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논단

鄭寒岡과 李栗谷의
學問的 만남

최  영  성
(成均館大 講師)

  寒岡 鄭逑(1543∼1620)는 한국유학사에 있어서 독특하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강은 정통 도학파의 학문적 전통 위에서 이황·조식 이후의 ‘거유(鉅儒)’로 평가되는 데 머물고 말 학자가 결코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여느 학자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학문의 폭이 넓고 깊이가 있었으며, 순유(醇儒)이면서도 아울러 통유(通儒)의 체모를 갖추었던 것이다. 『중용』에서 이른바 ‘致廣大而盡精微’라 한 것은 그의 학문과 사상을 논할 때 적절한 말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예학자로, 성리학자로, 또 실학파의 선구로서 한국유학사에 있어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에게 있어서는 도학(道學)과 실학(實學)이 결코 양기(兩岐)가 아니요, 조금도 모순·대립없이 상호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는 沙溪 金長生과 함께 영남과 기호를 대표하는 조선 예학(禮學)의 량대 거장으로 평가를 받아 왔다. 현재 학계에서는 예학을 실학과 배치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거의 지배적인데, 사실 한강의 예학은 실학으로 연결되고 있어 두드러진 특징을 보여준다. 대개 선조 이전 명종 말기부터 사림들 사이에서 `古道回復'이 관심사로 대두되어 오다가 선조의 목릉성세(穆陵盛世)를 만나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이 때 고도(古道)의 회복을 학문에 있어 대명제로 삼아 이를 하나의 학풍으로 정초(定礎)한 학자가 바로 한강인데, 그에게 있어서의 `古'는 `原理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好古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復古改革'의 추동성(推動性)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학문 경향은 近畿地方에 전파되어 경세치용파 실학을 도인(導引)하는 연원이 되었으니, 그의 학문과 사상이 후세에 끼친 영향과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고 하겠다.

  한강은 당시 영남 유학의 양대 거벽(巨擘)인 퇴계·남명 양현에게 수학하고 `敬義夾持'를 실천유학의 지표로 삼았다. 이황 계열이 `敬'에 치중하고 조식 계열이 `義'的 部面에서 보다 두드러졌던 데 비해, 그는 어느 쪽에 치우침이 없이 시종 `敬義夾持'에 충실했던 학자였다. 이는 그의 「讀書帖」과 「養浩帖」이 상징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는 또 자신의 호매(豪邁), 강의(剛毅)한 체질에다 침잠(沈潛)을 중화시켜 독특한 학문 세계를 구축하였다. 이는 여느 학자들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점인가 한다. 李佑成 교수는 한강의 학문 연원과 학풍에 대하여, “원래 선생은 천성이 호매하여 체질적으로 南冥에 유사하였고 남명의 지려명행(砥礪名行)과 출처의리(出處義理)를 본받았지만, 선생의 학문 태도 내지 수양 방법에 있어서는 퇴계를 따랐던 것 같다. 말하자면 선생은 남명적 체질 위에 퇴계적 함양을 가했던 것이다(「寒岡全書解題」, 『寒岡全書』 所收)”고 평하였다.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학문 연원을 퇴계에게만 연결시킨 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지 않다고 본다. 한강은 친자(親炙)한 것으로 말하자면 퇴계보다 남명의 문하에 더 많이 出入하였던 듯하다. 후일 그를 퇴계 학통으로만 인정하고, 퇴계 문하의 적전(嫡傳)이라고까지 일컫기도 하는데, 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근자에 와서 이러한 인식이 차츰 시정되어 가고 있는 것은 자못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한강이 이황의 학문과 식견에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사실 기상(氣像) 뿐만 아니라 학문에 있어서도 조식의 영향이 적지 않았으리만큼 이를 몰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또 그가 퇴계·남명 양현의 학문을 자신의 학문 체계에 통합, 수렴하면서도 양현과는 다른, 나름대로의 독특한 학문 세계를 성취하였음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한강은 명체적용(明體適用)을 학문하는 지표로 하였고 박문약례를 학문 방법으로 하였다고 할 수 있다. 旅軒 張顯光은 「寒岡行狀」에서, “선생은 저 眞儒의 事業이 平實廣大하여 一節一藝로 이름을 얻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에 반드시 옛 성현의 全體大用之學을 追究하여 그것으로 準則을 삼고자 하였다(『旅軒集』, 卷13 所收)”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平實廣大' `全體大用'은 한강의 학문과 사업을 함축적으로 잘 나타내는 말이라 하겠다. 그의 학문을 體用論으로 해석할 때 `明體適用' 또는 `全體大用'이라는 말은 가장 적당한 표현의 하나가 될 것인데 體는 明道에, 用은 論事(救時)에 비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바로 道學과 實學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강은 영남의 퇴계·남명학파 학인들과 교제가 넓고 圓滿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栗谷 李珥, 牛溪 成渾 및 그 계열에 속하는 기호학파 學人들과도 善交를 맺었다. 일찍이 서인계의 澤堂 李植(1584∼1647)은 「示兒代筆」에서, 한강과 東岡 金宇샓?남명 문하의 高弟로 꼽고, 그 가운데서 한강을 ‘完人’이라고 평가하였다. 또 한강의 학문이 장현광에게로 계승되었으나, 장현광이 歿한 뒤 그 학통을 계승, 발전시킨 사람이 없어 영남의 학문은 여기서 그치게 되었노라고 평가하였다(『澤堂別集』 卷15, 「示兒代筆」). 이는 한강의 학문에 대한 기호학파 학인들의 견해를 대변한 것으로서, 최대의 찬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 南溪 朴世采(1632∼1695)는 평소 한강의 학문과 유학사적 위치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東儒師友錄』에서 퇴계의 문인 72명을 소개하면서 유독 한강만은 제25권 1권 분량을 할애하여 풍부하게 다룬 반면, 柳成龍·金誠一과 같은 高弟도 卷27에서 여러 문인들과 함께 다루었을 뿐이다. 이것은 비록 한강을 퇴계의 문인으로만 인식한 흠은 있지만, 한강의 학문적 위치를 퇴계 다음 가는 第一高弟로 인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박세채의 견해대로라면 한강은 명실공히 영남학파에서 퇴계·남명 이후의 第一人인 셈이다.

  이처럼 기호학파에서 영남학파의 鉅儒를 꼽을 때 한강을 퇴계에 버금가는 完人으로 인정했던 것은, 그가 당시에 心學과 禮學·經世學에 있어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이면에 있어 원만한 교유 관계도 적지 않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나라 儒賢 가운데 明道와 論事, 이론과 실천을 아울러 彬彬하게 겸한 이로는 단연코 율곡과 한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조선 후기 실학파는 율곡과 한강의 연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으리라 생각한다. 1980년대 이래로 실학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畿湖南人, 즉 經世致用派의 사상적 연원을 한강으로 보는 문제가 학계에서 수용되기에 이르렀고, 또 근자에 들어서는 한강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 남명으로부터 그 최초의 연원을 찾으려는 일단의 연구들이 제기되고 있어, 학계의 평가 내지 인정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나는 평소 한강의 실학과 율곡과의 관련성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막연하게나마 늘 이점을 생각해 왔는데, 어느 날 박세채의 『南溪集』을 읽고는 비록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내 나름대로 일단의 확증을 얻게 되었다.

  한강의 학문 성향은 선배이자 기호학파의 大宗인 율곡과 여러 면에서 상통하는 면이 있으며, 그의 실학사상 형성에는 율곡과의 사상적 교감이 적지 않게 介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가 율곡의 사후 ‘뒷일을 맡겠노라’고 自擬한 점이라든지, 율곡 계열의 서인 학자들과 친교가 깊었던 점으로도 방증할 수 있다.

  현재 『율곡전서』나 『한강집』을 보면, 兩賢의 학문적 교류 사실은 별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兩賢의 『연보』를 보면, 선배인 율곡이 한강의 학문과 재주를 매우 아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임금께 推薦하였으며, ‘격에 구애됨이 없이 녹봉을 지급하라(罷格給祿)’고까지 주청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한강의 학문과 인격을 그만큼 인정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박세채의 「記少時所聞」에 의하면, 한강이 만년에 이르기까지 율곡을 매우 존경하였으며, 사모하고 좋아함이 不淺하였다고 하며, 또 白沙 李恒福이 撰한 「栗谷神道碑銘」을 보고는 “문장은 좋으나 율곡의 학문을 형용함에 어찌 이리도 凡率함이 심하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것은 율곡과 한강 兩門에서 배운 石潭 李潤雨(1569∼1634)의 증언에 따른 것이다.

  한강은 율곡과 우계 성혼 사이에 전개되었던 栗牛往復論辨까지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으니, 일찍이 가까운 學友들과 함께 저 退溪·高峯 사이의 「退高四七論辨」을 『四七辨』이라는 2권의 책으로 엮어 繕寫하는 과정에서, 율곡·우계간의 ‘牛栗問答’을 添入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寒岡續集』 卷7, 「答金希玉」). 이는 비단 율곡의 성리학에 대한 관심만이 아니라, 그의 학문 전체에 걸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으리라는 시사를 주기에 부족하지 않다. 故 丁淳睦 교수는 한강의 성리설 一端에서 현실지향적 입각점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일찍이 한강은 ‘道在陰陽之先’을 주장하는 蔡節齋의 說과 ‘陰陽無始, 動靜無端’을 주장하는 葉平巖의 說 가운데 어느 것이 옳으냐는 張興孝(敬堂; 1564∼1633)의 질문을 받고 “葉氏說은 偶然한 것이 아니다”고 대답한 바 있는데(『寒岡集』 卷7, 「答問」; 『寒岡言行錄』 卷1, <講辨>), 이것은 한 마디로 ‘理先氣後’와 ‘理氣無先後’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하느냐 하는 문제와 같다. 정교수는 이에 대해, “道의 先驗性보다도 經驗性을 중시하는 것은 한강의 현실지향적 입각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近畿學派의 실학적 성격 형성에 작용한, 실학 연원의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寒岡 鄭逑의 敎學思想」, p.139)”고 하였다. 위의 짧고 분명하지 않은 문답을 가지고 유추하여 확대 해석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지 않을 터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강집』에 드물게 보이는 성리설 관련 문자에 따르면, 그의 입장이 대체로 퇴계보다도 율곡 쪽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위 질문에서 ‘理先氣後’보다 ‘理氣無先後’에 左袒한 것이라든지, ‘天地之性(本然之性)과 氣質之性이 본래부터 각기 所主가 있어 滾同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지나치게 分別하는 것보다 다만 主理·主氣의 구별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후자가 옳다고 한 것(『寒岡集』 卷7, 「答問」 참조) 등이 그 예이다. 이것을 율곡의 성리학과의 交感으로 관련시켜 보아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닐 듯하다. 그의 성리설과 실학적 성향의 관계성은 섣불리 推斷할 것도 아니지만, 간단히 보아 넘길 문제 역시 아니라고 본다. 면밀한 검토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은 비록 직접적인 교류는 아니라 하더라도, 율곡이 조정에 있으면서 평소 敬重하였던 德溪 吳健이나 또 함께 經筵官을 지내면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동강 김우옹 등을 통해 한강의 학문과 인품에 대하여 익히 들을 수 있었고, 또 우계 성혼의 문하에 從遊한 바 있는 한강으로서도 율곡에 대해 들은 바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율곡이 별세한 뒤 그의 季氏인 玉山 李瑀(1542∼1609)가 한강과 깊은 交誼를 가졌던 사실도 예사로 보이지는 않는다(『寒岡集』 卷9, 「與李季獻」 참조).  

  앞서 말한 이윤우는 한강과 동향인 星州 출신으로 처음에는 海州 石潭으로 율곡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자호까지도 율곡의 우거지인 석담(石潭)을 따서 지을 정도로 사모함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16세 때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한강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그는 이른 시기에 율곡이 별세함으로써 학업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율곡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친자하기로는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南溪集』 卷57,  「記少時所聞」). 따라서 율곡·한강 양문에서 수학한 이윤우는 양현의 학문 성향을 한 몸에 체득하여 일정한 가교적 역할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박세채는 한강이 甲申年(1584) 1월 19일 율곡에게 답서로 보내고자 작성한 수첩 한 통을 입수하고 이에 대해 발문까지 붙여 양현의 학문적 제회(際會)를 기렸는데(『南溪集』 卷68, 「跋寒岡先生甲申手帖」 참조), 이 서한은 율곡이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작성한 것으로, 비록 율곡이 별세함으로 인해 전달되지는 못했으나, 학문적 교류를 엿보기에 부족하지만은 않다(『寒岡續集』 卷2, 「答李叔獻」에는 註記가 없다). 여기서 그 全文을 살펴볼 여유는 없지만, 박세채의 말대로 그 歸趣를 요약하자면 대개 ‘正身의 功을 극진히 하여 應物의 道로 확대해 나아가야 된다’고  望 내지 勉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前揭, 「跋寒岡先生甲申手帖」). 成己成物, 즉 修身과 經世應用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엿보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학과 실학이 두 갈래가 아님을 보여주는 예는 16세기에 있어 기호학파에서 율곡, 영남학파에서 한강을 꼽지 않을 수 없는데, 이는 한강이 율곡의 卒後에 항상 ‘〔율곡이 못다 이룬〕뒷일을 맡겠노라(常以後事自擬)’고 스스로 견주었다는 사실(前揭, 「跋寒岡先生甲申手帖」)로도 짐작해 볼 수 있을까 한다. 율곡은 조정에서 경제적 시책의 설시(設施)에 주력하였거니와, 한강은 재야의 처지인지라, 시무에 관한 대책보다도 응용구시(應用救時)를 위한 일련의 저술에 힘썼으니, 나름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중요한 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쉽게 단언할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한강의 실학적 성향에는 율곡과의 학문적 교감이 적지 않게 있었을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앞으로 학계에서 이 문제에 대한 탐토(探討)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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