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탐방기(6)

 

忘憂堂 郭再祐와 禮淵書院

한  상  규
(본원 상임연구위원)

1. 생애와 정신

망우당 곽재우는 1552년(명종7) 경남 의령현 세간리에서 출생하여 1617년(광해8)에 졸한 임진왜란시 구국에 제일 먼저 앞장 서서 활약한 의병장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자는 계수(季綏), 시호는 충익(忠翼)으로 현풍인이다.

그는 감사를 지낸 월(越)과 모친 강씨(姜氏) 사이에 다섯 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출중하여 8세에 부친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15세에는 의령 자굴산 산사에서 유학과 제자백가를 두루 독서하면서 무술을 익혀서 병서에도 능통했다. 16세에 상산 김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는데 부인은 남명의 외손녀이다. 기록에 의하면 남명이 망우당을 외손서로 택하여 병서를 가르쳤으며, 술에 취해 귀를 기울이면 귓구멍에서 술이 샘물처럼 쏟아졌다고 하여 술법이 대단하다.(이덕무,『청장관 진서』, 아정유고 「홍의장군전」) 구전에 의하면 남명의 외손서가 된 내력을 보면, 남명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김해 만호 상산 김씨에게 시집을 보냈다. 만석지기 재산을 갖고있는 사위는 딸만 둘 낳아서 어느덧 과년하여 출가시킬 나이가 되었다. 이에 남명이 하루는 많은 제자들과 독서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고 할 때 된장국을 아주 짜게 마련하였다. 모든 제자들이 너무 짜서 먹을 수 없어서 투덜거리는데 유독 곽망우와 김동강 만이 아무 말없이 국에 밥을 말아 다 먹었다고 한다. 후일 남명은 이들을 따로 불러 외손서로 삼기로 하였다.

망우당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었고 그 인물됨이 비범하여 충의의 교훈이 되어 잘 살려지고 있는 인물이어서 재삼 기억을 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생애와 정신을 간략히 살펴본다.

먼저 그의 의병 활약상을 간추려 보면, 왜군은 1592년(선조25) 4월 13일 조선을 침력할 목적으로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여 9군 진영을 편성하여 그 중 1진영이 4월 14일 동래 앞바다에 상륙하여 일사천리로 양산, 밀양, 대구, 조령 방면으로 진격하였고, 2진영은 4월 19일 동래를 거쳐 경주 영천 신령 방향으로 침공하고 3진영은 같은 날 김해 죽도 부근에 상륙하여 김해성을 공략하여 4진영과 합세하여 영산 창녕 현풍을 점령하였다. 당시 조선의 방비는 무력하였고 백성은 오랜 가난으로 고초를 겪으며 연명하던 때였으므로 왜군은 우세한 화력과 군사로 일시에 이 땅을 유린하였다.

망우당이 병사를 일으킨 4월 22일경 경상우도는 왜군이 지나간 자리로 인해 백성들은 난을피해 고을이 텅 비어있을 때였는데 가동(家童) 10여 명을 이끌고 무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을 설득하여 수십 명을 모집하고 장사 50여 명을 확보하였다. 많은 창의병을 구제하기 위해 사유물을 털고 방치된 관곡을 수용하였다. 이어서 망우당은 의령을 본거지로 하여 윤탁, 박사재, 오운 등이 이끄는 군사를 통합한 의병장이 되어 선조 26년 1월에는 그 수가 2천 명으로 늘어났다.

망우당은 34세가 되던 해에 부친의 권고로 문과에 응시하여 정시(庭試)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왕의 뜻을 거스르는 문구가 있다하여 발표 수일만에 파방되어 무효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출사의 길을 포기하고 기강 옆에 정자를 짓고 낚시질하며 소일하였다. 난중에 조정의 강권에 못 이겨 관직을 수임한 적은 있으나,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기강은 당시 의령의 동쪽 40리에 있는 곳으로 낙동강과 남강이 합쳐지는 곳이다. 이 기강서 망우당은 의병을 조직하여 왜적과의 첫 전투에서 적의 배 30여 척을 격퇴시킨 전과를 올렸다. 이대 왜선에는 궁중의 보화와 태조가 신었던 신발까지 있었는데 망우당이 포획하였다.(오희문, 『쇄미록』 참조)

44세 봄에 진주목사에 제수 받았으나 가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46세 때 방어사로서 현풍의 석문산성을 쌓던 중 정유재란으로 창녕의 화왕산선을 방어. 48세에 경상좌도, 병사에 제수. 이듬해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 영암에 부처되고, 51세 때 적소에서 풀려나 비슬산에 입산. 영산현 낙동강변에 정자를 짖소 忘憂亭이라고 편액 했다. 53세 봄에 찰리사(察里使)의 명을 받고 순회하고 이해 5월 선산, 8월 안동 부사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부호군, 11월에 상호군에 승진되고 이후 한성부우윤 인동현감, 경상좌도병사, 경상우도병사, 상도 통제사에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는 등 출처의 대의를 분명히 한 남명학파의 성향을 실천하였다.

이 무렵 그는 정한강, 장여헌 등과 교유하여 우의를 다졌고, 광해군 즉위년에 3차에 걸쳐 임해군의 처단과 전은론(全恩論)의 잘못을 거론하는등 사직소를 수 차례 올렸다. 59세부터는 시폐(時弊)를 논한 상소와 명나라 시신 접대 잘못에 대한 상소를 올려 조선의 자주성을 환기시키고 하향하여 해인사 백련암에서 수개월 머문 뒤 다시 시폐를 논한 상소를 올리고 62세 때 영창대군 신원소를 올림을 끝으로 66세 4월 10일 江舍에서 졸할 때까지 자연과 더불어 은일의 생활을 보냈다. 이후 1674년 류천지(柳千之)의 주선으로 사당 옛터에 서원을 세우고 이 해 7월 25일 존재 곽준의 위판과 함께 봉향하였다. 이 서원은 1677년 禮淵이란 사액을 받고 1709년 사림의 청에 의하여 병조판서에 추종되고 ‘忠翼’이란 시호가 내렸다.

망우당에 관한 인물과 업적은 왕조실록 외에도 『징비록』, 『난중잡록』, 『쇄미록』, 『용사일기』, 『춘파당일원록』, 『용사별고』, 이덕무의 「홍의장군전」, 「해동이적」, 「해동명신전」, 동야휘집과 소설, 구전설화 등에서 많은 기록을 볼 수 있다. 망우당의 출생이나 성장과정과 전투사례 등을 볼 때 비범하기 그지없고 용명과단하여 강우학파의 義정신을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망우당의 서체는 웅건, 활당했고 시문에 능했다.

2. 예연서원(禮淵書院)

망우당과 곽준의 덕행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예연서원은 경북 달성군 구지면 가태리 구례에 있다. 1674년(현종 15)에 지방 유림의 논의를 거쳐 세운 후 1677년(숙종 3)에 예연이란 사액을 받아 선현을 배향하고 이 지역의 교육문화에 이바지하였다. 그 후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근래 1982년 국가문화재관리국의 후원과 지방유림의 협찬으로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 동재, 서재, 고사, 삼문등이 있다. 사우에는 곽재우와 곽준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중앙의 마루와 양협실로 된 강당은 강학의 장소로 사용된다. 고사는 향례때 제수를 마련하는 곳이며 동재,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수학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매년 3월과 9월 하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망우당집』중간본 5권 3책, 목판본이 1771년 간행된 이해 문집 약간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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