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과 1/2일의 덕천서원 답사기.

申   炳   周
(서울대 강사, 규장각 연구원)

6월의 중순 어느날 남명학연구원에서 주최하는 연구위원 전체세미나에 참석하랍시는 통지를 받았다. 평소 연구원으로부터 각종 자료를 비롯해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던 터라 꼭 참석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10년전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친구와 함께 덕천서원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현장을 찾아 본 경험이 당시의 논문 준비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이번 박사논문 작성에도 남명의 자취가 함축되어 있는 이곳을 찾아 그 생동감을 고스란히 체득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기대하였다. 7월 1일 김경수 사무국장으로 부터 참석여부를 확인하는 연락을 받았다. 일단은 참석하겠노라고 답했다. 김국장은 1단으로 오면 안된다고 했다. 진주는 먼 곳이니까 최소한 5단으로는 와야 한다고 했다. 덧붙여 지리산 토종개를 주원료로 한 보신탕이 준비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보신탕을 먹지 않는 필자는 김국장의 유혹에 잠시 주춤했지만 통화 후에는 이미 지리산 덕천서원으로 떠나는 여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개인 사정상 7월 2일 저녁 대구에 도착하여 첫날의 초청강연회에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7월 3일 6시 40분발 진주행 고속버스 첫차를 타고 진주 도착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덕천서원행 버스를 찾았다. 그런데 필자가 물어본 매표소 안내원 중 덕천서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지도를 확인한 후에 행정구역(시천면 원리)을 이야기하자 겨우 표를 끊어 주었다. 더욱 황당했던 것은 중산리행 버스의 운전사도 덕천서원에 내려달라고 하자 도무지 그런 곳이 있는 곳조차 모르는 것이었다. 진주를 대표하는 학자 남명의 주배향서원인 덕천서원이 이처럼 진주에서 조차도 알려지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만난 사람이 모두 무지몽매해서 그런것일까? 여하간 황당했다. 남명의 후손 중에서 이 지역 교통망을 장악하고 계신분도 있다는데 어쩌면 이럴수가... 서울에서도 창덕궁을 알고 있는 택시운전사가 거의 없음을 알고 놀란 적이 있었다. 운전사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제가 창덕궁을 비하해서 칭한이름'비원'이라는 용어로 창덕궁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의 문화유적에 대한 홍보는 작은 부분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지도 모른다. 유적지에 대한 정확한 안내와 표시, 지역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유적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 등은 외화적(外華的)인 문화유산의 포장(包裝) 보다도 훨씬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옛날의 답사 경험을 살려 덕천서원을 목격하고 정거장이 아닌 곳에 겨우 버스를 세워 서원으로 향했다. 10시 20분경이었다. 이미 서원에는 이틀째의 일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권순찬 이사장님과 김충렬 원장님, 김경수 사무국장을 비롯한 수뇌부와 학술회의에서 얼굴을 익혔던 분들, 글로서만 존함을 알고 있는 분들이 둘러 앉아 이번 세미나의 여러 현안들을 톤론하고 있었다. 새롭게 발간되는'(新增)덕천사우연원록'의 편찬경과, 남명 묘역의 성역화 사업에 대한 경과, 신동아 5월호에 기재된 이순형 교수의 글에 대한 대응과정, 남명출판부로 발간되는 책의 선정문제 등이 논의되었고, 국제학술회의와 같은 행사 보다는 연구위원의 소규모 세미나 같은 내실있는 모임의 활성화, 남명학연구논총에 편집위원을 두어 권위있는 학술지로서 공증을 받을 것, '남명출판부'는 '남명학연구원출판부'로 할 것 등의 실무적인 내용들이 검토, 결정되었다.

12시. 점심시간 드디어 문제의 토종개가 선을 보였다. 필자는 30여년의 절개(?)를 지키면서 주로 김치 등 밑반찬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식사 후에는 산천재, 허목이 찬한 남명신도비, 재실, 남명묘소 등을 둘러 보았다. 자물쇠로 잠겨있어 평소에는 답사가 불가능했던 곳을 직접 들어가 그 현장을 확인한 것이나, 오이환·김경수 선생과 같은 전문가의 생생한 해설을 직접 청취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이번에 처음 가 본 남명묘소는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명당이었다. 덕천강을 굽어 보고 멀리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남명의 묘소! 이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한 힘의 원천이 바로 남명의 학문과 처세였음을 되새기면서 참배를 했다. 남명의 사적지 답사를 마친 후에는 모두 洗心亭에 둘러앉아 高談峻論(?)을 주고 받았다. 세심정 아래에 굽이쳐 흐르는 덕천강 맑은 물에 권인호 선생과 설석규 선생은 이미 몸을 풀어 헤치고 마음을 씻으셨다. 남명은 과연 선비의 고고한 도포자락을 잠시 벗고 이곳 맑은 물에 몸을 담구었을까? 연구위원들을 위한 지리산 토종 바베큐가 준비되고 막걸리가 한 순배 돌아갔을 때 김충렬원장님이 오셨다. 원장님 또한 흥취에 겨워 '高會洗心亭'으로 시작하는 즉흥시를 지으셨다. 이어 붓과 종이가 준비되면 휘호를 하나씩 써 주신다는 엄청난 제안을 하셨다. 사재명, 천영란 선생이 기동성있게 붓과 종이를 준비하고 먹을 갈기 시작하자, 원장님은 연구위원들의 숫자가 만만찮음을 보고 조금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이내 호쾌한 필치로 각자의 마음에 새겨둘만한 좋은 글들을 써 주셨다. 훗날의 진품명품 시간에 이 글들이 TV에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휘호를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김충렬 원장님이 신분을 확인하면서 '박사'냐 '교수'냐 하는 말씀에 움찔했다. 박사, 교수 모두에 해당되지 않았던 필자는 학위를 취득한 후에 꼭 휘호를 받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쩌면 우리의 이 모습은 430여년전 세심정에서 남명과 그 문인들이 만났던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세심정에서의 즐거운 만남과 웃음소리 속으로 이미 사방은 어둑해지고 이제 지리산 모기들이 활동을 시작한다. 어제는 모두들 모기 때문에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고 했다. 지리산 모기는 '무공해모기'라서 그런지 그 강도도 훨씬 센가 보다. (필자도 다음날 모기의 공격을 받았다. 글을 쓴 지금에도 지리산 무공해모기가 안겨다 준 상처가 필자를 자극하고 있지만 이 상처는 덕천서원에서의 기억을 보다 생생히 전달해주고 있다).  저녁식사 후에는 덕산의 노래방으로 향했다. 원래 입심이 좋은 연구위원들인지라 노래솜씨도 대단했다. 맥주를 무려 60병이나 비우면서 예산이 훨씬 초과되었다는 김경수국장의 한탄(?)을 뒤로 하고 12시 30분 노래방을 나와서  산천재로 향했다. 남명이 강학을 하던 그 곳에서 밤 깊도록 토론을 하였다. 젊은(?) 학자들의 진지함과 열정이 묻어있는 시간들이었다. 산천재를 빠져나와 덕천서원으로 들어와 잠을 청한 시간은 새벽 3시. 나의 학문에 있어 언제나 그 중심에 서 있었던 남명, 그리고 선생을 배향한 덕천서원의 한 복판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무척이나 감격스러웠다.  오랜만에 찾아온 지리산 자락의 덕천서원에서, 학문 목표를 위해 함께 모였던 분들과 나누었던 소중한 만남은 지리산의 맑은 산천, 청아한 기류와 함께 나의 학문행로에 중요한 경험과 추억으로 자리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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