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탐방기(5)

趙光祖의 竹樹書院과 深谷書院

한   상   규
(본원 상임연구위원)

趙光祖(성종 13. 1482 ∼ 중종 14. 1519)의 자는 孝直이요 본관은 한양이며 호는 靜庵이다.

성종 13년(1482) 8월 10일 한양서 출생했다. 시조는 고려 때 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낸 之壽로서 후손들은 누대로 내려오면서 요직을 거친 고려벌족이다. 정암의 조부는 성균관 司禮를 지낸 증예조판서다. 부친 元綱은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증이조참판을 받았으며 모친은 여흥 閔氏로서 현감 誼의 딸이다.

선생은 태어나면서 기질이 청수하고 용모가 단결하여 미남형이었다. 어려서부터 예법 배우는 것을 좋아하여서 장성해서도 잘못된 일은 즉시 지적하여 바로잡게 하는 곧은 성격을 소유하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항상 책을 가까이하여 몸을 수양하면서 큰 학문에 뜻을 두었기에 과거공부에는 생각을 두지 않았다.

17세 되던 해에 부친이 魚川察訪이 되어 부임 할 무렵 때마침 寒暄堂 金宏弼이 무오사화로 피화되어 熙川지방에 유배되었는데 인근의 유자들이 배움을 청하곤하였다.

정암도 한훤당을 찾아 매일 학업의 과정을 정하고 주야로 독실히 공부하여 소학과 근사록을 열심히 읽으면서 성리학을 터득하였다. 한훤당의 소학 교육은 점필재로부터 정암으로 이어지는 소학 학통으로 도학의 맥을 형성하였다. 한훤당과의 일화는 사제간의 격의 없는 도를 알 수 있다. 어느날 한훤당이 꿩 한 마리를 이웃 사람에게 얻게 되어 이것을 말려 고향에 계신 어머니에게 보낼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고양이가 몰래 물고 달아나자 꿩고기를 지키던 하인 아이를 크게 꾸짖으며 언성을 높이었다. 이를 본 정암을‘어머님을 봉양하려는 선생의 효심은 지극하오나 군자의 언사나 노기는 같이 살펴야 할 줄 아옵니다. 小子는 마음에 의심된 바 있어 감히 말씀드립니다.’고 하자 한훤당은 정암의 손을 잡으며 ‘나도 지금 후회를 하려는 참인데 너의 말이 또한 이와 같으니 내가 어찌 깨닫지 못하겠느냐’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 속에서 스승과 제자의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어 후세의 스승된 자와 제자된 자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다.  23세 되던 연산군 10년 10월에 스승의 부음을 듣고 애통하였다. 25세부터는 정암의 학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때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선비들의 사기가 고조될 무렵이여서 그 영향이 컸다. 29세 때 진사시에 장원 급제하고 난 뒤 계속해서 독서에 전념하였다. 34세 때 성균관의 추천으로 6품직인 造紙署 司紙職을 받았는데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안당이 정암을‘경술이 밝고 행의가 있으므로 사람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서이다’라고 추천했다. 그러나 정암은 과거로 급제하여 당당하게 출사하기로 마음먹고 이 해 가을 알성시에 응시하여 을과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 정언직에 있으면서 사림의 언론을 부식하는데 적극 노력하여 언론을 개방하였다.  35세에 호조좌랑, 예조좌랑, 공조좌랑을 거쳐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 기사관이 되었다.

이러한 관직을 거치면서 정치의 본질과 민의 구현에 대한 경륜과 신념을 체득하면서 도학정치 구현에 매진하기로 작정하면서 이듬 해부터 과감한 정치개혁을 경연 석상에서 중종에게 지속적으로 진언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立志한 연후에 格物致知와 誠意正心에 전념하여 성현의 정치인 요순시대를 구현하는 데 두고 있다.

정암의 정치적 실적을 들면, 중앙정계의 개혁을 대전제로 한 가운데

1519년(중종14) 己卯年 10월 능주(和順)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해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모의하여 정암일파를 몰아내기로 합의하고 홍경주의 딸 희빈 洪氏(중종후궁)를 통해서 중종을 움직이고, 또 다른 후궁인 경빈 박씨의 노복을 시켜 인심을 혼란케 할 목적으로 궁안 나뭇잎에 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꿀로 발라 벌레로 하여금 갈아먹게 하여 조광조가 마침내 왕위를 넘본다고 무고하니, 중종도 마음이 동요하였는데 그 배후 인물로는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운 정국공신으로 이들의 훈작을 정암이 문제삼은 데서 己卯士禍의 발단이 사작된 것이다. 정암이 주장한 공신의 위훈삭제는 공신들 중 76인의 훈작이 삭탈당하면서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켰다. 그 결과 정암을 비롯한 신진사류의 급진개혁론으로 새로운 정치질서를 구현하려던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 이리하여 소위 기묘명현 중 조광조를 비롯한 鄭光弼, 安塘, 李長坤, 金淨, 金湜, 寄遵, 申命仁 등 8현이 죽음을 당하고 金絿, 韓忠 등 9명이 유배되고, 이자 등 13인이 삭탈관직되고, 金安國 등 20명이 파직당하였다.

정암의 문인으로는 성수침등 48명이 문인록에 기재되어 있다. 정암은 선조 초 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 뒤 그의 학덕을 흠모하는 후학들에 의해서 사당과 서원이 세워져서, 1570년 화순에 죽수서원, 1576년 희천에 兩賢祠가 봉안되고, 1650년 용인에 심곡서원이 설립되었다. 저서로는 『정암집』이 있고 시호는 문정이다.

정암을 향사하는 서원은 심곡서원(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이 1650년(효종 1)에 지방유림에 의해 설립되고, 죽수서원(전남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이 1570년(선조 3)에 세워져서 위패를 모셨다. 죽수서원은 이해 '죽수'라고 사액 받고 1630년(인조 8)에 梁彭孫을 추가 배향하였다. 양팽손은 호가 學圃인데 정암의 門人인 관계로 파직당하고 고향인 화순에 내려와서 스승을 주야로 모시었고 장례를 주관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 1971년 복원, 경내는 3칸의 사우, 내·외삼문과 3칸의 강당이 있다. 해마다 2월과 8월 中丁에 향사를 지낸다.

심곡서원은 정암의 묘소가 있는 용인에 세워진 서원으로 1650년 '심곡'으로 사액받았으며, 양팽손을 배향하였다.  서원 철폐에서 제외되었으며 사우, 일조당, 재실, 장판각, 내·외삼문, 강당 3칸들이 있으며 매년 2월과 8월 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원내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송시열이 쓴「강당기」가 있다.

그 외 정암을 향사지내는 院祠로서 道峯서원(양주. 선조 6), 象賢서원(희천. 선조 9), 景賢서원(나주. 선조 16), 正源서원(신천. 선조 21), 道東서원(황해도 송화. 선조 38), 仁山서원(아산. 광해 2), 紹賢서원(해주. 광해 2), 興賢서원(영흥. 광해 2), 竹林서원(여산. 인조 4), 靜退서원(온양. 인조 12), 鳳岡서원 (황해도 문화. 효종 7), 迷源서원(양근. 현종 2), 慕賢서원(함흥. 현종 8), 望德서원(정평. 현종 9), 藥峰서원(영변. 숙종 14), 慕賢祠(영흥. 고종 39)등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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