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학파고문헌 소개(8)-『逍遙堂逸稿』

김  경  수
(본원 사무국장)

  1. 저자 및 간행경과

  5권 2책으로 된 『소요당일고』는 소요당 朴河淡(1479-1560)의 유고를 모으고 후인들의 글을 합하여 엮은 책이다.

  소요당 선생의 본관은 밀양이며 字는 應天이니, 父 承元과 母 진양 河씨 사이에서 성종 10년 9월 20일 청도의 수야리에서 태어났다. 소요당이라는 호는 운문산 아래 눌연 위에 지은 정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며, 당시 강우지역을 중심으로 한 處士들과 두루 교분을 가졌다.

  연보를 통하여 선생의 생애를 살펴보면, 6세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여 14세에 『대학』과 『중용』을 읽었고, 15세에는 『서명』을 읽었다. 18세에는 『소학』을 읽고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19세에는 평생 동안 가장 절친한 벗이었던 삼족당 김대유와 함께 운문사에서 『맹자』를 읽었다. 20세에는 무오사화에 연루된 탁영 선생의 비보를 들었고, 21세에는 안동 권씨에게 장가들었다. 30세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한 삼족당을 찾아 축하하였고, 31세 때에 『심경』을 읽고서 성리학에 전념하면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다. 36세에는 死六臣의 묘가 있는 노량진을 지나면서 시를 짓고, 파주에 있는 청송 성수침을 방문하였다. 38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39세에 『근사록』을 읽고서 이를 인출하여 보급하고 또 『심경』도 간행하였다. 이 해에는 지방 백성들을 위하여 社倉의 건립을 삼족당과 함께 추진하였다.

  41세에는 현량과에 뽑혔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정암 조광조 등이 기묘사화에 연루됨을 보고서 그동안 지었던 글을 모두 불에 태워 버렸으니 이로 인하여 후대에 남은 유고가 적게 되었다. 42세에는 雲樹亭을 지었고, 신재 주세붕이 방문하여 운문산의 경치를 감강하였다. 43세에 소요당을 짓고 다음해에는 白蓮庵을 지었다. 46세에 四山監役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다음해에는 司瞻寺奉事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48세에 경재 곽순이 방문하여 성리설을 논하였고, 50세에 장예원사평에 제수되자 누차 벼슬을 받고서 집에 있을 수 없다고 하여 상주까지 올라가서 소를 올리고 돌아왔다. 또 선산으로 송당 박영을 방문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기도 하였다.

  54세에 부인을 잃었으며, 58세에는 ‘운문구곡가’를 지었다. 59세에는 『가례』를 강론하였으며, 박송당의 방문을 받았다. 61세에 모친상을 당했고, 62세에는 박송당의 부음을 들었으며, 64세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예를 엄숙히 하였다. 65세에는 주신재 선생과 남명 선생이 조문하였다.

  67세에는 남명 선생이 입암정사로 찾아옴에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서명』과 四子書의 의문점 ‘河洛太極圖說’의 강론을 청하였다. 또 을사사화로 곽경재가 화를 당하자 슬퍼하였으며, 성청송을 방문하였다. 68세에는 남명 선생이 모친상을 당하자 조문하였고, 69세에 송계 신계성이 방문하여 『주역』을 토론하였다. 79세에는 퇴게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으며, 81세에 병으로 누우니 자제들이 약을 쓰고자 하였으나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82세 되던 해 11월 19일 자손을 위하여 가훈 10조를 남기고 입암정사에서 고종하여 다음해 비슬산 칠엽동에 장례지냈다.

  그 후 선조 원년에 운수정에 김삼족당과 함께 배향하였으며, 선조 10년에 사당을 이건하여 선암서원이라 하였으며, 광해군 10년에 우연서원을 지어 김삼족당, 곽경재와 함께 배향하였다.

  이 책의 간행경과를 살펴보면, 먼저 소요당은 일찍이 학문에 전념하여 82세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장수를 누렸으므로 많은 저술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연보에 보이는 바와 같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스스로 자신의 모든 원고를 불태워 버렸으며, 또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그 후의 글조차 소실되어 없어졌다. 이후 후손들이 유고를 수습하여 약 3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책을 간행하게 되었는데, 밀양도호부사 李彙寧의 서문은 1838년에 쓰여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책 끝에 있는 회재 이언적의 후손인 李晉祥의 발문이 쓰여진 연대는 철종 5년인 1854년으로 되어 있으니 현재 남아있는 『소요당일고』는 이 때에 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2. 체재 및 내용상의 특징

  5권 2책으로 된 이 책의 1권과 2권은 소요당이 직접 저술한 내용으로 구성되었고, 3권, 4권, 5권은 후인들의 저술을 모아 이루어졌다.

  책의 첫부분은 퇴계 선생의 후손인 이휘녕(1788-1861)이, 소요당의 후손인 朴時默이 유고를 가지고 와서 부탁함에 서문을 쓴 것으로, 자기 선조와의 편지왕래를 언급하고 소요당의 교유관계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李敦禹(1801-1884)의 서문에서는 당시 영남에는 남명 선생을 비롯하여 주신재, 김삼족당과 같은 명현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소요당도 그 중의 한 분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기묘, 을사사화 이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은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권1의 첫머리에는 賦 4편이 실려있는데, 운문산의 경치를 읊은 것 두 편과 訥淵을 보고 읊은 것 한 편, 그리고 속된 선비를 경계하는 「憎 魚賦」등이다. 그 다음은 자신이 지은 운수정을 읊은 詞 한 편과 가장 절친했던 삼족당의 죽음을 슬퍼하는 輓詞가 한 편 실려 있다.

  이어 오언절구 18수가 있는데, 그 가운데 남명의 시를 차운한 것 1수와 남명의 시가 실려 있고, 동생들이 차운한 시 3수가 포함되어 있다. 다음은 오언율시 7수가 있는데 남명이 김해의 탄동에 은거함을 읊은 시 1수가 포함되어 있다. 이어 오언고시 3수로 남명과 관련한 것이 두 수이고, 곽경재의 만사가 한 수이다. 그 뒤에 칠언절구 23 수와 칠언율시 9 수, 칠언고시 1 수가 있다.

  다음은 편지글인데, 박송당이 문의한 예에 대한 답변서를 비롯한 4편이 있다. 그리고 소요당의 역사의식을 알아볼 수 있는 「春秋大一通論」이 있어 筆誅의 무서움을 말하고 있다. 그 뒤에 임종하기 하루 전에 자손들을 위해 지은 「가훈십조」가 있으니, 養親·事長·兄弟·夫婦·祭祀·言語·行實·욕심의 제거·시서의 공부·의식 등 10가지 사항을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序文으로서 삼족당이 칠원으로 부임함에 즈음하여 쓴 것, 송당이 양양으로 유람감에 즈음하여 쓴 것이 있고, 그 다음에 「送曺楗仲歸德山序」가 있으니 남명이 덕산에 있는 것은 유림에 남명이 있는 것과 같다고 칭송하고 예전에 운문산으로 찾아와 삼족당과 함께 산수를 유람하고 학문을 강론했던 즐거움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이어 주신재가 왔다가 돌아감에 아쉬움을 표현한 것과 鄕老堂 낙성을 축하하는 연회에 즈음하여  쓴 서문이 있다.

  그 뒤에 記文 5편이 있으니, 소요당을 짓고 스스로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기록한 글과 訥淵 위에 있는 曲川臺의 경치를 설명하고 친구인 郭璋의 처세를 기록한 글, 鳳凰厓의 경관을 찬미한 글, 杏壇을 세운 후에 쓴 글, 그리고 남명이 천하의 선비로 인정한 김대유의 「삼족당기」 뒤에 쓴 글 등이다.
  권2의 첫부분은 스스로를 경계한 箴 5편이 있으니 몸가짐을 바르게 하기 위한 「律身箴」, 存心養性에 대한 「存心箴」, 정성을 다하여 학업에 열중할 것을 다짐한 「立志箴」, 爲己之學을 강조한 「爲學箴」, 그리고 산림에 은거하는 기쁨을 말한 「居鄕箴」등이다. 이어 선비의 일산적인 용품인 책상, 벼루, 붓, 먹, 구리 거울을 찬미하여 쓴 ‘銘’ 5편이 있다. 연이어 매화의 결백을 칭송하고, 소나무의 절개를 찬미하고, 대나무의 곧고 푸르름을 높게 평하고, 국화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贊’ 4편이 있다.

  그 뒤에는 청도 객관의 신축을 기념한 상량문과「향로당상량문」이 있고, 사육신과 곽경재, 그리고 김삼족당의 제문이 있으며, 許世麟의 善政을 추모한 善政碑銘이 있다.

  권3부터는 후인들의 기록을 묶은 부록으로서 먼저 밀양 박씨의 世系를 싣고, 그 뒤에 「연보」를 실었다. 이어 李玄逸(1627-1704)이 지은 「墓碣銘」이 있고,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여러 기록에서 소요당과 관계된 부분을 간추려 뽑은 「言行拾遺」가 있으며, 그 뒤에 曺采臣이 쓴 「遺稿後敍」가 붙어 있다.

  권4에는 먼저 柳疇睦이 지은 「行狀」이 있는데, 특기할 것은 임진왜란을 당하자 후손들이 의병을 일으켜 표창을 받은 사람이 14명이나 됨을 언급하여 충절의 집안임을 찬양한 내용이다. 그 뒤에는 祠堂과 소요당, 운수정, 雙淸樓, 仙巖書院 등 소요당과 관계된 건물의 이건이나 중건 등과 관게된 글들로서 모두 당대의 名儒들이 지은 것이다.

  권5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淨襟堂題詠」으로 소요당의 정자 앞에서 여러 사람들이 선생을 추모하여 지은 글들을 묶은 것인데, 수록된 사람만 모두 32명이나 된다. 책의 끝에는 이진상의 발문이 있다.

  『소요당일고』 역시 그 당시를 살았던 영남의 많은 다른 선비들과 같이 병화로 인하여 유고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여 저자의 학문적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있는 글이 많이 남아 있지 못한 안타까움을 남긴다. 하지만 소요당은 영남학파 형성의 초기 인물로써 당시 강우지역의 학문적 경향을 살피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그런 관점에서 이 책이 지니는 가치도 적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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