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온유돈후(溫柔敦厚)와 명단(明斷)
-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변별의 한 국면-

金  東  協
(동국대 교수)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지은 <도산십이곡발>에  보면 온유돈후(溫柔敦厚)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은 <예기>에 나온 것을 퇴계가 따와서 사용한 것이다. 당시에 이별(李鼈)이라는 사람이 육가(六歌)를 지었는데, 이것은 내용이 좋지 않은 한림별곡보다는 나으나 역시 '세상 사람들을 멸시하여 안중에 두지 않는 공손하지 못한 태도(玩世不恭)'가 있고 온유돈후(溫柔敦厚)한 내실이 적다고 하면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온유돈후는 마음이 따뜻하고 인자하며, 부드럽고 조용하다는 정도의 뜻이다. 퇴계는 '마음이 따뜻하고 인자하며, 부드럽고 조용함' 곧 온유돈후(溫柔敦厚)함이 시(詩)의 가장 바람직한 내용이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필자는 나아가 그의 성품, 행동 그리고 처세, 학문하는 태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서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은 다소 다르게 생각되어 왔다. 남명은 독서 범위에 있어서 이단잡류(異端雜類)에까지 이르렀고, 강한 현실주의적 성격과 비판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1-25세에는 현실에 소용되는 여러 가지를 배우려 하였고, 26-45세에는 현실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과거를 포기하며 나름대로 가치있는 삶을 찾고자 노력하였으며, 46-60세에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여 강한 비판정신을 가졌고, 61-72세에는 실천을 강조하며 자신의 현실주의적 세계관을 후세에 전수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당시의 시대상황, 생애, 독서범위, 사상의 양면성, 수양방법 그리고 사물에 대한 접근에 관한 이론 등을 검토하여 나온 것인데 자못 타당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쉽게 보고 느낄 수 있거나, 얘기할 수 있는 성격이나 기질의 한 단면 같은 것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딱딱한 점이 있다. 필자는 우선 '강직하고 소신이 뚜렷하여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을 명단(明斷)이라 하고, 이것이 남명의 성격 또는 그의 인격수양 혹은 학문수양의 결과 형성된 철학이며, 남명의 성품이나 기질 그리고 그의 사상이나 문학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결론적을 얘기해서, 퇴계와 남명 두 사람은 당시 사대부의 전형(典型)으로서 여러 면에서 공통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퇴계가 '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인자하며, 부드럽고 조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남명은 '보다 강직하고 소신이 뚜렷하여,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내줄 수 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만년에 퇴계는, 은퇴하여 강학(講學)하던 도산서원을 집 계상(溪上)에서 천천히 걸어 다니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이 때 상계(上溪)에서 도산서원을 다니면서 지은 시에 '계상(溪上)에서 산을 넘어 서당에 이르는 길을 걸으며「步自溪上踰山至書堂」'라는 것이 있다.

얼른 보면, 어느 봄날 산 뒤로부터 제자들을 데리고 산을 넘어 산 앞에 이르렀는데, 도중에 벼랑의 꽃도 보고 새 우는 소리도 듣고 흐르는 시냇물도 보았다는 아주 평범한 시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음미해보면 깊은 의미가 있는 시이다. 벼랑에 꽃이 피고 나무에 새가 울고 시내가 흐르는 것은 자연의 이법(理法)이다. 이것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과 같이 천리(天理)가 유행(流行)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천리가 유행하는 자연 속에서 '우연히' 산 뒤로부터 한가로이' 산 앞에 이르는 것은, 자연에 자신을 맡겨서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자연을 심성도야의 도구로 보는 성리학적 수양의 최고의 경지이다.

퇴계가 다니는 바로 이곳 낙동강에서는 연어가 많이 나는데, 이는 진상품이다. 그래서 고을에서는 여름이 되면 이곳에다가 발을 쳐둔다. 음력 6월이 되면 퇴계는 하던 강학(講學)을 중지하고 상계(上溪) 자택으로 철수한다. 그로서는 순응하고 조화되어야 하며 군자가 은거해야 하는 고반(考槃)의 전범(典範)이라 할 수 있는 도산서원과도 떨어지게 된다. 이는 퇴계의 성격과 인품을 잘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는 의심을 살만한 일에는 근처에도 가지 아니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이길을 계속하여 다니다가 나라에 진상해야 하는 연어를 어찌하였다고 하는 소문에라도 얽매일까 하는 것을 미리 염려하여 그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것이다. 그의, 미리 생각하여 조심조심 행동하는 일면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퇴계의 이러한 행동을 남명이 듣고서 '퇴계는 어찌 그리 수고하며 편하지 못한가(何其屑屑也)' 하였다. 말하자면, 퇴계는 어찌 그리 조심하고 수고하며 지내는가. 다른 사람이야 무엇이라 하건 간에 대장부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그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남명은 한 것이다. 이는 남명의  명단(明斷)함, 곧 남이야 뭐라고 하건 자신의 소신을 분명히 하여 나타내는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라에 올리는 진상품을 잡는 발이 쳐져 있건, 혹시라도 잘못되어 진상품으로 잡은 연어를 어찌하였다고 남의 의심을 받는 일이 있건 없건 간에, 자신이 그런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것이 남명의 생각이다. 이는 남명의 굳고 소신이 분명한 일면을 보여준 좋은 예라 하겠다. 이러한 면이 보다 많았기 때문에 남명은, 인재 등용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서리망국론을 애기하며, 심지어 왕후와 임금에 대하여도 골방의 늙은 이, 고아(孤兒)라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남명의 이러한 흔들리지 아니하는 기상을 나타내는 시(詩)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와 서검병조장원원(書劒柄趙壯元瑗)을 들어보자.

(가)는 지리산을 소재로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기상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고, (나)는 조원(趙瑗)이라는 사람이 장원했을 때 써 준 것인데, 칼을 소재로 공정하게 정사를 돌보는 동시에 굳건한 기상을 가지라는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소신을 뚜렷이 가지고 분명하게 나타내는 곧 명단(明斷)하는 그의 성격을 볼 수 있다.

퇴계는 남명이 자신을 이렇게 비판하였다는 얘기를 듣고서 남명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곳에서 역시 퇴계의 온유돈후(溫柔敦厚)함을 알게 해주는 부분이 있다. '나는 옛날 유하혜(柳下惠)가 과부를 자기 집에 재워주고도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았던 것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以吾之不可 學柳下惠之可 其可乎)'는 내용이다. 남명처럼 소신을 뚜렷이 가지고 분명하게 행동하지는 못하고, 다만 옛날에 유하혜(柳下惠)가 했던 경지를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내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퇴계의 마음이 따뜻하고 인자하며 부드럽고 조용한 인품의 극치를 보는 듯하다.

퇴계와 남명은 유사한 생몰연대, 불우했다고 할 수 있는 가정 환경, 전시대(前時代)에 있었던 사화(士禍) 등 유사한 환경도 많다. 그러나 퇴계는 그 시대의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는  보수적인 이념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남명은 보다 폭넓고, 보다 강한 비판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설명하는 데는 온유돈후(溫柔敦厚)함과 명단(明斷)이라는 어떤 성품의 차이가 잘 설명해주고 있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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