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淵源 私淑人物考

茅村 李瀞

史 載 明
(경상대 강사)

이정(李瀞, 1541∼1613)의 자(字)는 여함(汝涵)이고, 호(號)는 모촌(茅村)이며, 본관(本貫)은 재령(載寧)이다. 그에 관한 자료는 『모촌집(茅村集)』이 남아 있다.

『모촌집』은 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901년(光武 3)에 간행된 것이다. 앞에는 영남의 명유 김도화(金道和)의 서가 있으며, 권1에는 시, 부 26수, 권2에는 서 26편, 제문, 서(序) 3편, 잡저 3편, 가장(家狀) 3편, 권3에는 연보, 권4에는 행장 등 부록문건(附錄文件) 11편, 권5에는 다른 인사들이 쓴 만시(挽詩)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문집 중 서(書)의 내용 대부분은 모두 임진왜란 때 관계되는 것들이다.

모촌은 1541년(중종 36년, 신축) 함안 모곡에서 참판 경성(景成)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촌이 태어난 모곡리 입구에 고려동학(高麗洞壑)이란 비석이 있는데, 모촌의 5대조 모은(茅隱) 이오(李午)가 세운 비석이다. 모은은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이곳 모곡으로 내려와 터를 잡고 고려동이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이 고려의 백성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동네 둘레를 토담으로 쌓고 담 밖은 조선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의 백성이 사는 고려의 땅이라고 하였다. 조선 태종은 모은을 여러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모은은 그의 아들에게

고 하였다. 모촌은 5대조 모은의 「가장(家狀)」을 적어 그 절의를 후세에 전했다. 그의 증조부는 부제학을 지낸 중현(仲賢)이고, 아버지는 비인현감(庇仁縣監)을 지낸 경성(景成)이다. 그의 아버지는 남명과 자주 왕래하였으며, 만년에는 모두 진양 원당(元塘)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7세 때(1547년, 정미) 부친으로부터 『효경』을 배웠으며, 8세 때(1548년, 무신) 백씨(伯氏) 미촌공(薇村公)을 따라 십구사(十九史)를 배웠다.

15세 때(1555년, 을묘) 남명선생이 모곡으로 부친 참판공을 만나러 왔다가 4형제가 의좋게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칭찬하였다. 19세 때(1559년, 기미) 봄에 남명선생에게 나아가 『중용』, 『대학』, 『심경』 등을 공부하였다.

20∼22세 때(1560∼2년, 경신∼임술)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두루 통하였으며, 남명선생을 뵈었다.

23세 때(1563년, 계해) 향시에 합격하였고, 24세 때(1564년, 갑자) 과거에는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26세 때(1566년, 병인) 봄에 남명선생을 모시고 갈천(葛川) 임훈(林薰, 1500∼1584)선생을 방문하였다. 이 때 각재(覺齋) 하항(河沆, 1538∼1590),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1537∼1597),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 1540∼1610), 조계(潮溪) 유종지(柳宗智, 1546∼1589) 등도 함께 갔으며, 옥계(玉溪) 노진(盧(, 1518∼1578)의 집에 이르자 옥계가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 및 제공들을 불러 함께 남명선생을 모시고 안음(安陰) 옥산동(玉山洞)으로 가서 심성정(心性情)을 공부하였다. 28세 때(1568년, 무진) 가을에 천곡서원(川谷書院)에서 지냈으며, 29세 때(1569년, 기사) 봄에 남명선생을 뵈러 갔다. 이 때에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1529∼1590), 동강(東岡) 김우옹(金宇, 1540∼1603) 등과 더불어 『심경』공부를 하였다.

백곡 진극경의 기록에 의하면,

고 하여 학문, 효성과 우애, 집사 등에서 두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32세 때(1572년, 임신) 남명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제자의 예로써 상(喪)을 치루었다. 36세 때(1576년, 병자) 봄에 수우당 최영경, 각재 하항 등과 함께 덕천서원을 창건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40세 때(1580년, 경진) 봄에 덕천에 들어가 원규(院規)를 확정하였으며, 여름에 창녕(昌寧)으로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찾아가 예(禮)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43세 때(1583년, 계미) 부친상을 당하였고, 45세 때(1585년, 을유) 각재 하항, 조계 유종지 등 여러 선비들과 더불어 진주의 공옥대(拱玉臺)에서 학문을 강론(講論)하였다. 46세 때(1586년, 병술) 가을에 한강 정구가 군수로 찾아왔다. 혹인(或人)에게 심성기(心性氣)에 대해 답하였다. 47세 때(1587년, 정해) 한강 정구에게 글을 보내고 투졸(透拙) 박한주(朴漢柱)의 사우(祠宇)를 창건하였다. 황암(篁) 박제인(朴齊仁), 황곡(篁谷) 이칭(李 )과 더불어 『함주지(咸州誌)』를 편수하였다. 일찍이 한강 정구가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칭송을 받고, 또 군지인 『함주지』를 편찬하여 고을의 좋은 풍속과 문물을 후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한강이 지은 『함주지』 서문에

고 한 것을 보면, 이칭, 박제인, 이정 등이 당시 함안을 대표하는 명망있는 선비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남명문인으로 학덕을 겸비한 선비들이었다.

50세 때(1590년, 경인) 7월 여러 동지들과 합천향교에 모여 수우당 최영경의 신원소를 올리는 일을 논의하였다. 이 때 수우당은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송암(松巖) 이로(李魯), 사호(思湖) 오장(吳長), 영무성(寧無成) 하응도(河應圖), 황암(篁) 박제인(朴齊仁),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 모헌(暮軒) 하혼(河渾), 모계(茅溪) 문위(文緯) 등과 더불어 상소추문(上疏推文)하였고, 역양(衒) 문경호(文景虎)가 소두(疏首)가 되었다.(『濯溪集』) 51세 때(1591년, 신묘) 고향에 모촌정사(茅村精舍)를 세워 여러 선비들과 학문을 강마하였다.

52세 때(1592년, 임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에 함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 모촌은 송암 김면, 망우당 곽재우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곧 황곡 이칭, 황암 박제인 등과 함안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초유사 학봉 김성일에게 글을 보내 결사 항전의 굳은 결의를 나타내었다. 곧 함안 소모관의 직책을 맡아 많은 의병들을 모집하였다. 왜적의 침략이 임박한 데 당시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이 성을 버리고 진양성으로 가버리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때 모촌은 초유사 김성일에게 보고하여 이르기를 "함안군도 지키지 않을 수 없고 군사들에게 장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숭인이 돌아와 다시 군사를 지휘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 때 초유사는 모촌이 많은 병사을 모집한 것을 칭찬하며 숭인으로 하여금 다시 함안으로 돌아가 모촌의 지휘를 받게하였다. 6월에 진주로 가서 초유사 학봉 김성일을 만났으며, 12월에 사근도(沙斤道) 찰방(察訪) 겸 함안 의병장을 제수받았다.

53세 때(1593년, 계사) 봄에 초유사를 만나 전쟁이 일어난 후 죽은 시체들이 산과 들에 그대로 버려져 있는데 이를 마땅히 묻도록 해야 한다고 청원하였다. 밤이 깊어 초유사가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이 말을 듣고 일어나 앉아서 말하기를, "참으로 좋은 말이니 어찌 내일로 미루겠는가"하고는 즉시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묻도록 명하였다. 4월 그믐날 진주에서 세상을 떠난 초유사 학봉 김성일을 조문하였다.

54세 때(1594년, 갑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자 이어 단성현감으로 제수되었다.

58세 때(1598년, 무술) 통제사 이순신의 죽음에 곡하였다. 수사(水使) 이운룡(李雲龍)에게 글을 보내 군수 1백석을 보내라고 하였으며, 12월에 청주목사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60세 때(1600년, 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진주 원당(元塘)으로 거쳐를 옮겼다. 원당은 부인 유씨(柳氏)의 고향이었다. 원당에 집을 지어 향매와(鄕梅窩)라 이름을 붙이고 모곡에 있던 붉은색, 흰색의 매화 두 그루를 옮겨 심었다.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향매와에서 아침저녁으로 조용히 근처를 돌면서 시를 읊어보기도 하고 경치를 완상하기도 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면서 호를 모촌(茅村)이라고 지었다. 또 악양의 삽암에 집을 지어 고려 신하 한유한(韓惟漢)의 청렴한 마음을 본받고자 하였다.

61세 때(1601년, 신축) 백곡 진극경, 창주 하징, 부사 성여신 등과 더불어 병화로 인한 덕천서원을 중건하고 최영경을 배향하자고 도모하였는데, 당시의 이러한 상황을 백곡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62세 때(1602년, 임인) 12월 26일 상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 해에 진극경, 이광우(李光友, 1529∼1619), 하징(1563∼1624) 등과 더불어 병란으로 불타버린 덕천서원을 중건하였다.(『竹閣集』) 63세 때(1603년, 계묘) 5월 선산부사(善山府使)에, 7월에 창원부사(昌原府使)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남명선생의 위판(位板)을 봉안(奉安)했는데, 이 때 처음으로 수우당 최영경을 배향(配享)케 하였다.(『滄洲遺事』 卷1 「德川書院重建記」) 11월에 「함안향안서(咸安鄕案序)」를 완성하였다.

66세 때(1606년, 병오) 봄에 덕천서원에 가서 『서원록(書院錄)』을 수정하였고, 겨울에 다시 덕천서원에 가서 죽각 이광우, 창주 하징, 백곡 진극경 등과 두류산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68세 때(1608년, 무신) 여름에 덕천원장으로 서원에 들어가 겸재 하홍도을 맞이하여 선생의 문집을 수정하였다.

69세 때(1609년, 기유) 7월 덕천서원으로 들어가 제현들과 더불어 『서원록』을 중수하였다.

70세 때(1610년, 경술) 죽각 이광우의 삼우당 문익점의 사당 건축에 답하였으며, 73세 때(1613년, 계축) 원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후에 함안의 도림서원(道林書院), 진주의 대각서원(大覺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위인됨에 대하여

라고 하였으며, 『덕천사우연원록』에는 40번째의 남명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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