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3

南冥文學의 現場 踏査記(10)

죽연정(1),
죽연정 가는 길에 만난 풍경, 그리고 처사 박윤

정  우  락
(경북대 강사)

경상북도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고령군은 스승이 남긴 정신적 자취가 여러 곳에 남아 있어 중요하다. 두루 알다시피 고령은 대가야국의 고도(古都)이다. 신라 유리왕 18년(42)에 뇌질주일(腦窒朱日)이 이 나라를 건설하였고, 진흥왕 23년(562) 신라에 병합된 후에는 대가야군으로, 경덕왕 1년(742)에는 고양군(高陽郡)으로 바뀌었다. 고양군은 고려 현종 9년(1018)에는 영천현(靈川縣)으로 다시 개명, 지금의 성주인 경산부(京山府)에 속했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에 고양군의 '고'와 영천현의 '령'을 따서 비로소 '고령'이라는 이름의 성립을 보게 된다.

조선 초기부터 이 지역 사람들은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중심으로 중앙 정계의 진출이 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족으로서의 자존의식 또한 강하였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이 고장 출신의 김면(金沔), 박정완(朴挺琬)이 고령 전투를 전개하여 왜적을 크게 물리쳤으며, 주권이 외세로부터 위협받던 한말에는 영신학교를 설립(1906년)하여 민족자존의식을 고취하기도 했다. 이 전통은 1919년 덕곡면과 우곡면 등지의 3·1만세시위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나는 이같은 일련의 사실들이 스승의 정신과 일정한 함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며 검산재(錦山嶺)를 넘었다. 검산재 마루에 올라서면 지산동 고분군(사적79호)과 고령읍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검산재의 발치쯤 오면 고령으로 들어서는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 바로 앞에서 '양전동암각화'라는 표지판을 따라 좌회전하여 조금 들어가면 왼편에 보물 제604호인 선사시대 암각화가 나타난다. 그림은 알터 마을(卵峴) 입구 나지막한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이 그림들은 흔히 동심원(同心圓), 삽자형(十字形), 이형화(異形畵)로 불린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고, 십자형은 십자를 가운데 두고 주위에 전자형(田字形)을 그려 부족사회의 생활권을 나타내며, 이 형화는 모두 17개나 있는데 귀·눈·코·입과 같은 구멍을 판 가면을 형상화 한 것이라 한다. 이는 모두 농경 사회의 고유 신앙을 반기호, 반회화의 상징적 표현이라 할 것인데 청동기시대 후기 (기원전 300년 - 기원년), 즉 농경사회문화기의 대표적 예술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암각화가 그러하듯 고령의 양전동 암각화 역시 맑은 하천을 끼고 있다. 가야산에서 처음 시작하여 여러 갈래로 흘러 내리는 시내는 고령에서 모여 우곡면 아래쪽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대가천은 가야산 북서쪽에서 시작하여 성주군 수륜면을 거쳐 운수면을 관통하고, 소가천은 가야산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덕곡면을 거쳐 고령읍에서 대가천과 만나 금산(錦山, 286.4m)의 남쪽 아래 금천(錦川)이 되어 암각화 쪽으로 흐른다. 당시 청동기인들은 금천에 떠오르는 맑은 햇빛의 반사를 받으며 동심원을 그렸을 것이다. 그리고 간석기(磨製石器)로 그들의 삶의 한 단면을 십자와 그 외곽으로 그렸을 것이고, 또한 그들은 여러 가지 탈을 쓰고 탈춤을 추며 풍요를 기원하던 자신들의 독특한 문화를 표현하려 했을 것이다.

암각화 앞 넓은 마당에 모여 탈을 쓰고 태양을 향해 춤을 추는 이 고장의 까마득한 옛 사람들이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스승도 이곳을 지나며 이 알 수 없는 기호를 보았을까?'고 생각해 보았다. 기록이 전혀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스승이 이 기호를 보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 괴이한 것이라며 빨리 자리를 떴을지도 모르고, 이 그림 속에서 인류의 보편 정신을 찾아내려고 하였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같은 생각을 하며 거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우곡면 사촌동의 '영연서원묘정비(靈淵書院廟庭碑)'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영연서원은 원래 운수면 운산동에서 순은(醇隱) 신덕린(申德隣), 읍취헌(揖翠軒) 박은(朴誾),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을 모신 운천서원을 1711년에 이곳으로 옮겨 건립한 것으로 이 때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 기재(棄齋) 김수옹(金守雍) 등도 추향하였다. 그러나 1868년(고종5)에 훼철된 후 중건을 보지 못하고 지금은 묘정비만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서원에 배향되어 있었던 분들 중 정사현(1508-1555)은 바로 스승의 매부였다. 금천 건너편의 지산동 월기마을에 그의 정자인 '월담정'이 있었고 스승은 여기에 와서 매부와 함께 도의를 강마하며 역사의식 농후한 칠언율시 한 마리를 남기기도 했다. 「제정사현객청(題鄭思玄客廳)」이 그것이다. 영연서원묘정비에는 처남 남명과 매부 월담의 돈독한 사이가 이렇게 기술되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스승이 얼마나 그의 매부 월담을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스승은 친히 묘갈명을 지어 '군이 젊은 나이에 글공부는 이루지 못하였으나 오히려 부형의 사업은 넉넉하게 이었다.'며 슬퍼하였던 것이다. 효도를 지극히 하여 거의 죽음에까지 이르렀던 월담, 그리고 그 결고운 정성을 애틋하게 생각한 스승이 지녔던 마음을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읽게 된다. 영연서원은 스승이 돌아가시고 130여 년이나 지나서 세워진 것이지만 장차 매부의 위패가 봉안될 이 곳을 지나며 묘정비에 씌어져 있는 대로 그의 이른 죽음에 대하여 안타까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묘정비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야정동이 나오고, 곧이어 도진동이 나오는데 이곳은 스승이 크게 허여하였던 죽연(竹淵) 박윤(朴潤, 1517-1572)이 '죽연정'을 지어 놓고 심성을 도야하던 곳이다. 스승은 죽연과 월오(月塢) 윤규(尹奎, 1500-1560)를 찾아 이 마을에 자주 들른 것으로 보인다. 도진동은 고령 박씨의 집성촌으로 시조 박환(朴還)의 10세손인 군수 승로(承老)가 이곳으로 옮겨 와 비로소 마을을 이루게 된다. 승로가 세조 정란원종공신1등에 녹훈(錄勳)된 형(炯)을 낳으면서 고령 지방을 대표하는 강력한 재지적 사족이 되고, 박형은 박윤의 아버지 계조(繼祖)를 낳는다. 계조는 보공장군(保功將軍) 유승명(柳承溟)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윤(潤), 일(溢), 택(澤), 치(治), 철명(哲明) 등을 낳는데 죽연은 바로 그 맏아들이었다. 죽연은 장호공(莊湖公) 조윤손(曺潤孫)의 외손인 하결(河潔)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 정규(廷珪)와 정벽(廷璧)을 낳았다. 그의 형제 및 아들은 스승 및 월오 윤규,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1504-1559), 낙천(洛川) 배신(裵紳, 1520-1573) 등과 사우 관계를 맺으면서 이 지방의 문화를 이끌어 갔다. 박윤은 그의 죽연정에서 다음과 같은 작품을 짓기도 했다.

앞의 작품은「도진랑화(桃津浪花)」이고 뒤의 작품은「강정즉사(江亭卽事)」이다. 이 두 작품은 모두 마을 앞의 시내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가야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해인사 홍류동 계곡을 거쳐 합천군 가야면과 야로면을 지나 고령읍 남부와 개진면의 북부에서 금천(錦川)과 합류하여 이루어진 회천(會川), 이 회천이 죽연정 앞을 지나 우곡면 남부에 이르러 낙동강 중류로 흘러든다. 죽연은 마을 이름이 '도진(桃津)' 이니 자연스럽게 도연명의「도화원기(桃花源記)」를 떠올렸다. 고기잡이가 시내를 따라가다 복숭아 숲을 만나고, 그 숲이 다하는 물의 근원에서 이상향을 찾아내었듯이 죽연도 복사꽃이 물을 따라 가버리는 것을 보며 고깃배를 타고 그 물의 근원을 찾고자 하였다. 그리고 흰 돌여울에 흐르는 맑은 물과 그 물이 바위돌에 부딪치는 소리를 정자에 기대어 듣고 흥이 일어 낚싯대를 들고 나갔다. 푸른 물결이 넉넉히 흐르는 회천과 정서적 교감을 일으키며 '의자관(意自寬)'을 느꼈다. 공명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처사적 풍모 바로 그것이었다.

죽연은 처사였다. 세상을 위해 자신의 뜻을 허락하지 않았던 선비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스승은 죽연정을 찾아 그와 함께 노닐며 여섯 수라는 적지 않은 작품을 남긴다. 죽연이 추구하던 세계와 서로 일치하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죽연은 자신이 죽은 뒤 절대 당대의 이름난 사람을 구하여 자신의 묘지명을 짓지 못하도록 했다. 없는 사실을 기록하면 헛된 말이 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오히려 자신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라며 자손들에게 타일렀다. 이는 스승이 자신이 죽은 뒤 '처사'로 불려지기를 희망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름다운 죽음은 그 사람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한다. 과장과 허위, 오만과 비굴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스승과 죽연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분명 햇새벽을 여는 신선한 빛이 아닐 수 없다. 물귀신같이 따라오는 저자 거리의 저 메스꺼운 풍문도 이 빛 앞에서는 사라진다. 암각화를 그려 두고 그 앞에서 온몸으로 춤을 추었을 청동기시대의 그 사람들 역시 그 빛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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