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冥先生評傳 ○

제1장 생애-2. 成長과 受學

李  商  元
(本院 硏究委員)

  남명의 성장과 수학에 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선생이 태어나던 무렵의 조선조 중기는 士林派의 정치적 시련과 국가적 戰亂에 휩싸인 격동의 기간이었다. 연산군의 폐정과 잦은 왜구의 출몰로 국가는 시련을 겪으며 무오사화와 더불어 잇달은 사화로 선비들이 주륙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조선 중기에 이르러 성리학은 그 이론적 탐구가 크게 성행하여 당대의 名儒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드러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6세기의 성리학은 고도로 이론적인 성향을 띠게 되면서 사회적 모순과 정치 현실을 도외시하게 되고 공허한 사변으로 치우쳐 정치와 사회의 개혁에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고 학문적 대결로 일관 하였다. 이런 결과로 중국의 성리학적 기반위에서 조선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는 순기능이 있는 반면에, 피폐한 사회현실을 극복하고, 국민에게는 봉사하는 실천적 학풍과는 다소 괴리되는 이중적인 면모를 띄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南冥의 실천적 학풍은 그 광채를 더하게 되고, 나중에 그의 학풍을 이어받은 門人들은 壬辰倭亂을 당하여 국가와 민족에 봉사하는 義兵活動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이로써 선생이 끼친 敬義의 學風을 지켜갈 수 있었으며 오늘날까지도 嶺右의 學風으로 면면히 내려오고 있다. 또한 남명은 출처에 있어서 매우 엄정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당시에 성행하던 空論과 口耳之學에 각성을 촉구하였다. 즉 남명이 평소에 학문을 하면서 깊이 천착하여 이를 要訣하여 모은 학기유편에 보면, 程子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그가 지향하는 학자의 참모습을 그리고 있다.

  곧, ‘학문은 말을 아는 것보다 귀함이 없으며, 道는 시대를 아는 것보다 귀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남명이 時節에 대응하여 그 기미와 변화를 자각하고 先師들이 내디뎠던 出處의 反省 위에 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남명은 生平동안 곧은 志節과 出處의 자각 위에서, 올곧은 선비의 표상으로서 ‘敬義’라는 貫通의 實踐學風을 견지해갈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남명은 7세 되던 해에 가정에서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어릴 때 선생이 家學에 영향을 받았음은 여러 자료에서 보이는데, 주로 선생편년과 그의 門人이 찬한 祭文 등에서 보이는대로 살피기로 한다. 선생은 총명이 뛰어났으며 지각이 일찍 들었다.

  선생의 편년에 보면, 판교공이 입으로 詩經과 書經을 가르쳤더니 단번에 외우며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에 학업을 시작하니 독려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부지런했으며 의심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질문해서 환하게 안 다음에야 그만 두었다. 몸가짐이 고요하고 무거워서 마치 어른 같았다.

  成運(大谷)이 지은 祭文에 이르기를, (선생은) 높은 산의 정기를 타고 났으니 천년만에 때를 맞추어 좋은 자질과 조촐하고 영걸한 재주가 뛰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의젓하여 어른다웠고 앉은 자리는 정해져 집에서 떠나지 않았다. 또한 몸은 단정 엄숙하고 淵默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와했다.
  선생은 9세 되던 해에 병이 들게 되었다. 앓아 누워 위독하였는데 모부인이 매우 걱정하였다. 선생은 문득 병을 참고 기운을 돋우어 조금 나았다고 아뢰었다. 또 이어 말씀드리길, ‘하늘이 사람을 내실 때에 어찌 헛되이 내겠습니까. 이제 소자 다행히 사내로 태어났으니, 하늘은 반드시 시키는 바가 있어 크건 작건 사업을 이룩하게 할 것입니다. 어찌 갑자기 오늘 죽을까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이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受學과 成長에 관한 남명의 기록은 소략하다. 경남 합천의 삼가에 있던 외가에서 태어난 남명은 문과에 급제한 아버지 판교공을 따라 5세(1505)에 삼가에서 서울로 올라갔으며 이 때 한양 동쪽에 있던 蓮花莊에 살면서 李潤慶(1498~1562), 李浚慶(1499~1572)형제와 깊이 사귀었다.

 그 후 선생은 18세(1518)까지 부친 판교공의 外任地였던 함경도 端川과 서울을 오가면서 다양한 학문을 접하고 공부에 전념하게 된다.

  선생편년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때 판교공이 서울 장의동에 옮겨 살았다. 이 당시에 남명은 성수침(1493~1564)과 성운(1497~1579)과 사귀며 서울 가까운 산사에서 독서에 힘쓰고 있었다. 그후 남명이 죽은 뒤에 성운(대곡)이 찬한 제문에 이르길, ‘그 옛날 낙도에서 집을 이웃하여 살았는데, 아침에 담화하여 저녁에 이르기 까지 계속 하였고, 밤이 되어 잠잘 때는 평상을 함께하였다. 쪼고 갈아서 오직 도와 덕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남명이 19세(1519)되는 해, 친구와 함께 산사에서 주역을 읽었다는 기록이 편년에 보이나 선생의 독서한 차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이의 물음에 답하기를, ‘예나 지금이나 학자들이 주역을 연구하기가 어렵다 하는데 사서를 익히 터득하지 못한 때문이다.사서에 정숙하여 진실을 쌓고 오래 힘을 쏟으면 도를 알게되어 주역을 궁구하기가 거의 어렵지 않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를 미루어 짐작하면, 선생의 독서하신 서차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해 동짓달에 정암 조광조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그 해 11월에 사화가 일어나 한 시대의 어진 선비로서 귀양가고 쫓기고 폐출되고 금고된 자가 수백인 이었다.

  선생의 숙부인 좌랑 언경도 거기에 끼어 있었으며, 조선생도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 때를 당하여, 남명은 훗날 자신의 출처에 대하여 깊은 자각을 하게 되고, 위기지학에 전념하게 된다. 이즈음 부친 언형(1469~1526)과 숙부 언경은 연산주의 혼조를 당하여 벼슬길이 순탄하지 않게 된다. 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거나 낙향하였기 때문인데, 이러한 사정은 남명의 삶의 행로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치게 되며, 그의 학문적 성향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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