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南冥先生評傳 ○

제1장 생애-1. 誕生과 家系

이  상  원
(本院 硏究委員)

 

편집자주
  이번호 부터는 남명선생의 일대기를 자세히 소개하는 선생의 평전을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많은 관심으로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南冥 曺植은 조선조 연산 7년(신유, 1501) 음력 6월 26일 진시(辰時)에 경상도 삼가현 토동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安習이 한양에서 삼가현 판현으로 옮겨와 비로소 이곳에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彦亨이며 어머니는 仁川李氏 忠順公 李菊의 따님인데, 아버지인 언형과 숙부인 彦卿이 文科에 급제하여 가문이 크게 일어났다. 언형은 연산 10년(갑자, 1504) 4월에 시행된 別試의 문과시험에 丙科로 급제하였다.

  南冥이 태어나던 해, 어떤 術士가 선생의 외갓집인 삼가현 토동의 집터를 보고, ‘아무 해에는 꼭 성현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다고 전하는데 과연 그해에 선생이 태어났다. 또한 선생이 태어날 때 집앞에 있는 八角井이란 우물에서 무지개 같은 기운이 뻗어나와 산실(産室)에 가득하였다고 전한다.

  남명의 本貫은 昌寧이요 字는 楗仲이며 남명은 그의 號이다. 別號로는 山海, 方丈山人 등이 있으며, 謚는 文貞이다.

  그의 高祖는 殷으로 中郞將이며 高祖母는 郭氏로 현감 興仁의 따님이다. 曾祖 安習은 成均生員이며 曾祖母는 南平文氏 學諭 可容의 따님이다. 祖 永은 不仕했으며 조모는 趙氏로 감찰 瓚의 따님이다. 부는 언형인데 이 때 비로소 가문이 현달하였는데 언형은 입신하여 持平 宗簿寺正 承文院判校 成均館司成 通訓大夫이며 모는 仁川李氏로 충순위 이국의 따님으로 李夫人의 모는 通川崔氏로 漢城 少尹 敬孫의 딸이며 외조부는 좌의정 崔潤德이다.

  선생은 삼남오녀 중에서 次子로 태어났는데, 형인  은 요절하였고 弟는 桓이다. 선생은 외가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자라다 부친이 문과에 급제하자 벼슬길에 올라 한양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대략 7살 이전으로 추정된다.

  앞에서도 잠깐 보았듯이 선생이 태어나던 異蹟에 대하여 전하는 얘기가 이 지방에는 아직까지 口傳되고 있다.

  오늘의 산청지방 삼장면과 합천의 삼가면에는 선생의 탄생에 대한 두 가지의 구전을 채록할 수 있다.

  연산군 7년 신유(1501), 육월 이십육일 임인, 진시에 선생께서 삼가현 토동 외조부 충순위 이국의 집에서 났다. 선생의 증조부 생원 안습이 처음 삼가 板峴에 살았는데 先大夫 判校 彦亨이 이씨집에 장가 었다.

  처음 이씨가 토동에 살 무렵 어떤 術士가 집터를 보고 말하기를 ‘이 땅에 아무 해에는 꼭 聖賢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루는 부부가 같이 꿈을 꾸었다. 누런 龍이 한 마리 자기들의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그 뒤에 모부인에게 胎氣가 있었다. 용은 훌륭한 인물이 태어나거나 매우 좋은 일이 있을 때 움직인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도사가 말하던 그 해 6월에 선생께서 나시니, 생김새가 말끔하고 울음소리가 우렁찼다. 이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겨, 몸소 대나무를 불태워 밥과 국을 끓이면서 말하기를, ‘술사의 말이 맞았으니 曺氏家門이 昌盛하겠구나’라고 하였다. 세상에 말하기는 선생께서 날 때에 무지개같은 기운이 집 앞 八角井에서 뻗어나와 그 빛이 産室에 가득했다고 한다.(산청군 삼장면)

  남명의 부친은 창녕사람으로 正郞을 지낸 曺彦亨인데  처가에 머물러 있었다.

  어느 날 남명의 외조부가 바깥에서 어머어마한 꿈을 꾸고 서둘러 돌아왔다. 꿈 얘기는 남에게 하지 않아야 효험이 있는 것이라 해서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그 날 밤 작은 방에서 夫婦가 情을 나누면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는 現夢이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아들 내외를 그 방에 재울 생각이었으나 그의 딸 내외(南冥의 父母)가 차지하고 있었고 그날 밤에 남명이 잉태되었다고 전한다. 외가의 현몽을 옮겨받은 남명은 유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고 전한다.(합천군 삼가면)

  남명의 부친인 彦亨의 字는 亨之인데, 成化 기축년(1469)에 났다. 갑자년(1504)에 문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승문원 판교로 嘉靖 병술년(1526)에 별세하였다.

  공은 성품이 악한 것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여 세인들과 능히 어울리지 못하였다. 銓郞에서 執義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不起하였다. 姜渾과 竹馬故友로서 그 우의가 자라도록 쇠하지 않았다가 연산군 때 그의 소행을 보고 분하여 의리를 상하였다. 정묘 무진년간에 단천군수로 있을 때 강혼이 감사로서 군에 온다는 말을 듣고 치송하는데 가인에게 술 한통을 준비케 하니, 아전이 말하기를 “감사가 가까이 오고 있으니 예절을 마땅히 공손하게 맞이해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병을 핑계하여 날이 저물 무렵 감색 直領을 입고 짚신을 끌고 종을 시켜 술통을 가지고 上房에 나가 밖에서 부르기를,“渾이 어디 있는가”하니 감사가 문을 열고 영접하고 웃으며 말하길, “나 여기 있네”하니 공이 자리에 앉아 인사도 하기 전에 먼저 말하기를, “그대 날이 추우니 술을 마시려는가”하고 스스로 큰 잔으로 마시고 안주도 없었다. 혼이 역시 자작하여 세 순배가 돌았는데 공이 말하기를, “그대의 전날 행위는 개 돼지만도 못하니 그 나머지를 누가 먹겠는가. 그대 젊었을 때 총명하고 민첩하며 너그러워 가히 사귈만하다고 했더니 조그만 재주를 끼고 행동이 무상하여 이리 될 줄을 누가 알았으리요.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니 내 글을 보내 절교하고자 하였으나, 한 번 보고 책망하려 했는데 이제 그대를 보았으니 내 마땅히 날이 밝거든 떠나리라.”하고, 다시 한 번 마시고 연거푸 석 잔을 권하니 혼이 머리를 숙이고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명일에 공이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니 그 아들 植의 의기 격앙한 풍도가 역시 그 나온 바가 있어 그런 것이라 한다.(寄齋雜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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