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탐방기(3)

남 계 서 원

韓   相   奎
(본원 상임연구위원)

1.설립배경과 구조

  남계서원은 경남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에 있는 조선시대 두번째로 세워진 서원으로 일두(一 ) 정여창(鄭汝昌,1450-1504)의 학덕을 기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이 고을의 유생 개암(介菴) 강익(姜翼,남명문인)을 중심으로 30여명의 선비들이 합심하여 1552년(명종7) 남계에다 건립하였다. 건립되기까지 이 고을의 여러 군수가 지원하였으나 10년 동안의 공사가 임진왜란으로 서원의 사우(祀宇)가 터를 옮겨가면서 진행하였다.

  지방 유림의 다수가 일두선생의 학덕을 추모하는 소장학자로서 이 지역의 사표인 남명선생의 사숙문인이 다수 포함되었으니, 강익, 박승임(朴承任), 정복현(鄭復顯), 임희무(林希茂)등이 서구연(徐九淵)군수의 후원으로 착수하여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1566년(명종21) 9월 남계서원에 사액이 내려졌다. 사액이 내려진 배경에는 지방유림의 노력과 이 고을 군수로 온 김우홍(金宇弘)과 관찰사 박계현(朴啓賢)의 배려가 작용하여 이후 춘추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03년 나촌(羅村)으로 옮겨 복원하였고, 1612년 남계로 옮겼다. 그 후 1675년 (숙종1)에 남명 사숙 문인 동계(桐溪) 정온(鄭蘊)을 서향에 모시고 1689년(숙종15)에 개암 강익을 동향에 모셨다. 별사(別祠)에 유호인(兪好仁)과 정홍서(鄭弘緖)를 배향하였다가, 1868년 별사는 훼철되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의 하나로 지방문화의 진흥과 교육에 큰 역활을 하였다.

  서원의 구조는 사우, 전사청, 양정재, 보인재, 애련헌, 영매헌, 풍영루, 묘정비각, 고직사 등이 있다. 강익의 《남계서원기》에 의하면 사우와 강당 및 동서재와 앞문간까지 총 30여간이나 된다. 강익은 내가 이 일을 시작했다는 것으로써 여러 군자가 그 전말을 기록하고 그 재사(齋舍)에 이름하기를 청한다. 사양하다 못해서 삼가 서원을 세운 뜻을 기록하고 드디어 강당을 《명성(明誠)》이라 이름했는데 중용(中庸)에서 「밝으면 성실하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왼쪽 좁은 방은 〈거경(居敬)〉, 오른쪽은 〈집의(集義)〉라 했음은 정자가훈(程子家訓)에 「경(敬)에 거(居)해서 이(理)를 궁구한다」는 것과 추경(鄒經)에 「의(義)를 모아 산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재사(齋舍)의 동쪽 방을 〈양정(養正)〉이라 함은 역경(易經)에 「산업을 바르게 기른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고, 서쪽 방을 〈보인(輔仁)〉이라 함은 논어(論語)에 「벗으로서 인(仁)을 돕는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재사(齋舍)의 두 추녀를 애련(愛蓮)과 영매(詠梅)라 했고 앞대문은 준도(遵道)라 했는데 각각 뜻이 있다. 선액(宣額)에 남계서원(먏㈜朶)이라 했음은 원이 남계강(먏▦)가에 있기 때문이다.

  이 서원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91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2월과 8월(中丁)에 향사를 지낸다.소장품은 어정오경백편, 고려사 등 59종 317책이 있으며, 재산은 전답 1만 4500여평 대지 6천평 등이 있다. 정여창을 받들고 있는서원은 전국적으로 아홉군데에 이른다. 그 주된 서원이 남계서원이며, 종산(鍾山)서원(함북), 영계(永溪)서원(하동), 용문(龍門)서원(안의), 도산(道山)서원(거창), 인산(仁山)서원(아산), 이연(伊淵)서원(합천야로), 경현(景賢)서원(나주), 도남(道南)서원(상주) 등이 있었다.

2.생애와 정신세계

  정여창은 본관이 하동으로 평장사공파이며 증조부 때 함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1450년(세종32) 5월 5일  아버지 정육을(鄭六乙)과 어머니 경주 최씨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경남 함양 지곡면 덕곡리 개평에서 출생하였다.

  1471년(성종2) 경기도 이천의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473년(성종4) 지리산에 들어가 사서육경을 3년간 연구.

  1476년 상경하여 응교벼슬을 하면서 경연관으로 있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 이후 4년 뒷 무렵 김굉필, 김일손, 남효온 등과 교분.

  1481년 하동에 내려와 학문연구.

  이듬해 4월 14일부터 29일까지 16일동안 김일손 등과 두류산 등정후 밀양으로 가 김종직을 방문.
  149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로 40세에 첫 관직을 제수받음. 이무렵 서울 회현방에 살면서 김굉필과 교분.

  1494년 외직을 청하여 안음현감을 5년간 봉직하면서 목민관으로 지대한 치적을 남겼고, 광풍루, 제월당등을 건립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를 당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 이곳에서 이희중, 고승걸 등 제자를 가르침.

  1504년(연산10) 4월 1일 54세의 일기로 적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1568년 문묘 종사 5현에 진청되고, 1575년 문헌공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정여창은 스스로 「한마리의 좀」이란 뜻의 일두(一 )라고 하여 자신을 낮추어서 불렀는데, 이 말은 정이천이 ‘천지간에 한마리 좀에 불과하다’는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정여창이 박언계의 편지에 대한 답서에서

고 하여 그가 성경을 주로하여 겸손한 마음가짐을 보여주었다.

  정여창의 학문을 엿볼 수 있는 저서 『용학주소』, 『주객문답』, 『진수잡저』 등이 있으나 무오사화 때 소실되어 다만 짐작만 할 따름이다.


이전화면

초기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