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2

南冥연원을 찾아서(9)

瞻慕堂 林 芸

宋   準   湜
(진주전문대교수)

임운(林芸, 1517∼1572)의 자(字)는 언성(彦成)이며, 호(號)는 첨모당(瞻慕堂)이다.그의 문집『첨모당선생문집(瞻慕堂先生文集)』은 후손들이 1669년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간행한 것이다.

첨모당은 1517년 중종 12년 거창 갈계리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 선계(先系)는 은진현인(恩津縣人)이다. 6대조인 성근(成槿)은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해서 관작이 조청랑태상박사(朝請郞太常博士)이고, 그의 아들인 정(挺)은 봉선대부(奉善大夫) 지락안군사(知樂安郡事)이며, 그의 아들 흥위위보승별장 (興威衛保勝別將) 식(湜)은 첨모당의 고조(高祖)가 된다. 증조(曾祖)인 천년(千年)은 선무랑(宣武郞) 의령현감(宜寧縣監)이고, 조(祖)인 자휴(自7)는 여절교위(勵節校尉) 사용(司勇)이고, 고(考) 득번(得蕃)은 성균진사(成均進士)로서 성행(性行)이 염정(廉靜)하고 조행(操行)이 단정한 명인(名人)이며 비(V)는 진주강씨(晋州姜氏)이니 영숭전참봉(永崇殿參奉)인 수경(壽卿)의 여(女)이다.

맏형인 갈천(葛川) 임훈(林薰)은 남명(南冥), 퇴계(退溪)의 교유인으로 당시 조야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첨모당은 맏형 갈천(葛川)을 모시고 남명(南冥) 조식(曺植), 옥계(玉溪) 노진(盧(), 덕계(德溪) 오건(吳健) 등의 명유들과 어울려 성정(性情)을 음영하고 고금의 일을 담론하면서 자연을 완상하기도 하였다. 한편 퇴계(退溪)의 문하에서 수업(受業)하였는데 퇴계가 크게 중대(重待)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호매(豪邁)해서 큰 계략(計略)을 좋아하였고, 손무(孫武)와 오기(吳起)의 병법(兵法)을 배우고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모아서 역법(曆法), 지리(地理), 음악(音樂), 산수(算數) 등을 두루 공부하고 돌아와서 『맹자(孟子)』를 읽고 대의(大義)에 통하여 맏형인 갈천(葛川)을 따라 대역(大易)을 강론하였다.

그는 천품(天稟)이 특이하고 고도(古道)를 독신(篤信)해서 자자(孜孜)하게 권면(勸勉)하여 학문(學問)을 쌓고 덕행(德行)에 힘써서 행(行)은 더욱 높아지고 덕(德)은 더욱 닦아서 평소의 몸가짐이 남을 상대해서는 충애(忠愛)함이 혼후(渾厚)하였다.

그는 검약(儉約)해서 무릇 의복과 음식에는 겨우 몸이나 가리고 배나 채울 정도였으며, 식사를 대해서는 반드시 소채(蔬菜)를 한 뒤에 어육(魚肉)을 하였다. 일찍이 자제들에게 경계하면서 이르기를, "나는 세상에 음식맛만 취하는 자를 본즉 당상(當喪)을 해서 채식을 하면 능히 상주질을 하고 전생(全生)을 하는 자가 드무니 음식을 절제하지 않아서 되겠는가?"라고 하였다(李 撰 「行狀」). 이는 옛 성인의 "군자는 먹되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하되 편안함을 구하지 아니한다"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학문 정진하기에도 바쁜데 먹고 입는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대 뛰어난 선비들과 어울려 산수를 유람하며 학문정진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일에 임해서는 엄명(嚴明)하고 가정에는 착실하였으며, 비록 농상(農桑)의 실무에는 유의하지 않아도 노비들은 각기 다 그 사역을 부지런히 다해서 생활이 궁색하지는 않았다.언제나 이르기를,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첨모당이 제사를 중히하고 양친에 급(急)해서 가업을 지키는 뜻을 잃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내 위에 있는 옛 집이 일찍이 첨모당(瞻慕堂)이라고 이름하였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로 인하여 호(號)로 하였다. 그 시내를 따라서 산중(山中)으로 몇 리(里)를 들어가면 노동(蘆洞)에 암천(岩泉)이 있는데 첨모당은 자호(自號)를 노동산인(蘆洞散人)이라고 하였다. 그 아래는 회암(廻岩)의 수석(水石)이 있는데 서당(書堂)을 짓고 생도를 가르친 고금의 사적이 있다. 첨모당은 성산이씨(星山李氏)를 취해서 승순(承順), 승신(承信), 승근(承謹), 승후(承厚), 승열(承烈) 등의 아들이 있다. (許穆撰 「墓碣銘」).

첨모당은 부모가 돌아가시기까지 곁에서 모시면서 효를 다하였다. 맏형인 갈천이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할 때, 그는 고향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맏형이 집안 걱정을 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을 위한 선정을 베풀 수 있도록 하였다.

늙으신 부친을 봉양할 때 「먹이 물고 돌아오니 산은 저물고자 하네(一哺歸來山易暮)」라는 시구를 지어 자식으로서 부모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을 항상 걱정하였으며, 부친이 돌아가시자 묘소 옆에다 여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상복을 벗지 않고 조석으로 제물을 손수 장만하면서 몸이 불편하여도 묘소 곁을 떠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전해지자 51세 때(1567, 정묘)에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이로부터 집경전(集慶殿), 경기전(慶基殿), 후릉(侯陵), 연은전(延恩殿) 참봉을 지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무려 5차례나 직을 옮겨, 맡은 바 직분을 충실히 하였다. 집경전 참봉 때는 전각이 기울어진 것을 알고 부윤에게 부탁하여 고치도록 하였다.

그는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심경(心經)』, 주자서(朱子書) 등의 독서에 전심하였으며, 특히 『주역(周易)』에 정통하였다.

그 밖에도 천문, 지리, 의약 등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수학과 병서에 특출하였다. 일찍이 맏형 갈천과 『주역』을 공부하였는데, 이 때 갈천이 이르기를 "사색하고 공부하는 데는 비록 옛날 덕있는 사람이라도 아우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이라고 하여 아우의 뛰어난 역량을 칭찬하기도 하였다. 이는 갈천이 동생 첨모당의 자질과 학덕을 높이 여겼으나, 그 뜻을 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음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그가 출사에 뜻을 두고 공부를 하였다면 정사를 봄에 있어서 어떠한 일도 담당해 내지 못할 것이 없었을 것이지만, 수신공부와 부모봉양을 평생의 일로 알고 보냈던 것이다.

또한 형제간의 우애 또한 남달랐다. 그 형제자매에게 비록 동거는 못하여도 그의 독실한 우애는 남들이 미치지 못하는 바가 많았다. 갈천은 본디 가산(家産)을 돌보지 않아서 자주 식량이 떨어지니 첨모당은 극력으로 도와드리기에 여력이 없이 하다가 마침내는 같이 곤궁하게 되었고 또한 둘째 형 도계(道溪) 임영(林英)도 가산(家産)을 이루지 못하고서 일찍 세상을 떠나니, 그의 고아들을 보살피는데 자기의 소생과 다름없이 하여 노상 경리(經理)를 가르쳐주었고, 자씨(n氏)는 수백리에 사는데 매년 가서 문안을 하였다.

첨모당은 경(敬)을 학문의 요체로 여겨 그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즉,

이라고 하였다. 그는 경(敬)을 단순히 수양을 하는 덕목으로만 여긴 것이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평생동안 부모에게 효도하여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드러나 조정에서 정려까지 내렸다는 점에서 특출하다고 할 것이다.

또한 공부를 할 때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나 같은 사람 공부 백배나 더하여, 끝까지 신중히 하면서 게으르지 않으리, 성공을 어찌 하루 아침에 얻겠는가, 세월이 오래되면 방법은 저절로 생기리."라고 하면서 자신을 면려하면서 공부에 꾸준히 정진하였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아들들을 불러 놓고 "너희들은 삼가서 나쁜 일을 하지 마라. 자고로 선한 일을 하여 이롭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악한 일을 하여 해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경계의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이 때 나이 56세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영구가 고향으로 내려갈 때 경기, 충청, 경상감사에게 공문을 보내 상여를 호송토록 하였다.

중산(中山)으로 반장(返葬)하고 그의 문인(門人)인 황곡(篁谷) 이칭(李 )이 그 언행의 대략(大略)을 지었다.

첨모당이 세상을 떠나자 당시 조정과 사림에서는 그의 학행이 아직 세상에 제대로 펴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미수 허목(眉 許穆, 1595∼1682)은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탁월하고 옛 성현의 道를 좋아해, 이를 독실히 믿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학문을 닦아 실천하니, 행동은 더욱 고결하고 덕은 더욱 닦아지게 되었다. 일상 생활에 있어서 사람에게 충애(忠愛), 돈후하였으며 일을 할 때 이해(利害)에 당해서는 확실한 법도가 있어 사람들을 외복(畏服)시켰다."(許穆 撰 「(墓碣銘)」고 하였으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은 "무릇 인간은 충효하고 독행하는 내실만 있으면 진리는 알 필요도 없다고 해서 일찍이 학문에는 힘을 쓰지 않으니 이에 공(公)은 담백한 자질로서 아름다운 문채를 더하여 여러 老先生으로 더불어 부지런히 학문을 닦았으니, 속된 학문 이외의 것에 마음을 둔 것을 알겠다. 그 조예의 얕고 깊음은 후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취향이 높은 것도 후인이 언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瞻慕堂先生文集 序)라고 하였다.

한편 화림지(花林誌)에서는 “첨모당(瞻慕堂)은 갈천(葛川)의 아우로서 천품이 순미하여 역학(易學)에 정밀하고 성리(性理)에 심통(深通)하였다. 효우를 겸해서 친상(親喪) 때는 여묘(廬墓)를 살았는데 명종(明宗) 19년 갑자(甲子) 생존시(生存時)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명종(明宗) 22년 정묘에는 이조(吏曹)에서 천거하여 참봉(參奉)으로 특명(特命)되고 기사(己巳)년에는 집현전(集賢殿)으로 이임(移任)되어, 전우(殿宇)를 중신(重新)하였다. 임신(壬申)년에 서울 우저(寓邸)에서 작고하여 경기도, 충정도, 경상도 등 삼도의 감사가 힘을 다해서 그의 반구(返柩)를 호송하였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는데 퇴계가 크게 중대(重待)하였다. 선조(宣祖) 19년 병술(丙戌)에는 용문서원(龍門書院)에서 존향(尊享)하고 현종(顯宗) 3년 임인(壬寅)에 사액(賜額)하고 치제(致祭)를 하였다. 증직(贈職)은 대사헌(大司憲)이다”(『花林誌』人物篇所載事蹟)라고 그에 대하여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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