자연을 좋아하지만 주인은 이같은 고정관념을 깼다. 자신을 '하나의 버려진 물건(一棄物)'이라고 하였으니 그 자신 현실생활에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존재임을 자각한 것이다. 이 때문에 현실생활에서 중시하는 아버지와 임금, 그리고 형제나 붕우에 대한 의리조차 제대로 수행해내지 못했다고 토로하였던 것이다. 인(仁)이나 지(智) 그리고 도(道) 역시 현실적 삶 속에서 비로소 그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니 주인은 이것이 가져다 주는 통상적 의미 또한 중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주인은 무엇 때문에 강산풍월을 사랑하였을까? 이들은 '무언'의 진리를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언'의 진리로써 주인은 자연과 완전한 화합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은 황매산, '물'은 사천의 물, '바람'과 '달'은 소강절(邵康節)이 아무도 모르게 느꼈던 수면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하늘 가운데 이른 달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제시한 '무언'의 진리는 세상의 득실과 시비, 그리고 선악을 모두 떠난 무념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천지가 아무런 말이 없지만 사시(四時)를 운행시키며 수많은 작용을 만들어 내는 그것을 주인은 터득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그는 '산수인지지묘 (山水仁智之妙)'와 '풍월광제지취 (風月光霽之趣)'같은 자연이 인간에게 전하는 2차적인 의미를 거부하고, 산수나 풍월 그 자체가 되어 자신에게 맡겨진 생명을 다하고자 했던 것이다. 말이 여기에 이르자 객 역시 주인이 설파한 '무언'의 진리를 깨닫고 말없이 물러갔다고 했다.

 사미정 주인, 즉 사미 문경충의 이같은 강산풍월에 대한 무언설(無言說)을 스승 역시 공감하였으므로 그를 크게 허여하였다. 뇌룡정에서 말을 타고 황계폭포를 거쳐 병목으로 그를 자주 방문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다음 작품 역시 이를 증명하기에 족하다.

  앞의 작품은 스승이 사미에게 준 「증시(贈詩)」이며, 뒤의 작품은 사미가 스승에게 준 시에 대하여 스승이 다시 차운한 「차우인운(次友人韻)」이다. 앞의 작품에서 스승은 사미가 동진(東晉)의 정승이었던 사안(謝安)과 같이 벼슬을 버리고 처사적 삶을 살아가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정다운 눈길로 전송한다고 했다. 뒤의 작품에서 동진의 장한(張翰)이 정치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알고 순채국과 농어회가 생각난다며 강동으로 갔듯이 사미 역시 이같이 세상의 시비와 득실, 그리고 선악을 잊고 자연 속에서 자연에의 몰입을 시도하는 것에 대해 칭송했다. 이를 통해 스승은 자연이 가져다주는 '무언'의 진리를 사미와 함께 나누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사미는 스승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잘 맞았다. 그의 「행장」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스승과의 창화시(唱和詩)가 100여편이나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좋은 증거이다. 현재 전하는 것은 얼마되지 않지만 지금도 『사미정유집』에는 창화시 몇 편이 서간과 함께 남아 있어 우정의 편린을 알게 한다. 그러나 답사를 마칠 때까지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하나는 '호음'이라는 사미정의 또 다른 호였는데, 어쩌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호음 정사룡이 이 정자에서 시를 남긴 일과 일정한 관련하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스승이 정자의 이름을 명명하였다는 '영수천년적(潁水千秊跡)'으로 시작 되는 시에도 의문이 갔다. 이 작품은 스승의 작품집인 『남명집』에는 갑오본 속집에만 실려 있을 뿐 아니라 사미의 시에 대하여 스승이 차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시 당대에 처사로 조야에 이름을 떨쳤던 스승이, 이 정자의 주인인 사미와 친밀히 지냈던 것과 일정한 관련하에 있지 않을까 한다. 이상필 교수도 '『사미정유집』 해제'라는 글에서 이 둘에 대한 의문을 강하게 제기한 바 있다.

 어쨌든 「사미정기」에서 보듯이 사미는 강산풍월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하고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정자를 '사미'로 한 이유에 대하여 소상히 밝히고 있다. 스승 역시 자연에 대한 사미의 이같은 태도 때문에 정신을 깊이 공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미정에서 바라보는 황매산과 월여산, 그리고 하늘의 가슴으로 산천을 온전히 담아내는 합천호, 그들은 거대한 무게를 지녔지만 너무나도 편안한 손짓으로 무언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휘몰아치는 세사의 시비와 곡절, 그 아득한 수렁에 빗장을 지르고 자신의 완전한 방기를 통하여 그의 품에서 다시 생명을 획득하게 한다. 선혈을 흘리며 죽어가는 나뭇잎의 화사한 죽음도 생명력을 되찾으려는 치열한 몸짓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숙연해졌고, 사미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월여산 기슭으로 올라갔다. 거기 사미의 묘소가 강산풍월과 함께 길게 누워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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