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2

南冥연원을 찾아서(8)

大笑軒 趙宗道

宋   準   湜
(진주전문대교수)

  조종도(趙宗道, 字 伯由, 號 大笑軒, 1537∼1597)는 아버지 참봉(參奉) 공언(公堰)과 어머니 진양(晋陽) 강씨(姜氏; 熙臣의 딸) 사이에 함안군 군북면 원북동에서 태어났다. 대소헌의 저작은 모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져 버렸지만, 사우간(師友間)에 전파되어 있는 것을 모은 것으로 시(詩) 12수, 서(書) 14편, 제문(祭文) 2편, 묘표(墓表) 1편, 부(賦) 1편, 책(策) 1편, 창의문(倡義文) 1편 등이 남아 있다. 대소헌에 관한 자료는 『대소헌선생사적집(大笑軒先生事跡集)』, 『용사일기(龍蛇日記)』, 『고대일록(孤臺日錄)』 등이 전해지고 있다.

  1537년(중종 32년 정유) 2월 5일 임시(丑時)에 선생이 함안군 군북면 원북동에서 출생하였다. 5대조 어계(漁溪)선생이 여기에 처음으로 터를 정하니 자손이 이어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계묘) 선생의 나이 7세가 되었다. 선생은 5∼6세 때부터 형모(形貌)가 남달리 빼어나고 도량(度量)이 넓고 헌출(軒出)하였으며 글을 잘 지었다.

  1544년(중종 39년 갑진) 선생의 나이 8세가 되자 달팽이를 두고 글을 짓기를 “비온 날에 나왔다가 볕난 날에 들어가네, 제집은 항상 등에 지고 다니고 뿔은 있어도 떠받을 즐 모르네.”라고 하여 참봉공 (參奉公)이 이 시를 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특하게 여겼다.

  1545년(인종 원년 을사) 선생의 나이 9세가 되어, 은군자(隱君子)인 정두(鄭斗)에게서 글을 배웠다. 선생이 처음 글을 배울 때 스승이 애써 가르치지 않아도 문장을 환하게 깨닫고 힘써 공부하므로 정(鄭)선생이 크게 기뻐하였다.

  1549년(명종 4년 기유) 선생의 나이 13세가 되자 그 해 5월에 조부 감찰공(監察公)의 상(喪)을 당하였다. 선생이 아버지 참봉공을 모시고 항상 빈소를 지켜 자리를 떠날줄 몰랐으며, 몸소 제존(祭尊)을 차려 예를 지킴이  어른과 다름이 없었다.

  1550년(명종 5년 경술) 선생의 나이가 14세가 되었으며, 그 해 정월에 조모 유부인(柳夫人)의 상을 당했다. 빈소를 모시고 집상(執喪)함에 있어 조부상 때와 같이 근엄하게 복상(服喪)하였다.

  1551년(명종 6년 신해) 선생의 나이 15세가 되는 6월에 진주에서 시행하는 지방시에 선발되었다.

  1552년(명종 7년 임자) 선생의 나이 16세가 되었다. 그 해 봄에 남성(南省)에 갔다가 상사(上舍: 進士) 신홍국(申弘國)의 집에 머물러 글을 배웠다. 신공은 선생의 고숙(姑叔)이 된다. 신공이 대소헌을 다른 아이처럼 대하지 않았으며, 또한 대소헌도 신공을 예의로써 모셨다. 판부사(判府事)를 지낸 신잡(申) 등도 이 때 같이 배웠으나, 그 때 선생의 인품과 재주에는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1553년(명종 8년 계축) 선생의 나이 17세가 되자 그 해 가을에 집에 돌아왔다.

  1554년(명종 9년 갑인) 선생의 나이 18세가 되었다. 선생이 어려서부터 총명이 과인(過人)하니 책을 한 번 대하면 단번에 외우는 특출한 재주가 있었다. 경서(經書), 사기(史記), 자집(子集), 예문(禮文) 등 해석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글짓는 재주가 뛰어나서 붓을 잡으면 도도히 흐르는 강하(江河)와 같아서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1557년(명종 12년 정사) 선생의 나이 21세가 되는 가을에 지방 선발시험에 합격하였다.

  1558년(명종 13년 무오) 선생의 나이 22세가 되어 생원회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해 겨울에 좌참찬 이준민(左參贊 李俊民)의 딸인 전주 이씨(全州 李氏)를 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참찬(參贊)이 일찍이 말하기를 “동국인물(東國人物)은 다 우리집 소유”라고 했으니 그 이유는 사위들이 뛰어나 모두 관로(管路)에 쟁쟁(錚錚)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1559년(명종 14년 기미) 선생의 나이 23세가 되어 봄에 조남명(曺南冥)선생을 배알(拜謁)하였다. 선생의 빙장 이공(聘丈 李公)은 남명 선생의 생질(甥姪)이 된다. 선생이 이러한 인연으로 문하에 출입이 잦았으며 청문(請問)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1월에 첫아들 영해(英海)가 출생하였다.

  1563년(명종 18년 계해) 선생의 나이 27세가 되자 2월 9일에 모부인 강씨의 상을 당했다. 선생은 주야로 애통해하여 거의 정신이 없게 되었다. 장지를 하림동 묘향(下林洞 卯向)에 정하고 3년의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참판공 문안을 비록 대설중(大雪中)이라도 폐하는 일이 없었다.

  1566년(명종 21년 병인) 선생의 나이 30세가 되어 2월에 남명선생을 모시고 단속사(斷俗寺)에서 회합하였다. 그 때 구암 이정(龜岩 李楨)은 순천부사(順天府使)로 있으면서 같이 만나 의리(義理)를 강론하고 놀았다. 3월에는 남명(南冥)과 옥계(玉溪)를 모시고 안의 갈계리(葛溪里)로 갈천 임훈(葛川 林薰)과 첨모당 임운(瞻慕堂 林芸)형제를 방문하고서 안의 삼협(安義 三峽)을 구경하였다. 이 때 같이 간 이들은 각재 하항(覺齋 河沆), 영무성 하응도(寧無成 河應圖), 모촌 이정(茅村 李瀞) 등이 있었다.

  1570년(선조 3년 경오) 선생의 나이 34세가 되었다. 12월에 3남 영혼(英混)이 출생했다. 그 달 8일에 부친상을 당했다. 선생은 출천(出天)의 효(孝)로써 부친을 편히 모셔 항상 기쁘게 하였다. 참봉공 (參奉公)이 병상에 눕자 시탕제절(侍湯諸節)을 선생이 손수하여 침식을 잊으면서 성심(誠心)을 다했다. 전후 치상(治喪)에 염빈장제(殮殯葬祭)를 고례(古禮)에 따라 시행했으며, 3년의 시묘살이를 하면서 호곡읍혈(號哭泣血)하였다. 애통이 과도하여 사람마다 지탱하기 어렵다고 걱정하였다.

  1571년(선조 4년 신미) 선생의 나이 35세가 되었다. 시묘살이를 하면서 선고(先考)의 묘비문(墓碑文)을 지어 입석(立石)하였다.

  1572년(선조 5년 임신) 선생의 나이 36세가 되어 시묘살이를 계속하였다.

  1573년(선조 6년 계유) 선생의 나이 37세가 되자 2월에 부상(父喪)을 마쳤다. 선생의 거상대절 (居喪大節)과 봉선(奉先)의 도(道)는 지성(至誠)에서 우러나왔으며, 그 일용언행이 일세(一世)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므로 세인이 감복하였다. 가을에 태학의 천거로 안기도 찰방(安奇道 察訪: 안기도는 안동(安東) 서쪽 5리 지점)이 되었다.

  1574년(선조 7년 갑술) 선생의 나이 38세가 되어 여강서원(廬江書院)을 배알하였다. 그 때 퇴계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5년이 되었으나,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송암 권호문(松巖 權好文), 분지 남치리(賁趾 南致利) 등의 제현과 더불어 도의를 강론하고 이학(理學)을 토론하였다.

  1575년(선조 8년 을해) 선생의 나이 39세가 되었고, 안기(安奇)에 머물러 있었다.

  1576년(선조 9년 병자) 선생의 나이 40세가 되었다. 선위사(宣慰使)에 수행(隨行)하여 일본 사신 승 현소(僧 玄蘇)를 송별하였다. 선위사와 현소는 서로 시로써 화답하였는데 일본 사신의 태도가 매우 교만했으나 선생의 시를 받고 나서는 벽 위에 걸어놓고 재배(再拜)하며 읽었다고 한다.

  1577년(선조 10년 정축) 선생의 나이 41세가 되었다. 안기(安奇)에서 권송암(權松巖)을 방문했다.

  1578년(선조 11년 무인) 선생의 나이 42세가 되었다. 8월에 노옥계(盧玉溪)선생에게 가서 조곡(弔哭)하였다.

  1579년(선조 12년 을묘) 선생의 나이 43세가 되어 안기(安奇)에 있었다.

  1580년(선조 13년 경진) 선생의 나이 44세가 되어 3월에 남치리(南致利, 字 義仲, 號 賁趾)의 영전에 조곡하였다.

  1581년(선조 14년 신사) 선생의 나이 45세가 되어 사도사 직장(司導寺 直長)으로 있다가 상서원 직장으로 전임하였다.

  1582년(선조 15년 임오) 선생의 나이 46세가 되어 통예원 인의(通禮院 引儀)의 자리에 있다가 장예원 사평직(掌隸院 司評職)에 전임하였다.

  1583년(선조 16년 계미) 선생의 나이 47세가 되자 경기도 양지현감(陽智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때 조정에서는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지지하는 사람의 말에 좇아 현감으로 나가게 되었다.

  1584년(선조 17년 갑신) 선생의 나이 48세가 되었다. 어사의 보고에 따라 의복일습(衣服一襲)의 포상을 받았다. 어사의 보고에는 “거관(居官)에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어질게 다스렸다.”고 하였다.

  1585년(선조 18년 을유) 선생의 나이 49세가 되어 가을에 양지현감을 사직하고 돌아왔다. 『선조실록』에는 “양지 현감(陽智縣監) 조종도는 정사가 평이하였고 백성을 부림에 있어 수월하게 하였으므로 모든 폐추되었던 일들이 점차로 잘 시행되고 있었습니다(『선조실록』 18년 4월 29일 경오조).”라고 하였다.

  1586년(선조 19년 병무) 선생의 나이 50세가 되자 문경현감(聞慶縣監)을 제수받았다.

  1587년(선조 20년 정해) 선생의 나이 51세가 되어, 봄에 사정에 따라 관직을 사임하고 낙동강에 배를 타고 돌아왔다. 4월에 장자 영해(長子 英海)가 죽었다. 선생은 항상 영해의 효심을 일컬었다.

  1588년(선조 21년 무자) 선생의 나이 52세가 되었다. 김구현(金溝縣)에 있을 때 동헌(東軒)에 높이 앉아 아무 하는 일 없이 보여도 청풍(淸風)이 늠름(凜凜)한 것 같았고, 법령의 까다로움과 부후(賦後)의 가혹한 점은 선생이 사정을 고려하여 고치고 너그럽게하여 민력(民力)을 배양하였다. 그리고 송사(訟事)에 있어서도 그 사건의 내용을 십분 정찰(偵察)한 연후에 재결(裁決)하였다.

  1589년(선조 22년 기축) 선생의 나이 53세가 되어, 겨울에 사정이 있어 관직을 사임했다. 그 때 정여립(鄭汝立) 난이 일어나 경내(境內)에 크게 옥사가 일어났다. 고을에 어떤 사람이 일찍이 정여립에게 글을 배워 그 도당이 되었다가 피살되고 그의 아비도 연루자로 지목되었다. 이를 체포하기 위해 나졸을 풀어 포위하는데 그가 담을 넘어 달아나자 나졸들이 쫓는지라 선생이 그 사람의 억울함을 알고 영을 내리기를 “나졸이 행오에 벗어나면 군율로서 다스리겠다.”고 하니 감히 동요치 못하고 그는 억울하게 잡히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1590년(선조 23년 경인) 선생의 나이 54세가 되자, 4월에 선생이 체포당하여 옥에 갇혔다. 그 때 정여립 사건이 끝나지 않아 선생도 연루자로 오인받게 되었던 것이다. 4월에 어명으로 선생을 옥에 가두니 사람마다 떨고 있었으나 선생은 태연자약하였다. 최영경도 같은 혐의를 받고 옥에 갇혀 있었는데 옥중에 있으면서 도 옥졸들을 자기집 종 부리듯 호통을 하였고, 선생은 웃고 농담을 즐기면서 옥중생활에 평상시와 다름없이 당당하였다. 7월에 혐의가 없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 최수우는 몸이 말라 옥중에서 숨졌는데 선생이 수우당 최영경의 말만 하여도 문득 슬퍼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신묘) 선생의 나이 55세가 되었다. 사림들이 최수우선생을 남명선생서원에 배향하려 하였으니 실은 선생이 선두에서 운동한 것이었다. 그러나 난리중이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 선생의 나이 56세가 되었다. 4월에 왜군이 대거 입구(入寇)하게 되자 선생이 서울로부터 영남에 돌아와 의병을 일으켰다. 선생의 빙장인 참찬(參贊: 의정부 정2품) 이준민(李俊民)은 신묘년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옥고를 치룬 후에는 서울에 발을 디딜 생각이 없었다가 이해 봄에 병구(病軀)를 이끌고 서울에 당도했다. 그 때 장안에는 이미 왜군의 선봉이 쳐들어 왔다. 인심은 흉흉하고 조야가 물끌듯하였다. 선생은 밤에 몰래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을 찾았다. 유성룡은 영상(領相)으로 있으면서 대란을 막아내기에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라 서로 마지막인양하고 갈렸다. 귀로에 직장(直長: 從六品職) 이로(李魯)를 만나서 같이 영남에 돌아가 의병을 조직하여 왜병을 쳐부수기로 언약하고 함양(咸陽)땅에 도착하였다. 『선조실록』에는 “순찰사가 전 현령 조종도로 하여금 소모관(召募官)을 삼으니 제법 많은 인민을 불러모아 여러 일들을 수습하였습니다(『선조실록』 25년 6월 28일 병진조).”라고 하였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에는 “듣건대 정인홍 (鄭仁弘)·김면 (金沔)·박성 (朴惺)·곽율 (郭율)·조종도 (趙宗道)·곽재우 (郭再祐) 등이 의병을 일으켜 많은 무리를 규합했다 하니, 본도의 충성과 의리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았다고 하겠다. 더구나 곽재우는 비상한 작전으로 적을 더욱 많이 죽였는데도 그 공로를 스스로 진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더욱 기특하게 여기는 바로 그의 명성을 늦게 들은 것이 한스러울 뿐(『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 무자조)”이라고 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계사) 선생의 나이 57세가 되어 단성현감으로 재직하였다. 그 때 임진왜란의 격심한 피해로 백성은 농사를 짓지 못하여 기근이 극심했다. 선생은 매일 백성들을 먹여 살리기만 골몰하고 있었다. 4월에 순찰사 김학봉 선생이 병사하였다. 김학봉선생은 우병사(右兵使)로부터 우감사(右監司)에 올라서 열읍(列邑)을 두루 다니며 군(軍)의 사기를 북돋우고 군무(軍務)에 힘써 참획(參劃)하였다. 선생과 김학봉은 사기를 분발시켜 적을 섬멸하는데 갖은 애를 썼으며 군사에 관한 중요기밀은 서로 의논하였으며, 한편 임지인 단성을 지키면서 대업을 완수하려 노력하였다. 그 때 난중에 유행병이 치열하여 학봉선생이 병에 신음하다가 진주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선생과 이로(李魯), 박성(朴惺)은 김학봉선생의 시체를 염하고 임시로 지리산 아래에 묻었다.

  1594년(선조 27년 갑오) 선생의 나이 58세가 되었으며, 단성현감으로 재직중이었다.

  1595년(선조 28년 기미) 선생의 나이 59세가 되었다.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제수하였으나 병으로 부임치 못했다. 학질로 1년반이나 고생중에 있었다.

  1596년(선조 29년 병신) 선생의 나이 60세가 되어, 봄에 청풍부사(淸風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부임치 못하다가 가을에 함양군수에 임명되었다. 선생이 누화 조가(屢火 朝家)의 명을 어겨 신자(臣子)로서 미안하다하여 병구를 이끌고 명령에 따랐다. 그 때 명나라 후원병이 호남으로부터 황산(荒山)을 넘어 천령(天嶺:함양군)에 도착했을 때였다. 선생이 정성을 다하여 명병(明兵)을 호궤(a饋)하고 병으로 칭탁하고 게을지 않았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 선생의 나이 61세가 되어 함양군수로 있었다. 봄에 왜적이 다시 움직일 기세가 있었다. 선생이 체찰사 이원익(體察使 李元翼)에게 상서하기를, “일조(一朝)에 왜적(倭賊)이 밀어닥치면 백성은 갈 곳이 없습니다. 군수는 비록 노둔(盧鈍)하나 살기를 원하고 주검을 아깝게 여겨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본군병민(本郡兵民)을 모두 군수 권한하에 속하게 하면 요새지를 택하여 한 번 대전하고 죽고자 합니다.”하였다. 체찰사가 이 글을 받아 감읍하며 다 선생의 소원대로 조처하고 요새지를 지리산 근거에 택하려 하니 조가(朝家)에서는 새로 황석산성을 명축(命築)하기로 결정하고 이체찰사로 하여금 하명케 하였다.

  『선조실록』에는 “함양군수 조종도는 처자를 이끌고 산성에 들어가서 지키다가 적의 형세가 다급해져 성안이 붕괴되자, 종도가 백사림(白士霖: 김해부사(金海府使)로서 성을 지키는 주장(主將)이 된 자)에게로 달려가서 방책을 논의하려고 하였는데, 벌써 도피하였으므로(『광해실록』 4년 11월 5일 을미조) 다시 곽준(郭逡)을 남문으로 찾아가서 손을 잡고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라 하고, 드디어 그의 아들 조영혼(趙英混) 및 곽준과 함께 모두 피살당하였습니다. 이상의 사람들은 다 죽음을 제 갈 길로 여기고 조용히 자처하였으니, 각별히 포장하여 풍화(風化)의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선조실록』 30년 11월 14일 신축조).”라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에는 “적이 안음(安陰)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함락시켰다. 현감 곽준(郭逡)과 전 함 군수(咸陽郡守) 조종도가 전사하였다.…조종도는 전에 함양군수를 지내고 집에 있었는데, 일찍이 “나는 녹을 먹은 사람이니, 도망하는 무리와 초야에서 함께 죽을 수는 없다. 죽을 때는 분명하게 죽어야 한다.”고 하고는 처자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공동산 밖의 생활도 즐거웠지만 장순·허원처럼 성을 지키다 죽는 것도 영광일세.” 라는 시를 지었는데, 마침내 곽준과 함께 전사한 것(『선조수정실록』 30년 8월 1일 기미조)”이라고 하였다.

  1598년(선조 31년 무술) 4월에 임금께서는 예조좌랑 윤안국(尹安國)을 시켜 사제하였다. 가을 8월에 아들 영한(英漢)이 1년만에 일본으로부터 석방 송환되어서 영혼(英混)과 같이 영구를 모시고 진주 소남 오리동 건좌(召南 梧里洞 乾坐)에 묘소를 드렸다.

  1616년(광해 9년 병진) 자헌대부이조판서겸의금부사(資憲大夫吏曹判書兼義禁府事)를 증직하고 정려를 세우게 하고 복호(復戶)의 은전(恩典)을 주었다.

  1634년(인조 12년 갑술)에 함안군서(咸安郡西)에 상덕사를 세워서 제사하다가 뒤에 덕암서원 (德岩書院)으로 승봉(昇奉)하여 선생 및 우졸자 박한주(迂拙子 朴漢柱), 동지 조순(同知 趙純)을 병향하였다.

  1693년(숙종 19년 계유)에 영남 유생 조시전(趙時琠) 등이 올린 상소문에 의하여 증시(贈諡)의 윤허가 내려졌다.

  1714(숙종 41년 갑오) 어사의 보고에 의해 안의(安義)의 황석산성(黃石山城)에 선생과 곽준(郭逡)을 병향하는 사당을 지으라는 명이 내려졌다.

  1717년(숙종 44년 정유) 12월에 나라에서 관원을 보내 사제하고 황암서원(黃岩書院)이라 사액하였다.

  1787년(영조 13년 정사) 9월에 이조좌랑 이정보를 보내어 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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