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冥先生評傳 ○

제1장 생애- 3. 講學과 自我定立(2)

 

李 商 元
(本院 硏究委員)

선생이 42살 되던 해, 梅村 鄭復顯이 와서 배웠다. 그는 字가 遂初인데 瑞山人이다. 瑞山君 仁卿의 후손으로 중종 辛巳年에 났는데 雷溪에 집을 짓고 살면서 霽月堂이라 편액하고 소요자적하였다. 처음 김해에서 선생께 배우고 나서 선생께서 덕산으로 옮겨가시자 강학 하시던 임술년에 또 문하에서 詩書를 講質하자 남명이 ‘相長’이라 기뻐하셨다. 오덕계와 더불어 경호강에서 唱酬하며 놀았다. 『덕천사우연원록』에 보면, 이렇듯 梅村은 김해에 계시던 선생의 門下에 일찍 들어 선생의 만년 강학지인 德山에서도 따라 배웠다.
그 이듬해인 계묘년에 晦齋 李彦迪이 경상도 감사로 왔을 때, 회재가 남명을 한번 보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이를 거절하면서 글을 띄웠다.

이 편지글은 남명집 雜著에 「관서문답에 대한 해명(解關西問答)」으로 또 부분적으로 수록되어있다.

원래「관서문답」은 「관서문답록」이라고도 하는데 회재 이언적(1491∼1553)이 명종2년(1547) 평안북도 江界로 귀양갔을 때 그의 아들 李全仁이 그를 곁에서 모시면서 학문에 관한 문답을 기록한 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읽고난 남명이 그 내용에 대하여 비판하고 생각을 정리한 것이 「해관서문답」이다. 이 글은 남명의 생각한 바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는데, 후에 이 글로 인하여 경상좌도 사림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그 주요한 내용을 살펴보면, 李全仁의 출생을 둘러싼 혈통시비, 이언적 부자의 문답 내용에 나타난 문제점 지적, 이언적의 출처와 居官에 대한 비판 등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 남명의 출처관을 살필 수 있는 부분이 있어 흥미롭다.

라고 하였다.

이언적은 밀양부사와 경상감사로 있으면서 일찍이 남명에 대한 명성을 듣고 남명을 유일로 조정에 천거한 일이 있었다. 이에 대해 남명은 虛名에 동조하는 것이라며 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남명은 허명만 듣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을 천거한 회재가 곧 군왕이 선비를 좋아하는 헛된 명분에 동조한 것으로 준엄하게 비판을 한것이다.

또한 「해관서문답」에서, 남명은 학문에 대한 엄정함과 박학함을 드러내고 있다.

즉 남명의 이 같은 지적은 大學의 기본적 이해에 대해 李全仁이 오류를 범하고 있음에 대해 비판한 것으로, 대학의 벼리가 되는 存養의 문제는 비록 이언적일 지라도 모를리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잘못된 점을 적시한 것이다.

이러한 「해관서문답」의 곳곳에서 드러난 남명의 엄정한 출처관, 학문적 태도 및 世事의 판단 등은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남명의 엄정한 태도는 나중에 이언적이 죽고난 뒤 그의 아들 全仁이 주도한 회재의 伸寃, 현양사업 및 「行狀」의 찬술 등에 심혈을 기울인 퇴계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이후 鄭仁弘이 편찬하여 간행한 『남명집』에 이 글「해관서문답」이 실리게 되고 세상에 반포되면서 이언적 및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경상좌도의 사림들은 이 문제로 비등하게 되고 남명학파와 갈등을 겪게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선생께서 44살 되는 해 유월에는 아들 次山이 죽었다. 선생편년에 보면, 아들 차산은 어려서 뛰어나게 총명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기르던 개가 먹이를 다투어 서로 으르릉대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옛날 陳氏의 개는 백 마리가 한 울안에 살았는데, 우리 집 개는 그렇치 못하니 실로 마음에 부끄럽다’고 하였다.

또 하루는 次山이 山海亭에서 글을 읽는데, 초헌을 타고 길을 지나는 행차가 매우 으리으리하였다. 함께 글공부하던 아이들이 모두 다투어 구경하며 부러워하였지만 그는 홀로 태연하게 앉아 글을 읽으며,‘장부의 사업이 어찌 거기에 있을 것인가?’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시더니 불행하게도 이 해에 요절하였다.

 陶丘 李濟臣(1510∼1582)이 와서 뵈었다. 그는 字가 彦遇이며 鐵城人이다. 중종 경오년에 나서 어려서부터 淸狂之節이 있었다.

그는 바둑두기를 좋아하였는데, 선생께서 말려 꾸짖으니 시를 지어 변명하기를, “바둑두는 입에는 사람을 논평하는 말이  없고 과녁쏘는 마음에는 스스로 반성하는 생각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선생을 한 달 남짓 몸소 모시고 收건求 정성이 매우 극진하였다.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라고 하였다. 뒤에 그는 淸河縣 교수가 되었으나 時事가 화평하지 못한 까닭에 드디어 과업을 폐하고 자적하여 놀았다.

이 해 11월에 중종대왕이 승하하였다. 선생은 매양 나라의 諱日을 당하면 풍악을 듣거나 고기를 들지 않았다.

 인종대왕 원년(1545) 선생이 45살 되던 해, 源塘 權文任과 立齋 盧欽이 와서 배웠다. 권문임(1528∼1580)은 字가 興叔, 본관은 安東이며 『花山世紀』가 전한다. 그는 安分堂 權逵의 아들인데 명종 갑자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선조 병자년에 문과에 들었다.

노흠(1527∼1602)은 字가 公愼, 본관은 光州人인데 『立齋集』이 전한다. 중종 정해년에 나서 참봉과 찰방의 벼슬을 지냈다. 선생은 일찍이 그에게 말하길, “학문을 하여 敬義를 깊이 알면 道를 들을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답한 글에서는, “물을 거슬러 오르는 배를 버티었다가 한 치라도 방심하여 손을 놓으면 한 발이나 떠밀려 내려간다.”고 하여, 항상 자신을 깊이 경계할 것을 면려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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