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 개 질 의 서 -

김 경 수
(사무국장)

 

『신동아』 5월호에 실린 서울대 이순형 교수의 「퇴계 이황 종가」라는 글 내용에 대한 몇 가지 질의 및 해명

 

이 글은 98년 5월호 『신동아』에 실린 ‘한국의 종가 탐방 5’「퇴계 이황 종가」를 집필한 서울대소비자아동학부 이순형 교수의 글에 중대한 몇 가지의 오류가 있어 공개적으로 그 내용에 대한 질의와 그에 대한 해명을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다. 질의 내용에 대한 이 교수의 성의있는 답변과, 해명에 대한 문제점의 지적을 요구하는 바이다.

이른바 선현에 대한 글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 학덕을 선양하기 위해서 쓰여지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근거자료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표현하는 단어의 적절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더구나 한 인물에 대해 폄하하는 내용이 포함될 때는 더욱 그러한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질의 1. 이 교수는 위의 책 P. 574에서 정인홍이 퇴계에게 문하생이 되기 위해 찾아갔다고 하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였다. 과연 언제 정인홍이 퇴계에게 문인이 되기위해 찾아갔으며, 이러한 일화가 어디에 널리 알려져 있는가?

해명 : 그 어떤 사료에서도 정인홍이 퇴계를 찾아갔다고 하는 기록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특히나 퇴계의 문인이 되고자 하였다는 사실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질의 2. 같은 내용에 퇴계를 찾아간 ‘정구는 웃옷을 벗어붙이고 물을 끼얹는 데 반해 정인홍은 갓과 도포를 입은 채 줄지어 땀방울이 흐르는 데도 정좌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만에 하나의 경우에 두 사람이 퇴계를 찾아갔다고 했을 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과연 누구의 행동이 더 정당한 것인가?

해명 : 제자가 되기 위해 처음으로 스승을 찾아간 사람으로서 인사를 마치자 마자 옷을 벗고 물을 끼얹는 행동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며, 특히나 사제의 관계를 맺기 위한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정인홍의 행동이 보다 인간의 상정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질의 3. 같은 내용의 끝에 ‘퇴계에게 퇴짜를 맞은 정인홍은 후에 광해군 때 영의정에까지 오르나 옥사의 장본인이 되고,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였던 남명 조식은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고 하였는데, 정인홍이 무슨 옥사의 장본인이 되었다는 말이며, 남명이 언제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말인가? 이 표현의 정확한 출전을 밝혀주기 바란다.

해명 : 정인홍이 임해군 사건이나 영창대군 사건, 또는 폐비 문제를 직접 주관한 경우라면 장본인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인홍은 광해군 당시 실제로 중앙정계에서 활동한 시기는 지극히 짧았으며, 오늘날 역사적인 자료에서 정인홍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였던가는 명백히 밝혀진 상태이다. 또 남명은 생전이나 사후에 그 어떤 형벌도 받은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살아서는 10여 차례 이상 유일로 벼슬에 불렸으며 특히 사후에는 文貞이라는 최고의 시호를 받았고 영의정에 추증되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게다가 시대가 변하면서 세 차례나 賜祭文을 받는 등 존경이 더해졌고, 현재 남명의 묘소는 산천재 뒷산에 옛모습 그대로 있으며 산천재, 여재실, 덕천서원과 더불어 국가문화재 305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화유산이다.

질의 4. 같은 책 P. 572에서 ‘왕정시대에 임금이 보장한 권력기회를 수십 회나 거절하고 산 깊은 곳에 숨어 지내던 퇴계 이황’이라고 하였는데, 퇴계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 속에 숨어지내기만 하였는가?

해명 : 퇴계는 대과에 나아가 급제하였으며,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벼슬에 나아가기도 하였고 경우에 따라 물러나기도 하였다는 사실이 『퇴계집』을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에도 명백히 드러난다. 오히려 평생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지낸 사람은 남명이었다.

질의 5. 같은 쪽에서 ‘공자는 나이 예순이 넘어서야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말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의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해명 : 공자는 나이 70이 넘어서서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라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고 한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질의 6. 위에 이어서 ‘퇴계는 아마도 40세 이전에 그러한 경지에 올랐을 것이라고 도산서원에 오를 때마다 생각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P. 573에서 ‘자신을 「선생」으로 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선생이란 공자와 같은 거유를 일컬음이지 자신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뜻에서였다’고 한 부분과 모순되지 않는가? 만약 퇴계가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인가?

해명 : 유가의 개념에서 공자보다 학문이나 도덕이 높다고 하는 표현은 아직까지 필자의 과문인지는 모르지만 들어본적도 없고, 이와 같은 비유는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이 통념이라고 알고 있다.

질의 7. 이 교수는 『신동아』 6월호에서 남명이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구절이 착각에 의한 실수였다고 하면서 남명의 후손들과 덕천서원 측, 그리고 연구소에 정중히 사과했다고 하였는데, 조씨 문중의 몇몇 사람과 유림의 몇몇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사과한 것으로 그러한 표현을 쓸 수 있는가?

해명 : 덕천서원 측은 그 어떤 공식적인 사과의 말이나 서한을 받은 적이 없으며, 조씨 문중의 원로분들도 아직 어떠한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연구소에 사과하였다고 하였는데 어떤 연구소를 말하는가? 물론 본 연구원에 이 문제에 대해 착각에 의해 빚어진 실수였다고 전화로 말한 적이 있는데, 현재 남명학을 연구하는 기관은 본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을 비롯하여 경상대학교의 남명학연구소, 그리고 남명학부산연구원 등이 있으나, 연구원의 사무국장에게 전화한 것을 가지고 연구소에 사과했다고 하는 착각을 범한 것으로 여겨진다.

질의 8. 위의 질의 1에서 3까지의 내용에 대해 이 교수는 『신동아』 6월호에 실은 글의 행간에서 퇴계종가를 취재하는 가운데 수집한 자료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혹시 소설가 정비석이 집필하고 퇴계학연구원에서 간행한 『퇴계소전』이나 『퇴계일화선』 또는 안동시에서 간행하고 도산서원에서 배포하고 있는 책자를 참고한 것이 아닌지 밝혀주기 바란다.

해명 : 덕천서원과 남명선생의 후손 및 남명학연구기관에서는 이와 같은 책들에 대해서 별도의 조처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물론 위의 질의내용 외에도 이 교수가 5월호에 기고한 글의 내용에는 명백하고도 근본적인 오류가 몇 가지 더 있으나 이는 본 연구원에서 문제삼을 사항이 아니므로 이상과 같은 내용의 질의를 공식적으로 제기하는 바이다. 따라서 이 교수는 위의 질의내용에 대해서 본 연구원에 성의있는 답변을 해 주기 바라며, 해명내용에 대해서는 잘못된 점이 있다면 다시금 재질의 해 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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