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과 土亭의 學風과 現實觀

申  炳  周
(서울대 강사)

  16세기의 조선사회는 士禍와 함께 시작되었다. 16세기 중반까지 4번에 걸쳐 진행된 사화는 士林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사화라는 정치현실에 큰 불만을 느낀 사림학자들은 出仕 보다는 은거의 삶을 선택하고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학문을 닦으면서 새로운 사상적 모색을 꾀하게 되었다.

  士禍라는 정치적 환경은 한편으로 많은 학자들을 山林에 끌어냄으로써 이들이 학문에 전념하면서 향촌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학자들은 결코 현실의 방관자는 아니었다. 이들은 오히려 자유롭고 비판자적인 위치에 있는 처사적 삶을 통하여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고, 자신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문인들을 양성하면서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는 한편 새로운 시대를 비하면서 학문적 축적을 이루어 나갔다.

  남명 조식(1501-1572)은 16세기의 시작과 함께 출생했으며, 사화라는 시대적 조건은  그의 삶의 궤적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處士의 삶을 선택하게 했다. 남명은 出仕 보다는 객관적이고 비판자적인 위치에 있는 처사의 삶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남명과 같이 처사의 삶을 선택한 학자들이 다수 존재했으며, 이들의 삶과 사상은 조선사회에 새로운 변화와 모색을 가져다 주는 활력소가 되었다. 이제까지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지면서 전형적인 奇人으로 평가받고 있는 토정 이지함(1517-1578)의 삶과 사상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토정의 학풍과 사상은 남명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글에서는 주로 남명 조식과 토정 이지함의 학문적, 정치적 인연을 중심으로하여 이들의 학풍과 현실관이 가지는 시대적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남명과 토정은 우선 기질이 비슷했다. 직선적이고 타협을 몰랐던 남명의 기질에 대해서는 ‘壁立萬 ’이나, ‘秋霜志氣’ 등의 용어로 대변되었는데, 이지함의 조카인 이산해가 이지함의 제문을 쓰면서 ‘千 壁立’이라 한 것에서1) 양인이 기질면에서 서로 비슷했음을 단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남명과 토정은 과거를 기피하고2), 저술을 즐기지 않았다는3) 공통점도 있다.

  조식과 이지함이 서로 교유하면서 남긴 일화는 『土亭遺稿』의 「遺事」를 비롯하여, 각종 야사류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지함은 南方을 유람할 때 은거 중이던 조식을 찾았으며4), 특히 조식이 멀리서 온 이지함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네의 風骨을 어찌 모르겠는가?’라고 한 표현에서 서로 존숭하는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지함은 觀象者가 찾아왔을 때는 조식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한다.6)
  천문, 지리, 의약, 복서, 병법 등 다양한 학문에 널리 해박하였던 조식 처럼, 이지함 또한 천문, 지리, 의학, 觀形察色, 神方秘訣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통하였다는7) 평가를 받은 것을 볼 때 양인은 학풍에서도 공통점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6세기초·중엽에는 士禍의 여파로 각 지역에 학문과 실력을 겸비했지만 出仕를 단념한 처사형 학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開城의 徐敬德이나 淸道의 金大有, 朴河淡, 晋州의 曺植 등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자성리학 이외에 노장사상이나, 불교, 무예 등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관심을 가진 점이 흥미롭다. 김대유, 조식 등 尙武경향이 강했던 학자들의 학풍이 진작된  경상우도에서 임진왜란 때 많은 의병장이 배출된 것 또한 학문과 사상의 전파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지함 또한 ‘豪傑’의 풍모가 있다는 평을 받았으며, 武를 상당히 중시하였다. 이지함은 포천현감으로 있을 때 문무를 겸비하는 인재의 양성을 주장했으며8), 그의 대표적인 문인인 조헌과 庶子인 이산겸이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에서 그의  이지함과 ‘武’와의 연결고리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지함의 서자인 이산겸은尙武정신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이산겸이 충청도 韓山에서 조헌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왜적을 토벌할 때에 ‘이 지역이 이지함의 고향이라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는 史官의 평가는9) 이 지역에서 이지함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암시해 주고 있다.

  조식과 이지함은 그 학문이 노장학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조식에게 노장적 경향이 있다는 것은 그의 호를 『莊子』에 나오는 용어인 ‘南冥’이라 한 것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이지함의 경우에도 그의 논설인 「大人說」이 ‘귀한 것은 관작을 얻지 않는 것 보다 귀함이 없고, 부유함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 보다 부유함이 없다’는  논리를 제시한 것으로,『노자』나 『장자』에 나오는 역설과 반어법을 주로 사용했다는 지적이 있다10). 이외에 李珥가 이지함에게 『莊子』와 맞먹을만한 책을 써 보라고 권유한 사례11)에서도 이지함이 노장서에 상당히 경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조식, 이지함은 당대에 영향력 있는 학자이면서도 주자성리학에만 경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이 현실세계를 떠난 학자임을 보여주는 징표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들의 학문과 사상이 그만큼 다양하고 개방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들이 당시 비판자적인 위치에 서서 자유롭게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했으며, 문인들의 양성을 통하여 광범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도 또한 이들의 학문적 능력을 수용했다는 점을 볼 때 이들의 학문과 사상이 결코 현실과 유리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식의 「단성현감사직소」나 이지함의 「포천현감사직소」가 당시 현실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그 대안을 철저히 제시한 것에서도 이들의 처세와 정세관이 철저히 현실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식과 이지함은 또한 중국의 성리학자 중에서도 북송대 성리학자들의 풍모와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식의 학문은 북송대 성리학자인 주돈이나 소강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鄭澔는 『토정유고』의 서문에서 소옹의 기인적인 측면을 이지함과 대비시켰다. 소옹은 이전까지 시대를 풍미했던 도교사상의 요소를 자신의 학문에 적극 흡수하고, 易學이나 象數學에 능통했던 학자로서, 서경덕의 역학이나 상수학도 소옹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많다.  주돈이, 장횡거, 소옹 같은 북송대 성리학자들은 그의 사상이나 행적에서 道家的 측면이 많는 평가를 받는다. 16세기의 성리학자 중에서도 서경덕, 조식, 이지함 등은 이러한 학자들의 학문경향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결국 조선시대 사상계에서도 주자성리학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북송대 성리학에 대한 주목이 있었으며, 서경덕, 조식, 이지함 등은 이러한 분위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대 성리학에 대한 관심은 당시 사상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표인 반면, 아직까지 주자성리학이 조선사회에서 완전히 정착되지 못한 상황을 보여준다. 결국 이황이나 이이의 등장은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고 그 이해가 심화되면서 북송대 성리학은 조선사회내에서 비판, 극복되고 주자성리학 중심으로 사상계가 정리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조식과 이지함 양인은 해안지역이라는 지역적 기반에서도 유사성이 발견된다. 조식은 처가인 김해에서 18년간 생활했으며, 이지함의 주된 근거지는 해안 지역인 보령이었다. 이것은 조헌이 상소문에서

  라고 하여 士禍의 여파로 지식인들이 은거의 삶을 택한 정황을 언급하면서, 조식과 이지함의 은둔처를 해안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조식의 김해에서의 생활은 왜구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강력한 대왜적토벌론으로 이어졌다. 조식의 문하애서 의병장이 다수 배출된 것에는 이러한 조식의 현실관이 큰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이지함은 자신을 ‘海上에 사는 狂珉’으로 표현했으며12), 그의 사회경제사상에서도 漁鹽 등 해상의 경제활동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사례가 많다.

  조식이나 이지함에서 보이는 해안적인 기반은 후대에 이들의 학풍을 계승한 이산해, 정인홍, 유몽인 등 북인 학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고 여겨지는데,  광해군대의 북인정권하에서는 농업경제 이외에 상공업적인 측면이 매우 중시된데는 이러한 사상적인 기반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보여진다.

  조식과 이지함의 학풍 형성에는 사화라는 시대적 배경이 중요한 요인으 작용하였다. 그러나 명종대 후반 이후 정국은 사림파들이 점진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16세기이후 사화라는 정치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은거를 결심한 학자들의 현실관은 이러한 정치참여의 시기를 맞으면서 크게 정치참여를 주장하는 부류와 여전히 은거를 고집하는 두가지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文定王后의 垂簾聽政이 끝나고 尹元衡 一派가 제거되는 명종대 후반 이후의 정국을 낙관적으로 이해하여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부류가 생겨나는 반면, 현실정치를 여전히 모순과 비리에 가득찬 것으로 파악하여 계속해서 은거를 고집하는 부류가 생겨난다. 선조대에 사림정치가 어느정도 정착되었을 때, 당시의 정치현실을 낙관적으로 보고 자신은 물론 문인들도 대거 정계에 포진시키면서 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시기라고 파악한 이황의 입장과,  당시의 정치현실을 여전히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救急’이라는 표현으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조식의 인식은13) 서로 다른 현실관과 이에 따른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보인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지함의 경우도 조식의 현실관과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이지함은 선조대에 李珥를 찾아갔다가 여러 학자들과 모여서 담소하는 기회를 가졌을 때 ‘지금의 勢道는 元氣가 이미 없어져서 손을 쓰거나 藥으로 구제할 길이 없다’고 하여14) 당시가 위급한 시기임을 지적하였다. 그가 적극적인 사회경제책의 실천을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현실인식이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후 이들의 학풍과 현실관은 시대의 흐름에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안정적으로 이해하면서 학문에 대한 깊은 천착이 요구하는 흐름이 대세를 이루어가고 학자도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학파를 중심으로 정파가 형성되는 조짐이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 즉 성리학에 대한 천착과 이론논쟁이 학문의 주류적 흐름이 되고 다수의 학자들이 붕당을 형성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나가면서 처사형학자들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졌다고 할 수 있다. 조식과 이지함의 현실관이 중앙의 정치현실에서는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한 원인도 이러한 시대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3

  조식과 이지함의 학풍은 주로 北人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政派로서 북인의 학문적 연원은 대개 자유로운 처사적 삶을 지향하면서 학문을 연마한 서경덕, 조식에게 두고 있으며, 대체로 북인은 학파로서의 결집성이 다른 당색에 비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북인이 학파로서의 결집성이 약했던 주된 이유는 그 주축이 되었던 인물들이 당시대에 다른 학자들에 비해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학풍과 기질의 소유자로서, 이들의 학풍을 계승한 문인들 또한 多岐한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정치에 참여하여 과단하게 정국을 이끌어간 정인홍,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리학의 이론이나 예학에도 충실했던 정구, 의병장으로 활약한 후에 道家에 깊이 심취했던 곽재우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문인들이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서경덕 문인에게서도 다기성이 발견되는데, 박순, 허엽과 같이 관료로 진출하는 부류, 민순과 같이 산림학자의 전형을 보이는 부류, 박지화, 이지함, 서기와 같이 方外人的인 경향을 보이는 부류 등이 대표적인 유형으로서, 이들 문인들의 행적을 통하여 조식이나, 서경덕의 학풍을 추론할 수 있다.

  이지함은 조식의 문인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573년(선조 6) 이지함은 鄭仁弘, 崔永慶 등 조식의 문인들과 함께 천거를 받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서, 특히 기축옥사의 핵심인물로 연루되어 처형을 당한 최영경과는 기질상으로도 잘 통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영경은 조식의 기질을 꼭 빼닮았던 문인으로 『燃藜室記述』에서는 그의 기상을 ‘壁立千 ’으로 표현하고 있다.15)

  이지함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적 기반으로 말미암아 서인계 인물과도 폭넓게 교유했지만 그의 학풍과 행적은 오히려 북인계 학자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 이것은 그가 북인 학통의 원류가 되는 조식, 서경덕과의 교유관계를 돈독히 한 것이나, 개방적이고 다양한 학풍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잘 드러나 있으며, 이발, 최영경, 이산해 등 후대에 북인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들과도 학문적 인연이 깊었던 점 또한 그가 북인학풍의 또 다른 연원임을 보여주고 있다.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들은 후대에 北人의 중심세력이 되고 사상적으로도 다른 당색에 비해 주자성리학에 덜 구속적이고 다양했다는 지적을 받는데, 이지함의 학풍에서도 이들과 유사성이 나타나는 점은 주목된다. 특히 이지함이 서경덕을 직접 찾아가 학문을 배운 것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조식과 교유한 것에서 이들간에는 학문적, 사상적으로 상통하는 측면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정치가인 李觀命(1661-1733)이 이지함의 諡狀을 쓰면서 ‘선생의 뜻은 花潭의 造詣高明과 南冥의 立志牢資 가히 伯仲이라 이를만하다’고16) 부분은 서경덕, 조식, 이지함의 긴밀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조식과 이지함은 16세기를 대표하는 처사형 학자로서, 이들의 학풍과 현실관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조선사회가 다양한 학자들이 공존하던 역동적인 사회였음을 엿볼 수 있다.

주)

  1. 『土亭遺稿』, 附錄, 「墓碣銘」, 接人則陽春闖 處己則千 壁立
  2. 『土亭遺稿』 권下, 遺事 不事科擧 喜不羈自放
  3. 『南冥集』, 권4,「學記跋」
    有言曰 程朱以後 不必著書 深以後學著書立言病焉
    『土亭遺稿』, 序
    先生平日 不喜著述 家藁所存 僅UU數編 此何足以窺先生之萬一乎
  4. 『眉앇장濡, 原集, 淸士列傳, 東山翁
      土亭公嘗遊南中 見南冥隱者
  5. 『土亭遺稿』 권下, 遺事
      先生着蔽陽子 服厄籠 徒步而求見曺南冥 侍者入告 南冥卽下階迎入 待之甚敬 先生曰何之非野人樵夫 而迎接至此耶 南冥曰 子之風骨 吾豈不知乎
  6. 土亭遺稿』 권下, 遺事
      觀象者一日晨叩先生之門曰 邇來少微星精薄已久 去夜星忽沈精 於君有災 故特來爲問耳 先生曰噫 吾何敢當是應 必於南冥曺處士有災也 未幾南冥亦卒
  7. 『土亭遺稿』 권下, 遺事
      先生聰明計慮 超越近古 泛濫諸家 不事雕 天文地理醫藥卜筮律呂算數知音 觀形察索神方秘訣之流 無不通曉
  8. 『土亭遺稿』 권下, 遺事
      又於縣學 欲兼文武之才 以備邦國之用 謨猷材調 隱然有孔孟之風度
  9. 『선조수정실록』 권26, 25년 11월 丁巳
      忠淸道韓山人李山謙 收趙憲餘兵討賊 山謙之馹戱枇也 以之翊빚 里徒之者多
  10. 李粃Ю 『土亭遺稿』 해제(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의 『李朝名賢集』4에 수록된 『土亭遺稿』) 참조. 참고로 대인설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土亭遺稿』 권上, 「大人說」
      人有四願 內願靈强 外願富貴 貴莫貴於不爵 富莫富於不慾 强莫强於不爭 靈莫靈於不知 而不知不靈昏愚者有之 不爭而不强懦弱者有之 不慾而不富 貧窮者有之 不爵而不貴微賤者有之 不知而能靈 不爵而能貴 惟對人能之
  11. 『土亭遺稿』 권下, 遺事
      萬曆戊寅三月 先生見栗谷 名士多會之 先生顧左右大言曰 聖賢所爲 頗作後弊 栗谷笑曰 有何奇談 乃至於此 願尊丈作一書 以配莊子
  12. 『土亭遺稿』, 권上, 「C抱川時上疏」
      伏以臣海上之一狂珉也
  13. 『南冥集』 권2, 「丁卯辭職呈承政院狀」
      伏念 主上徵召老民之意 非欲見微未殘敗之身 固欲聞一言 以補聖化之萬一 請以救急二字 獻爲興邦一言 以代微身之獻身 伏見邦本 分崩如沸如焚…
  14. 『土亭遺稿』, 권下, 遺事
      當今世道 如人元氣已敗 無下手救藥之路
  15. 『燃藜室記述』, 宣祖朝故事本末, 己丑黨籍, 崔永慶
      公壁立千 秋霜烈日 胸次灑落玉壺氷月 望之有若神仙其爲氣像風節 與曺南冥相伯仲
  16. 『土亭遺稿』 附錄, 諡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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