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冥先生評傳 ○

제1장 생애-
3. 講學과 自我定立(1)

李  商  元
(本院 硏究委員)

 생은 처향인 김해의 神魚山 밑으로 옮겨와서 몇차례 과거에 나아갔으나 얼마 후에 완전히 과업을 폐하게 된다.

33살때 가을, 향시에 나아가서 첫째로 뽑혔는데 이는 모부인의 명으로 나갔던 것이고, 다시 그 이듬 해 봄, 會試에 나갔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선생이 36살 때 향시에 나가서 셋째로 들었으나 그 이듬 해 會試에는 나가지 않았다. 선생은 이즈음 세상의 도리가 날로 혼탁해짐을 보고서 스스로 배운 바가 時俗에 어긋나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어 행세할 수 없음을 자각하였다. 그래서 이를 모부인께 아뢰고 마침내 과거에는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김해에서 선생은 36살 때 長子 次山을 보았으나, 次山은 9살에 早死하였다.

선생은 아들의 죽음과 자신의 처지가 불우함을 피력하는 칠언절구 ‘아들을 잃고(喪子)’한 편을 남겼다.

김해의 탄동에서 살 때, 선생은 개인적 삶에 있어서 불우한 산고를 겪으며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눈을 뜨게 된다.

선생은 김해의 신어산 아래 탄동에서 山海亭을 짓고 성리학에 더욱 침잠하게 되는데 이 때는 나라안으로는 기묘사화로 인하여 士風이 위축될대로 되었고, 나라 밖으로는 남해안으로 왜구가 자주 출몰하여 해안을 노략질하여 백성들의 삶이 곤고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삶이 그리 순탄하지 못하여 남평조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長子인 次山이 9살로 早死하게 되고 처향인 탄동의 살림도 쉽지 않았다.

김해에서 盧欽(1527∼1602)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후에도 김해에서의 곤고한 형편이 계속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편지에서 드러난 남명의 처지는 신어산의 산해정시절이 결코 간단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世情이 마땅치 않음을 보았고 자신의 몸을 의탁할 곳이 여러모로 여의치 못해 이리저리 처향이나 외향으로 옮겨다닌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나 이러한 불우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자신을 채찍질하여 내적수양을 독실하게하여 자신의 成學과 아울러 강학의 기틀을 세운다.

선생이 37살때 棲岩 鄭之麟이 와서 배웠다. 그는 字가 麟瑞인데 문사가 뛰어났으며 선생이 크게 기이하게 여겨 말씀하기를, 영민하기가 이와 같으니 정씨 집안의 복(鄭氏之福)이라고 칭탄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그는 기일에는 반드시 齊素하고 죽는 날까지 이를 폐하지 않았다고 한다.

1538년, 비로소 선생의 나이 38살에 李彦迪과 李霖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은 이 때 時事에 대한 새로운 현실인식으로 처사로서의 길을 모색하여 학문과 사상의 기저인 내적 수양의 공부를 기초로 하여 이를 실천하려는 확고한 신념을 세우고 있다. 즉 ‘山海’라는 정사의 이름에서, 선생의 의지를 표상하는 ‘산처럼 우뚝하고 바다처럼 깊고 넓은 학문을 이룬다’는 독실한 함의에서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해정 시절은 남명이 폭넓은 교우관계를 통하여 학문을 강구하고 김해지방의 文風을 진작시키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密陽에 살던 松溪 申季誠, 淸道에 살던 三足堂 金大有, 草溪에 살던 黃江 李希顔, 丹城에 살던 淸香堂 李源 등이 이 시기에 남명과 교유하던 德星들로서 선생은 비로소 講學之所로서 山海亭에 뜻을 붙여, 正士로서 敎學의 風範을 세우게 된다.

山海亭은 원래 선생의 나이 30살 되던해 경인년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全州人 李宗林이 기록한 산해정중수전말약기(山海亭重修顚末略記)에 보면,

“金官(金海)의 동쪽 20리 쯤의 神魚山 아래 炭洞은 그윽하고 조용한 곳이다. 지난 國朝 中宗年間에 정자를 이곳에 짓고 산해정이라 편액하였다. 이는 옛 南冥 曺先生 文貞公이 講道한 장소이자 후학 사림이 선생을 추모하여 향사하는 곳이다. 정자는 선생의 나이 30세인 庚寅年에 창건하였으니 지금 462년이 흘렀다. 창건이래로 여러번 보수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자연히 비바람에 씻기고 젖어 쇠퇴일로로 치닫더니 지금은 쓰러지려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음에 후학들이 와서 보고 누군들 강개한 심정이 없겠는가.”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선생의 사후에 山海亭은 쇠락하여 몇 차례 중수를 거듭하게 된다. 또 광해년간에는 옛터에 新山書院이 완공되어 선생께서 30년을 藏修涵養하던 이 곳에서 선생의 學德을 기리게 된다.

기해년(1539), 선생이 39살 되던 해 여름에 여러 門生들과 함께 지리산 神凝寺에 가서 글을 읽었다.

이때 지은‘신응사에서 글을 읽다가 (讀書神凝寺)’란 七言詩 한수가 전한다.

이 절구는 봄날에 시름을 떨어버리고 계류에 마음을 실어 世事를 초탈하고, 아무 꺼림이 없이 自閑하려는 심회를 잘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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