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탐방기(4)

玉 山 書 院

韓   相   奎
(본원 상임연구위원)

1.설립배경과 구조

6.25때의 격전지 안강, 同族相殘의 血痕을 안고 있는 안강 平野의 ‘죽음들’이라 불리우는 平野地帶에서는 戰爭시의 주검들이 밑거름이라도 되었다는 듯이 늘 풍작을 이룬다는 이야기가 있다. 平和를 사랑하고 同族愛를 다져야 하고 다시는 그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아야 하겠기에 <激戰地 紀念塔>을 건립하여야 했는데도 면면히 흘러온 안강고을의 선비정신은 戰爭같은 不敬스러움은 아예 근접하지도 못하도록 형산강 건너편 慶州쪽 산비탈로 내몰았을 정도이다.

회재 李彦迪 先生의 유덕이 어린 옥산사원, 독락당, 그리고 회재선생의 외가문중이 모여있는 이곳 자옥산이 바라다 보이는 화계 산자락에 당을 짓게 된 것은 그가 42세인 1530년(中宗 25)에 司諫이 되었을 때 김안로의 所任됨을 염려하여 김안로의 거용을 극력 반대하다가 정유삼흉으로 일컬어지는 김안로, 채무택, 허황과 심언광 등의 謀略으로 官職에서 물러나 落鄕하면서였다.

강직한 성품과 사람됨됨이가 안중단상하고 맑아 높은 정취를 풍기던 선생이 그 곳의 정취를 사랑하고 또 고독을 달래고 홀로 즐긴다는 뜻으로 독락당이라 이름을 지었다.

선생은 世故를 사절하고 방안에 단정히 앉아 書冊을 좌우로 쌓아놓고 硏精深思하기를 계속하며 祖上을 받드는 글을 모아 책을 編纂하여 ‘奉先潗儀’라 하였다.

또한 임금의 마음을 바로 하고 時務를 조처하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리니 이를 一綱十目疏라 하고 중종의 깊은 칭찬과 신임을 받아 嘉善大夫로 승진되기도 하였으며 靑白吏로 加資되고 善政碑가 세워졌다.

50세부터 국정의 중임을 맡으면서 寂黨과 勳舊派의 전횡을 막으면서 선생의 이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으나 士林派를 타도하기 위한 윤원형, 이기등의 폭거로 乙巳士禍가 일어나 선생도 여기에 連累되어 관직을 削奪당하고 양재역벽서사건으로 평안도 강계땅에 귀향을 가서 그 곳 배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선생은 謫所에서도 쉬지않고 저술하여 불후의 名作을 남겨 놓음으로서 朝鮮時代의 政治思想과 哲學思想의 기초를 다져 놓게 되어 ‘海東夫子’라는 칭송을 받았다.

사후 13년만에 士林의 伸寃運動으로 그의 높은 행덕이 밝혀지고 저술한 학문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覆爵이 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등 최고의 증직과 작위를 받고 明宗 廟廷에 배향되고 1610년(광해 2년)에는 세칭 東方 五賢으로 文廟에 從祀되었다.

옥산서원이 창간된 것은 이언적이 세상을 뜬지 20년 후, 1572년(선조 5)에 당시 慶州 부윤이던 이재민이 안강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선생의 뜻을 기리고자 독락당 아래 사당을 세웠다. 이듬해 1573년(선조 6)에 서악의 향현사로부터 위패를 옮겨오고 나라에 요청하여 宣祖 임금으로부터 ‘옥산서원’이란 액과 서적을 하사 받았으며 임진병화에도 피해없이 보존되었다. 書院의 구인당은 1838년(헌종 4)에 화재로 인해 燒失되었으나 곧 重建하였으며 이때 다시 사액(김정희 서)되었다. 1871년(고종 8) 전국의 600여 개소의 서원에 철퇴를 가했던 대원군의 서원 撤廢 때에도 옥산서원은 무사히 보존되어 오던 중 지난 1972년 청분각을 建立하여 서원에 보관중이던 서책을 보관하고 있다.

서원에서 西北으로 약 700m 지점에는 앞서 기술된 화재의 별장이자 書齋였던 독락당이 있으며 그 주위에는 登心臺, 濯纓臺, 觀魚臺, 詠歸臺, 洗心臺등의 盤石과 이들을 둘러싼 華蓋山, 紫玉山, 舞鶴山, 道德山 등과 더불어 四山五臺의 景勝을 이루는 곳이다.

옥산서원은 가장 표준이 되는 서원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背山臨水한 지세로 화계산을 등지고 있으며 서원 앞으로 개천이 흐르고 들판도 있는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正門(外三門), 樓閣, 內三門, 祠堂이 일직선을 이루며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으며, 강당의 전면에 좌우대칭으로 齋室이 자리를 잡고, 그 외의 장판각, 전사청, 고직사 등이 적당히 자리하여 그 당시 우리나라 서원 規模로서는 으뜸이었으며 서원을 찾아 수학하는 사람, 謗廟하는 사람들이 많아 雜役을 맡는 奴僕이 이백 수십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언적(李彦迪)>
1491년(성종22)-1553년(명종8)

* 조선 중종 때의 문신, 학자.
* 자는 復古, 호는 晦齋, 시호는 文元, 본관은 驪州
* 연보(年譜)
1491년(성종 22) 父 성균관 生員인 番과 母 孫씨 사이에서 출생
1514년(중종 9) 생원으로서 別試 文科에 乙科로 급제, 교서관 정자가 됨.
1517년(중종 12) 忘齋忘機堂의 無極太極說辯論
1521년(중종16) 왕명으로 이름에 ‘彦’字를 더함
1522년(중종 17) 天官郞이 됨
1525년(중종 20) 경상도 안동 현감
1527년(종종 22) 司憲府 持平, 그 후 설서, 이조정랑, 장령, 성균관 사성, 밀양부사 등을 역임.
1530년(중종 25) 司諫院으로 정치일선에서 활약
1531년(중종 26) 김안로 거용을 극력 반대하다가 숙청된 후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심.
1532년(중종 27) 독락당 겸 溪亭을 지음, 五臺를 정함.
1537년(중종 32) 김안로 일파가 거세되자 종부시 첨정, 시강관에 겸직발령. 교리, 응교를 거쳐 직제학으로서 참지로 승진
1539년(중종 34) 전주 부윤으로 善政하여 송덕비가 세워짐. 재변에 대해 올린 대책물이 뛰어나 병조참판 동지경인사에 임명.
1540년(중종 35) 예조참판. 대사헌에 임명
1541년(중종 36)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한성판윤 우참찬에 승진 전보.
1542년(중종 37)  이조판서, 안동부사가 됨.
1543년(중종 38) 홍문관제학 겸 경상도 관찰사에 임함.
1545년(인종1) 의정부 우찬성으로 院相이 되어 국사를 관장.
1546년(명종 1) 定難爲社功臣 3등에 오름. 모친의 병환이 위독하여 사직하였으나 원상으로 있을 때 大尹인 윤임 일파의 처벌에 미온적이었다는 탄핵으로  削職.
1547년(명종 2) 小尹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의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에 유배.
1549년(명종 4) 대학장구보유급속대혹문 저술
1440년(명종 5) 봉선잡의, 구인록, 진수팔규 등 저술.
1553년(명종 8) 배소에서 죽음.
1566년(명종 21) 13년만에 관작이 복구됨.
1568년(선조 1)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으로 추증.
1569년(선조 2) 시호를 文元이라 내림. 明宗 廟廷에 배향.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從享. 東國十八賢의 한사람으로 공자와 같이 제사받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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