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思想의 實踐性 脈絡과 朝鮮後期 實學思想

朴  丙  鍊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이 글은 지난 8월 18일에 봉행된 제22회 남명제의 초청강연 원고인데, 필자와의 합의를 거쳐 본 원보에 게재한다.

-편집자 주-

 

 1. 導 論
-‘實學’을 보는 기존 논의의 흐름 -

대체로 철학은 특정한 사상 그 자체의 실체적 구조를 밝히는데 주력하지만, 사상은 사상 그 자체의 구조보다 특정한 사상이 놓여진 역사적 시공 속에서의 제반 연관과 그 영향을 탐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정치행정사상의 연구는 역사적·사회적 현실과 동떨어진 自足的인 체계 속에서 진행되어서는 사상 자체가 갖는 정치행정적 의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實學思想'의 문제를 사상사의 맥락에서 논의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사상자체의 실체적 구조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학사상의 역사사회적 연관관계와 그 영향을 중심적으로 고려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한국 근대사의 전개에 있어서 다산 정약용을 위시한 실학파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일어난 시기는 대체로 한국사회의 정체성이 위협받는 시기와 일치한다. 다산의 사상이 개화와 연결지어 보기 시작한 것은 경술국치 직전인 1910년 7월 경이었다. 이후 실학에 관한 연구는 정인보, 현상윤, 백남운 등 국학계의 태두들을 거쳐, 천관우, 한우근, 홍이섭, 전해종, 이우성 등의 학자들이 실학사상 속에서 '근대성'을 발견하여 일제관학의 정체성론을 극복해 보려 하였고, 70년대 중반 李乙浩 교수가 다산의 실학사상을 '洙泗學的 修己治人의 構造'(주1) 로 파악하는 심도있는 연구를 계기로 茶山思想을 포함한 실학사상이 '反朱子學'내지 '脫性理學'의 맥락에 있는 것인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이처럼 성리학과 실학사상의 관계가 내재적 발전이라는 연결관계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단절적 성격이 본질적인 것인가의 문제가 논쟁의 핵심으로 부각되었는데 각 입장의 논거점을 살펴보면, 첫째,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를 대립적·단절적으로 파악하는 입장이 있다. 이을호 교수의 연구 이래로 많은 학자들이 동조하는 입장인데, 실학의 사상이 정통 성리학의 범주를 넘지않는 퇴·율의 철학을 극복한 새로운 지평위에서 독자적인 인식체계를 수립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 실학사상을 철학적 차원에서 조선조 정통 주자학 사상의 한 분파적 지위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며, 실학을 성리학 사상의 내재적 연속적 발전이라는 축 위에서의 歷史的 變容(historical variation)으로 파악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입장은 성리학과 실학을 대립적인 지위에 놓기를 거부하고, 실학은 성리학의 연장선상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退溪에서 栗谷으로, 栗谷에서 實學으로 라는 구도가 사상사적으로는 무리없이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주2). 이러한 입론의 근거로 실학파 학자들의 師承淵源을 추적하기도 하고, 실학사상 내부에 혼재해 있는 성리학적 사유구조에서 증거를 찾기도 하며, 실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응방식이 성리학적 이론 틀을 크게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들기도 한다.

특히, 정치학자인 박충석 교수는 한국정치사상사의 전개를 사상의 내재적 연속적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하였는데, “퇴계에서 율곡으로”, “율곡에서 실학으로”, “실학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라는 간단한 언명에서 간취할 수 있듯이 '사상의 내재적 극복과 변용'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사상사의 전개를 이해하고 있다(주3). 이러한 입장은 조선 후기의 '實學'思想이 기존의 성리학적 사유와는 다른 독특한 것으로 보는 방식(주4)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는 다른 측면에서 '실학', 특히 경세치용의 입장에 있는 近畿實學派의 학문적 연원을 계보상으로 파악하여 退溪-寒岡-眉-星湖로 연결하여 성리학 학맥과의 '연관성'을 증거하는 입장이 있다(주5). 이 입장은 실학의 선구자로서 栗谷을 내세우는 학계 일부에 대한 영남학파의 반론적 증거제시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2. 旣存 視角의 問題點

그런데 상기의 논의 속에는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 조선조 유학사상사의 맥을 단일한 흐름으로 포괄하는 것이 가능한가의 문제이고 둘째로는 사상의 내재적·연속적 발전이나 집적과 관련없이 독자적인 사상형성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첫번째 제기된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시대의 정치나 사회 및 인간에 관한 사상이 과연 退栗의 사상과 실학사상, 개화사상 외에는 중심사상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실제의 정치행정에 깊숙히 관련되어 있던 鄭道傳, 權 近, 河 崙, 申叔舟, 梁誠之 등 조선초기 국가의 제도와 文物整備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던 일군의 학자들이 갖고 있던 사유의 철학적 근거는 무엇이었는가?(주6) 나아가 寒暄堂 金宏弼, 一  鄭汝昌으로 시작하여 靜菴 趙光祖에 이르는 소위 道脈은 사상사에서 제대로의 지위를 부여하지 않아도 좋은 것인가? 그리고 이들의 사상은 '극복과 대체'를 통하여 단일한 흐름을 형성 하였는가? 아니면 세력의 消長은 있지만 상호 구분될 수 있는 흐름의 갈래가 있는 것인가?

대개의 論者들이 單一한 흐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조선초기 참여파 학자들의 사상은 큰 흐름에서 제외된 채 개별적 현상에 머물게 되고, 퇴율의 사상과 실학을 무리하게 연결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둘째, 사상사의 전개를 단일한 흐름으로 보는 입장에서도 조선후기의 '실학'사상의 맹아가 이미 퇴율 양학파에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주7)고 파악하는 것은 聯關性의 '水準'을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잡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즉, 박충석 교수의 “율곡에서 실학으로”라는 명제는 조선조 사상사의 전개가 '유교적 사유'의 기본 틀 위에서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으며 이러한 수준에서 파악할 때 '실학'적 사유의 萌芽는 비단 퇴율 양학파만이 아니라 정도전을 위시한 조선초기의 여러 학자에게서 오히려 더 분명하게 발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주8)

또한 “퇴계에서 율곡으로”, “율곡에서 실학으로”라는 명제는 퇴·율 양학파의 잠재적 대결구조를 절충하고 완화하는 측면이 있지만(주9) 유교적 사유의 흐름을 '다른 학문체계에 대한 開放性'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도 퇴율적 사유와 실학적 사유는 동일한 유교적 사유 틀내에 있다 하더라도 포괄적 연속성 보다는 극적인 전환이 오히려 더욱 부각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儒敎的 思惟”의 기본 틀 내에서 분석의 수준을 낮추어서 보면 퇴율 양 학파와 '실학' 사이에는 '連續的 同質性' 보다는 반발에 근거한 '斷絶的 異質性'이 오히려 '實學'적 사유의 '특징'을 더 잘 들어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실학'적 담론이 조선사회의 정통적 담론으로 위치를 확고히 한 퇴율의 후계자(性理論者들)들에 대한 반동의 성격이 그 본질적 성격이라는 인식에 있어서는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근기실학의 연원을 퇴계에 연결하는 입장도 다분히 '사유방식의 차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파당적 기초위에서 형성된 조선후기의 師承淵源的 觀點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이 관점에 대해서는 퇴계의 위치에 오히려 남명을 위치 시키는 것이 타당하다는 설득력 있는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주10)

이러한 반론의 제기는 학문외적 상황에 의해 묻혀있던 사실의 재발견 내지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특히 <남명학연구원>과 <경상대 남명학연구소>에서 발표된 남명학 관계의 연구업적들은 불원간 남명사상의 총체적 구조와 학술적 깊이가 이해되고 해석되는 날이 박두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남명사상의 역사적 의미와 남명사상을 어떤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시론적인 견해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3. 朝鮮朝 政治思想史 展開의 脈絡
-「治人」의 맥락과 「修己」의 맥락 -

조선시대 정치행정사상사의 전개를 단일한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보다 두갈래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조선시대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연관하여 조선시대 정치사상사 전개의 맥락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표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와의 협의에 따라 중략합니다)

4. 南冥心法의 基本體系와 實學的 脈絡
- 실천성의 맥락에서 수기와 치인을 통합하다 -

  이상과 같은 조선전기 사상의 흐름이 수기적 맥락의 實踐性(前朝에 대한 충성으로 스스로의 출처를 깨끗이 하는 것등)과 치인적 맥락의 실천성(구체적인 文物典章의 정비와 민본적 정치를 위해 노력하는 것 등)이 통합되는 이론적 기반이나 학문의 道程을 구축하지 못하고서 불협화음을 나타내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위에서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나타났던 것이 역사의 흐름이었다. 남명은 바로 이 수기적 맥락과 치인적 맥락을 실천성의 맥락에서 하나로 통합하는 실천적 구도를 제시하였다.

남명은 유학의 여러 경전을 각기 분리된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실천성의 맥락에서 하나로 통합하여 이해하는 방식을 「易書學庸語孟一道」라는 그림에서 제시하고 있거니와 수기적 맥락의 실천성과 치인적 맥락의 실천성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는 구도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神明舍圖」(주11)라 할 수 있다.

신명사도를 보면 인간의 진정한 主宰者인 太一眞君을 실천의 문제와 바로 직면하게 한다. 이것은 객관적 분석적 성격이 강한 '理' 보다 살아있는 有機體的 地坪을 함께 갖고 있는 '心'을 중심으로 삼음으로서(주12) 실천의 맥락에 굳건한 뿌리를 내리게 하고 있다. 敬으로 함양하는 주체도, 義로서 성찰하고 있는 主人도 태일진군외의 또 다른 명령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태일진군 스스로가 밝아지고 그 천덕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재상으로 '敬'을 등용하고 백규로 '義'를 부리며 三關을 경계하되 審機를 철저히 하여 鬼夢이 침범치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眞君이 경과 의에 의존하지 않거나 삼관을 잘 지키지 않으면 귀몽에게 침범 당하여 인격은 와해된다. 원래 경은 내면의 실천적 함의를 지닌 실천적 맥락에 있는 생동하는 개념이다. 理氣가 분석적 맥락에 있는 개념이라면 敬은 실천적 맥락에 비중이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경이라는 글자는 특정한 정신적 상황을 지칭하는 개념이기도 하므로, 그러한 정신적 상황에 이르기 위한 보다 하위의 실천적 개념으로 제시되는 것이 整齊嚴肅, 常惺惺, 主一無適, 收斂其心 등의 방법적 용어이다.  남명선생은 이 가운데에서도 구체성과 실천방법이 뚜렷이 드러나는 성성과 정제엄숙을 가장 실천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본 듯하다. 「신명사도」에서는 惺惺을 표시하고, 「역서학용어맹일도」도 에서도 主一과 성성을 표시하고 동시에 그 구체적 실천법 내지 수양법으로 정제엄숙과 心息相顧를 부연하고 있다.  특히 심식상고는 參同契 등에서 나오는 수양법으로 도가에서도 수련법으로 널리 채택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실천적인 효용이 있음을 알고 과감히 포섭하고 있다. 성리학의 핵심적 구도가 居敬窮理라면 居敬은 存養과 짝하고 窮理는 省察과 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명선생의 경론이 그 경의 상태로 나아가는 실천적 개념 중심으로 전개됨을 보았는데, 성찰의 기초에 있는 궁리 역시 선생은 실천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회재, 퇴계 양선생 이후의 성리학의 주류가 궁리의 중심을 四七이니 理氣니 하는 분석적 개념을 중심으로 한 이기심성론에 두었지만 남명선생은 理氣와 같은 분석적 개념을 의도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남명이 이기에 관한 이해가 없었던 것으로 보면 잘못이다. 남명의 이기론에 대해서는 그가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는 문장을 통하여 깊이 고구해 보아야 할 대상이지만 대체로 이기를 통합된 것으로 보았으며(理氣一體), 구체성을 갖는 氣를 강조하고 形迹이 없는 理는 기의 條理로 보는 경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태극 보다는 음양에 더 관심을 두었는데 이는 선험적인 본체의 문제보다 경험적인 현실의 세계를 중시하는(주13) 그의 일관된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다.  

궁리의 문제에 있어서도 남명은 책을 읽고 의리를 밝혀 일에 직면했을 때 마땅한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을 궁리로 보았고(其所以爲窮理之地 則讀書講明義理 應事求其當否)(주14), 이러한 그의 궁리의 대상은 일용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窮理亦無他法 只日用間讀書應事處 每事理會 便是)』(주15). 즉 남명의 궁리는 관념상의 심성이나 이기에 바로 나아가 궁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상의 사물에 나아가 궁리하는(事物上窮理)' 것이었으며, 그 궁리된 이치는 일상의 일이나 실행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유용해야 하는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실천성과 구체성의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여기에서 구체적인 분과학문의 지식체계가 실학적인 맥락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면을 뚜렷이 드러내어 기록하기를

  이처럼 남명선생은 유학의 다양한 命題와 가르침을 敬義에 集約하고 이것을 실천성의 맥락에서 생명력있는 통합을 이루어 냄으로써 작게는 조선전기의 불균형된 두 가지 흐름을 조화롭게 통합해 내었고, 크게는 단편으로만 나타나 보이던 고대 성현들의 심법을 구체적 실천성의 토대위에서 그 大體를 분명하게 드러내어 보여 주었다는데 있다.

居敬과 窮理, 경과 의를 많은 학자들이 言說文字로 剖析하고 다양한 맥락에서 분절적으로 설명하지 않은 바 아니지만 居敬과 窮理를 실천성의 맥락 속으로 통합하고 그 통일적 구조를 명백하게 체험적으로 드러내어 준 사람이 바로 남명이다.  즉 남명에게 있어서 거경과 궁리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존양과 성찰도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성의 토대 위에서 相互循環的이고 合內外的인 통합을 이루는 것이었다.

특히 경의에 있어서도 선생은 死敬을 경계하였으니 경은 의에 의해서 살아나고 의는 경에 의해서 발라지는 것으로 경의는 실제로 실천성의 맥락에서 活敬義로 융합되는 것이었다. 우리가 <學記類編>을 읽어내는 방식도 이러한 실천성의 맥락에서 읽어내지 않으면 남명선생의 의도나 그 深遠한 학술의 내면을 알기가 어려울 것이다.

요약하면 남명선생은 유학의 여러 경전을 관통하는 통일된 旨訣 내지는 要諦가 있음을 파악 하였으니 그것은 고정된 객관적 지식체계나 형이상학적 철학체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인격완성과 인격완성으로 가는 道程을 인간의 일상으로부터 끌어내는 것으로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스스로 그 길을 전쟁하듯이(血戰相似) 체험해 갔던 것이다.  그 길은 분석적인 理氣로 인간을 나타내기 보다 살아있는 '心(주17)'을 중심으로 내세워 陽明을 포섭하되 窮理의 客觀性을 확보함으로써 성리학의 正統을 벗어나지 않고, 道·佛을 포섭하되 외부와 주동적으로 교섭하는 心의 能動性을 보여줌으로써 구체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아 孔孟의 正路를 바로 밝히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精一執中하는 古聖의 心法을 실천적으로 명백하게 보여주고 드러내었으니 남명은 周初에서 朝鮮朝 中葉까지 내려오는 儒家道學精神을 한 몸에 承當하여 찬란한 光芒으로 昇華시켜 보여준 正脈 중의 한 峻峰이었던 것이다(주18).

결과적으로 오늘날 이기심성론은 세계를 바라보는 儒家의 한 주장이나 정밀하지 못한 이론의 차원으로 지위가 격하되고, 동양철학자들의 연구대상으로 전락되어 버렸지만 남명선생이 체험과 실천을 통해 나타내고 제시해 놓은 길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活物로서 존재하며 사람을 感發시키고 있는 것이다. 부연하면 남명심법의 독특성은 인간이 객관적 지식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을 중심으로 여러 경전의 요체와 수양법이 실천성의 맥락 아래 통합되어 '통일된 체계'를 드러내어 보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명선생의 신명사도 등의 도설이나 문장 속에서도 이러한 통일된 체계는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남명선생이 가꾸어 놓은 학문의 道程은 실천성의 맥락에서 通時代的 普遍性을 확보하고 있으며, 그 학문과 교육은 표리가 일관되어 현대에 있어서도 그 가치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는다.
  선각적인 교육사학자 李萬珪가 그의 『朝鮮敎育史』에서 말하기를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兩賢의 교육사상의 우열을 논한 것이라기 보다 당시 학계의 일반적 경향에서 볼 때 이와같은 남명학문의 특질을 천착한 뒤에 나온 得意의 결론으로 보아도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5. 窮理의 '具體性' 喪失에 대한 批判

  이제 상기와 같은 사상적 특징을 가진 남명이 당시의 정치사회와 학문에 대해 어떤 견해를 표명하였는가에 대한 간단한 검토를 해 봄으로써 남명 사상체계에 대한 구체적 증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전기 사상사의 전개가 치인의 맥락을 중시하는 경세적 맥락의 흐름이 훈구화 과정을 밟자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정치행정적 문맥에서 수기적 측면을 강조하는 사림세력이 강력하게 중앙정계에 등장하였음은 앞에서 살펴 보았다. 그러나 훈구파와의 투쟁과정 속에서 나타난 君子小人論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적으로 수기적 측면인 윤리성과 도덕성이 정치행정의 전면에 부각되고, 나아가 정치행정의 현실을 지나치게 朱子學的 構圖에 의지해서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주자학적 이론틀이 갖고 있는 정치행정적 비젼의 단순성을 그대로 현실 정치행정의 논의에서도 드러내고 있음을 앞에서 살펴 보았다. 다시 말하면 현실 정치행정의 '구체성'과 '실천성'의 요소를 수기적 맥락의 '聖君論'과 '君主 修養論' 속에 매몰시키고, 학문적 公案도 현실의 정치행정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이기심성론에 관한 논의로 경도되어 갔던 것이다.

남명은 이러한 흐름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였다. 남명은 당시 이러한 경향의 宗主的인 사람으로 퇴계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경향을 억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퇴계에게 피력하였다.

남명은 현실 정치행정에 대한 주자학적 이해구도의 단순성을 인식하고서 修身→ 齊家 → 治國→ 平天下의 단계적 발전을 인격적 요소의 자연적 확대과정이 아니라 각 단계에는 또 다른 요소의 개입에 의한 '飛躍'이 있는 차원이 다른 문제로 보았다. 즉, 치인의 영역은 居敬存養하는 수기의 결과에 의해서 저절로 결정되는 영역이 아니라 日用의 이치에 대한 적극적 궁리가 필요한 영역으로 읽었던 것이다.

남명이 그의 애제자이자 외손서이기도한 東岡 金宇샒“ 한 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평소의 그의 소신을 피력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원리를 실현할 수 있는 치용에 관한 지식과 기술적 측면을 강조하였고 정치행정적 측면에서도 퇴계의 입장이 '군주의 수양'에로의 원리론적 수렴으로 帝王學의 독자적 존립을 인정하지 않은 반면 남명은 제왕의 학문이 일반 선비와 다르다고 보아 제왕학의 독자적인 존립근거를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남명이 수기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직면하는 일들을 처리하는 바른 지식을 궁리하여 아는 것과 그것을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하는 것까지도 거경존양과 통일적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儒者官僚들이 자칫 지나치게 현실의 정치행정을 윤리론적 맥락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을 극력 경계하면서 오히려 修己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治人의 效'에 의해서 가능한 것(주22)이지 그런척 하는 '盜名欺世'에 의해서 평가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어떻던 치인 영역에 관련된 지식체계의 독자성을 인정하는 이러한 남명의 사고방식은 實用的 治人學의 존재공간을 확보할 수 있게하는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라는데 사상사적 의미는 매우 큰 것으로 볼 수 있고 조선후기의 실학사상과 연결되는 부분도 이 점에 있다.

  6. 結 語

실학의 개념에 관해서는 사용하는 학자의 입장에 따라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실학사상은 '經世致用'과 '實事求是', '利用厚生' 등에 관련된 조선후기에 나타나는 일군의 사유양식을 포괄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해 온 유교정치사상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경우, 조선후기의 유학이 이기심성론이나 수기적 측면에 경도되어 經世의 실효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체반성에서 실학사상이 출발하고 있다고 보아 '경세치용'이 핵심적인 내용이고, '실사구시'는 방법론적 이면이며, '이용후생'은 달성해야할 목표로 위치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맹아가 이미 선행하는 남명의 사상에서 이미 이론적 근거가 확보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산의 “自撰墓誌銘(주23)”에 의하면 六經四書에 관한 것은 수기를 위해 다루었고, 一表二書는 천하국가(治人)를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의 經世遺表와 牧民心書, 欽欽新書는 수기적 맥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치인의 맥락에 속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그는 經世를 여러 가지 제도와 법을 마련하는 제도적 접근 속에서 찾고 있는 것(주24)은 기존의 이기론적 유학의 맥락과 연결하기 어려움을 알게 한다. 이것은 그가 사상적으로 武王과 孟子를 높이는 것(주25)과도 맥락이 연결되는 것으로 수기적 경학에 관한 것이 아닌 정치행정적 맥락에서는 퇴·율의 연장선상에서 실학사상을 읽어내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시해 본다.

물론 실학사상이 사회적 상황과 연관없이 형성된 것으로 읽거나, 또는 선행사상의 도움을 배제하고 형성된 것으로 읽는 것은 誤讀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리고 선행사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는 율곡사상에 지나치게 편중되는 경향이 있으나 이 부분에 대해서도 시각을 전환시켜 볼 필요성이 있다. 앞으로 좀더 심층적인 연구를 해 보아야겠지만 淡軒 洪大容의 스승인 渼湖 金元行의 경우도 당시 학계의 흐름에 대한 반동으로 '수기적 맥락의 실학'을 강조하는 유학교육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이는 '치인적 맥락의 실학' 과는 개념상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정약용 등의 유학적 연원에 위치한 실학자들의 궁극적 목표는 '수기적 맥락의 실학'과 '치인적 맥락의 실학'을 온전히 결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孔孟 본연의 '古學'의 가르침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인데 실제로 이러한 결합의 구도를 이미 남명이 이론적·실천적으로 보여 주었던 것이다.

끝으로 남명 조식이 벼슬살이 하는 제자 德溪 吳健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조선시대 정치사상사 전개에서 경세치용의 실학사상을 어떤 맥락에 위치시켜 읽어내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좋은 시사를 준다 하겠다.


  1. 李乙浩, “茶山 實學의 洙泗學的 構造” 高大 亞細亞問題硏究所 편,『實學 思想의 探究』(서울: 현암사, 1975).
  2. 朴忠錫, 『韓國政治思想史』(서울:박영사, 1982).
  3. 朴忠錫,『韓國政治思想史』(서울:박영사, 1988). pp. 71-72.
  4. 李佑成, “實學硏究敍說” 『韓國의 歷史像』(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2) pp. 10-14 참조.
  5. 李佑成,“韓國儒學史上 退溪學派의 形成과 展開” 『韓國의 歷史像』(서울:창작과 비평사,1982), pp.92-93.
        이 교수는 이 논문에서 寒岡 鄭逑가 退溪 李滉의 영향을 받은 학자로만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한강학문의 형성에 끼친 南冥 曺植의 영향이 심대했음을 보여주는 연구들이 많이 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당파적 상황논리에 의거한 판단이 아니라 학문의 성격이라는 측면에서 논의한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심층적인 의견교환이 필요한 부분으로 보인다.
  6. 丸山眞男의 『日本政治思想史硏究』는 도꾸가와 幕府時代의 정치사상의 내재적 발전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일본 유학자들의 사상이 중심적인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도꾸가와 막부시대에 있어서의 儒學의 정치행정체제내의 위치는 조선시대와 비교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일급의 유학자들이 고위관직에 진출하여 현실의 정치행정에 관여했던 점을 감안하면 儒學史의 전개가 아닌 조선시대 정치행정사상을 다루면서 鄭道傳, 河 崙 등의 소위 참여파 유학자들의 사상을 정치행정사상사의 맥락에서 배제한다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
  7. 蔡茂松, “退栗性理學의 比較硏究”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1972). pp. 157-158. 실학은 '內聖'에서 '外王'으로 관심을 돌린 것 뿐으로 反性理學的 산물이 아닌 것으로 본다. 그러나 유교주의 정치의 맥락에서 사상적 변동이 '내성'에서 '외왕'으로 변했다는 것, 나아가 '외왕'영역의 독자적 논리까지 가능한 것으로 인식한다면 그러한 변화는 同質性의 측면에서 보기 보다 異質性의 측면에서 인식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다시말하면 '外王'을 중시하는 독자적인 사상의 흐름이 세력의 消長은 있지만 '內聖'을 중시하는 사상의 흐름과 공존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본 연구의 입장이다.
      이우성, "실학연구서설"『한국의 역사상』(서울:창작과 비평사, 1982). p.14에서도 이와 같은 논지를 볼 수 있다.
  8.  朴忠錫, 前揭書. p. 38. 박교수는 老論의 領袖였던 尤菴 宋時烈의 사상이 退溪→栗谷→尤菴에로 라는 사상사적 추이 속에서 평가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이들의 사상이 동일한 문제 틀 위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긍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9. 權仁浩, “남명학파의 실학사상연구” 『南冥學硏究論叢』제5집(진주: 남명학연구원, 1997).p.334.  
  10. 崔英成, “寒岡 鄭逑의 學問方法과 儒學史的 位置” 『남명학연구논총』제5집, 진주: 남명학연구원, 1997. p. 479.  趙平來,“南冥思想의 實學的 性格, 경상대 대학원 석사위논문, 1988.)
  11. 崔錫起,“南冥의 「神明舍圖」·「神明舍銘」에 대하여”, 『남명학연구』제4집(진주: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1995).
       최교수는 이 논문에서 남명 신명사도와 신명사명에 관한 탁월한 해석을 하고 있다.
  12. 金忠烈, “南冥學의 要諦-「敬義」”, 『남명학연구논총』제1집(진주: 남명학연구원,1988), p.70. 참조.
  13. 鄭炳連, “曺南冥의 理氣論 辨正” 『남명학연구논총』제3집 (1995), pp. 380-387.
  14. 學記類編』下, <致知>.  
  15. 上揭書. <致知>.
  16. 上揭書, <致知>.
  17. 사람이 사람인 까닭의 근원은 心에 있는 것이며, 理氣는 無生物 및 動植物界를 포괄하는 분석적·설명적 용어일 뿐이다. 구체성과 실천성의 맥락에서 유학을 해석·수렴하고 실천해 내는 남명에게 있어서 理氣 보다는 活物인 心을 太一眞君 등으로 형용하여 제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金忠烈, 前揭論文, p. 70에서도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18. 金忠烈, 前揭論文, p. 71.
  19. 曺植, 『南冥集』, 卷 3, <與李退溪>.
  20. 『南冥集』, 書, <與肅夫書>
  21. 修身, 尊賢, 親親, 敬大臣, 體君臣, 子庶民, 來百工, 柔遠人, 懷諸侯를 말하는 것으로 각 분야가 정치행정의 현실적 특수성이 있으며 그에 따른 구체적 정책과 실용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22. 『南冥集』, <戊辰封事>.“…窮其理 將以致用也, 修其身 將以行道也”
  23.  丁若鏞,『與猶堂全書』제1집, 제16권, 自撰墓誌銘(集中本). “六經四書以之(爲)修己 一表二書以之爲天下國家”
  24.  同上 <墓誌銘>. “ 經世者何也 官制郡縣之制 賦役貢布…海稅商稅 馬政船法營國之制….”
  25. 『與猶堂全書』제1집 제8권, 詩文集, 對策, 孟子策. “…聖賢之統上焉而止于武王 下焉而止于孟子…” 다산이 文王이나 周公 孔子를 말하지 않고 武王과 孟子를 강조하는 것은 그의 사유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6. 『南冥集』, 書, <與子强子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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