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3

南冥文學의 現場 踏査記(8)

화림동 계곡(1),
돌의 맑은 이마에 흐르는 구름 한 자락

정  우  락
경북대 강사)

  경상남도 함양군의 북동쪽에는 거창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안의면(安義面)이 있다. 원래는 안의군 지역으로 안의읍내가 되므로 현내면(縣內面)이라 하다가 1914년 군면통폐합에 따라 황곡면, 초점면, 대사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안의면으로 개칭하고 함양군에 편입시켰다. 안의는 조선조에 현감이 다스리던 현이었다. 본래 이름은 안음(安陰)이었는데, 영조 43년(1767) 인근 산음현(山陰縣)에서 일곱살 난 여자아이가 아이를 낳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자 영조는 그쪽에 음기가 너무 세어 그렇다며 산음을 산청으로 개명하면서 안음도 안의로 바꾸었다 한다. 현이 있었던 옛마을인지라 안의향교(경남도 유형문화재 226호)가 있으며, 또한 처음 객사의 누각으로 있던 것을 조선 성종 때 현감 정여창(鄭汝昌)이 개창하여 개명한 광풍루(光風樓, 경남도 유형문화재 92호)가 있다.

  안의면에서 산수가 가장 빼어난 세 곳을 예로부터 안의 3동이라 불렀다. 화림동(花林洞), 심진동(尋眞洞), 원학동(猿鶴洞)이 그것이다. 화림동은 일명 옥산동(玉山洞)으로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등이 있는 계곡이며, 심진동은 일명 장수동(長水洞)으로 심원정(尋源亭), 장수사(長水寺), 조계문(曹溪門), 용추폭(龍湫瀑), 용추사(龍湫寺), 은신폭(隱身瀑) 등이 있는 지금의 용추계곡이다. 그리고 원학동은 위천의 수승대(搜勝臺), 북상갈계숲 등이 자리한 계곡이다.

  스승이 안의 3동을 찾은 것은 1566년 음 3월, 그러니까 66세 되던 봄이었다. 스승은 하항(河沆), 조종도(趙宗道), 하응도(河應道), 유종지(柳宗智), 이정(李瀞)과 함께 산천재에서 산청을 거쳐 담양부사와 진주목사를 지낸적이 있는 옥계 노진(盧()이 있는 안의에 갔다. 노진은 스승의 종유인으로 술상을 마련하는 등 예를 다하여 맞이 하였다. 이 때 제자 강익(姜翼)이 찾아와서 뵙기도 했다. 노진의 집에서 강익과 함께 임훈(林薰)과 임운(林芸) 형제가 살고 있는 안음현 갈계리, 현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갈계정사(葛溪精舍)로 갔다. 임훈은 1500년생이니 종유라 할 수 있고, 임운은 1517년생으로 스승의 제자였다. 스승은 이 때 임운에게 이렇게 이야기 했다.

  이같이 스승은 첨모당(瞻慕堂) 임운에게 서예나 문학 등의 기예를 버리고 유가에서 내세우는 심성수양을 기반으로 한 도학을 철저히 공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즉 스승은 총명이 과인한 임운이게 글씨나 시작(詩作)에만 너무 열중하면 의리의 학문은 투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이 때문에 스승은 먼저 사물에 대하여 군자가 마땅히 지녀야할 태도를 원론적 입장에서 언급하였다. 내외와 경중에 대한 구별이 그것이다. 여기서 비로소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도 되는 것이 명확해진다. ‘내’와 ‘중’은 근본적인 것으로 먼저 해야 하며, ‘외’와 ‘경’은 지엽적인 것으로 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도학과 문학의 경우를 여기에 대응시켜 ‘도학-근본’, ‘문학-지엽’의 논리를 세우고 본말·선후문제를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주자가 서예나 문학 등 기예를 버리고 의리의 학문으로 나아간 것을 예로 든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스승의 가르침에 대하여 임운은 절을 하면서 감사를 표현하였다 하니 깨달은 바가 있었을 터이다. 또한 스승은 곁에 있던 임훈에게 ‘지난 번에 여기에 왔을 때 삼동(三洞)의 산수가 밝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서 마음에 잊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삼동’이란 앞에서 언급한 바 화림동, 심진동, 원학동을 말하는데, 임훈 역시 ‘나도 흥이 적지 않습니다.’며 삼동을 함께 유람하고자 하였다. 임운은 가벼운 병으로 동행하지 못하였는데, 스승과 임훈은 ‘원학동 → 심진동 → 화림동’ 순으로 주위 산수를 탐방하며 자연 속에서 서로의 우의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화림동은 안의 3동 중에서도 아름다운 곳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예로부터 화림동의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며 시인묵객들은 그들의 시상을 여기서 공급받곤 하였다. 화강암은 그들의 어깨뼈를 푸른 하늘로 힘차게 드러내 놓는가 하면, 계곡에서는 그의 맑은 이마에 온갖 모습의 구름을 흐르게 한다. 남덕유산의 참샘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차가운 본성으로 돌과 돌 사이를 부딪치며 구비구비 돌아든다. 그렇게 흐르는 물이 비단처럼 아름답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단내, 즉 금천(錦川)이라 불렀다. 이같은 아름다운 산수 앞에서 스승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시흥(詩興)을 이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안음옥산동(遊安陰玉山洞)」이라는 시 세 마리를 남긴다. 화림동의 다른 이름이 안음동이니 그럴 수 있었다. 이 중 한 마리는 5언절구이고 두 마리는 7언절구인데, 여기서는 5언절구만 감상해 보도록 한다.

  이 작품에서 스승은 ‘백석(白石)’, ‘청라(靑蘿)’ 등의 자연을 통해 도를 즐기려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1구가 ‘백석’에 다양한 구름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노래한 것이라면, 2구는 그 돌 주위에 있는 ‘청라’가 수많은 베를 짜내는 것에 대하여 노래한 것이다. 3구와 4구에서 보듯이 스승은 이같이 아름다운 자연에게 고사리 캐러 돌아 올 때까지 그 형상을 모두 그려내지 말라고 하였다. 자연과 교섭하고 있는 자신의 정서를 보여준 것인데 스승이 자연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4구의 ‘채미(採薇)’ 또한 주목할 만하다. 백이와 숙제의 고사 이래 ‘고사리’는 세속을 떠난 은자의 삶을 나타내는 소재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승은 이처럼 하얀 돌위에 흐르는 맑은 구름과 댕댕이넝쿨이 이루어내는 자연의 절묘한 조화를 보고 다시 올 것을 기약하였던 것이다. 은자적 삶을 지향하면서 말이다.

  다시 돌아와서 은자적 삶을 누리고 싶다고 생각한 스승의 절창에 임훈은 느낀 바 있어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펼쳤다. 스승의 시를 차운한 「화림동월연암차남명운(花林洞月淵岩次南冥韻)」에 이같은 사정은 잘 드러나 있다.

  임훈은 이 작품에서 비단내(錦川)가 돌아 흐르는 것을 먼저 노래했다. 1구가 그것이다. 이같이 아름다운 경치는 그의 의식을 잡아 놓기에 족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2구에서 자신의 형체를 잊어버릴 뿐 아니라, 앉은 채로 인간에게 내면화 되어 있는 도덕적으로 순수한 자연생명의 기제(機制)마저 놓아버린다고 했다. ‘좌식기’라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참으로 매몰찬 자연 몰입이 아닐 수 없다. 여기까지 시상을 전개시킨 임훈이 3구에서 진원(眞源), 즉 참된 근원을 제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임훈은 이 진원을 모두 궁구하지 못했는데도 4구에서 보듯이 날이 저물어 안타깝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산수를 보면서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욕망을 버리고 맑은 본성을 구하려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시간의 한계에 부딪힌 지적 고뇌가 도사리고 있다. 도를 제대로 닦지 못했는데 벌써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 이것을 탐구할 시간이 자신에게는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스승은 자신의 운을 따서 지은 임훈의 시를 읽고 3구의 ‘진원’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즉 주자도 ‘이제야 비로소 참된 근원(眞源)을 깨달았으나 아직 이르지는 못했다’고 탄식했다고 하면서 후학(後學)이 쉽게 도를 알았다며 그 경지를 제시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2구에서 보이는 ‘망형(忘形)' ‘식기(息機)'와 3구에 보이는 ‘진원'의 탐구를 들어 이렇게 이야기 하였던 것이다. 이에 임훈은 안색을 바꾸면서 스승의 말에 공감하였다 하니 스승과 임훈의 교분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임훈이 옥산동 월연암(月淵岩)을 중심으로 스승의 시를 차운했으니, 스승의 「유안음옥산동」 역시 월연암 주변의 풍광을 보고 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월연암은 구체적으로 어느 바위를 지칭하는가? 덕유산에서 내리는 비단내는 구비져 흐르면서 못도 여럿 생겨났다. 그 중 하나는 둥근 달처럼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월연(月淵)이라 불렀다. 그리고 월연의 바탕이 되는 거대한 반석을 월연암이라 불렀는데 농월정(弄月亭)을 받치고 있는 바위가 바로 이것이다. ‘달을 희롱한다'는 뜻을 지닌 이 농월정은 이름 자체가 낭만적이다. 월연에 비친 달빛을 높은 다락에 앉아 희롱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 정자는 선조 때 죽산부사, 공청도관찰사, 예조참판 등을 지낸 지족당 박명부(朴明, 1571-1639)가 세운 것이니 스승과 임훈이 이 옥산동을 방문했을 때는 없었던 정자이다. 농월정 다락에 올라 오른쪽 바위를 내려다보면 지족당이 지팡이를 짚고 신을 끌던 곳이라는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뀜訖)’라는 글씨가 바위에 깊이 새겨져 있다. 박명부가 느릿느릿 신을 끌면서 지팡이를 짚고 느긋하게 화림동의 바람을 쏘이는 것을 보는 것만 같다. 그 때 아마도 동산에서 달이 떠올라 월연에 곱게 비치고 있었을 것이다. 박명부는 한강 정구의 제자이니, 스승의 재전제자의 풍모 또한 화림동 계곡을 흐르는 비단 시내처럼 시간을 따라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 주-

  1. 박명부는 밀양인으로 자가 汝昇, 호는 知足堂으로 寒岡 鄭逑의 문인이다. 그의 저서 『知足堂文集』은 8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정유재란 때 郭逡, 趙宗道 등이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사실 등을 적어 놓은 「黃石山城實蹟」이 있어 정유재란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 책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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