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탐방기(2)

道 東 書 院

한   상   규
(本院 常任硏究委員)

  도동서원은 경북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서원으로 1605년(선조3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寒喧堂 金宏弼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한훤당은 東方五賢(金宏弼, 鄭汝昌, 趙光祖, 李彦迪, 李滉)의 한 분으로서 한국 유학의 사림파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도동서원은 1607년에 ‘道東’이라는 사액을 받아 국가의 공인을 받았으며, 1678년(숙종4)에 寒岡 鄭逑를 추가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대원군 서원철폐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964년 서원을 전면보수하였는데, 경내의 건물로는 祠堂·中正堂·居仁齋·居義齋·水月樓·喚主門·內三門·藏板閣·庫直舍 등이 있다. 강당 사당 부장원은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으로 된 사당에는 한훤당을 주벽으로 하여 정한강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한훤당의 사위가 한강의 조부), 장원이 부속되어 있다. 거인재와 거의재는 각각 동재 서재로서 유생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서원 안 북쪽에는 樂皐齋라는 교육시설이 있고, 거의재 담 밖에는 養蒙齋의 遺址가 있는데, 이는 小學童子로 자처하면서 『소학』을 독서하던 곳이다. 서원 문 앞 동편에 旅軒 張顯光선생의 묘소가 있으며, 묘갈문은 東溟 金世濂선생이 썼다. 도동서원이 창건될 당시는 비슬산의 두 계류가 합쳐진 곳에 자리하여 雙溪書院이라는 사액을(1568) 받았으나 임란 때 불에 타버렸으므로 1605년에 중건한 것이다. 그 후 배향 인물로 숙종 4년(1678) 정한강을, 인조 12년(1634)에 별사를 두고 裴紳, 곽율, 원개를 향사한 바 있다.

  경현록에 의거하여 선생의 가계와 행적을 살펴본다.

  선생의 선대는 본시 황해도 瑞興府인데 뒤에 현풍현으로 이거하였다. 9세조 寶는 고려조에 관직을 지냈고 7세조 天祿 때 서흥군에 봉해졌다. 曾祖 때 와서 조선 개국과 동시에 과거에 올라 사헌, 사간원에서 문명을 떨쳤다. 아버지는 무과에 올라 어모장군 사용으로 군무에 종사하였다. 무과 급제무렵 당시 중추 원부사로 있던 韓承舜의 딸과 혼인하였다. 선생은 1454년 5월25일 출생하여 1472년 순천 박씨와 혼인하였다. 처가집은 합천 야로 말곡남교동인데 이곳에서 거처할 때 서실을 한훤당이라 하여 선생의 자호가 되었다. 뒤에 돌아와 현풍현 솔례촌 대니산 아래에 살았으며, 1480년 생원시에 급제하였는데 일찍이 점필재 金宗直 문하에서 수제자로 인정 받았다. 이 때 점필재 선생이 『소학』을 가르치면서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려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되니 光風霽月도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후부터 선생은 소학으로써 몸을 다스리고 성인의 자질을 스스로 닦아가려고 하였다.

  선생의 가학예절과 학업정진에는 어머니의 엄격한 성품과 곧은 예법에 있었다. 선생이 새벽마다 문안하여 마루 아래에서 절을 올렸는데, 혹시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치못하면 얼굴빛을 엄정히 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때마다 선생은 두려워하여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서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더욱 공경하며 효성을 다해 기뻐하는 기색이 보이면 물러갔다. 선생은 항상 초립을 쓰고 연밥으로 엮은 갓끈을 달고 다녔으며, 한 밤중에도 책을 마주 대하며 독서에 전념하였다. 학문이 어느 정도 도달하자 후학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것을 임무로 여기면서부터 원근에서 배우러 오는 자가 줄을 이었다.

  특별히 일두 정여창과 친밀하였다. 선생은 1494년에 유일로 추천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고 이어서 군자감 주부,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이후 연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점필재의 문인이라 하여 희천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무렵 선생의 어머니가 왕에게 글을 올려 잠시 집에 다녀갔고, 가까운 순천으로 귀양지를 옮겼다.

  어머니 한씨의 모정이 선생에게는 특별하여 왕에게 두 번이나 글을 올려 뜻을 이룬 사례는 조선조 역사상 거의 드문 일이라고 생각된다. 1504년 10월 51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았다. 이로써 가산이 몰수 당하고 아들 둘이 귀양갔으나 중종반정 때 모두 방면되었다. 선생의 문인으로 趙光祖, 金安國, 金正國, 李延慶, 鄭鵬 등 다수가 있으며 그 아래 李珥, 成守琛, 金麟厚, 徐敬德 등 한국유학의 도통을 확립한 대표적인 인물들이 한훤당 선생으로부터 나왔으니 가히 한국 유학의 정맥을 이룬 것이다.

  선생은 1507년 도승지로 증직되고, 1517년 우의정으로 증직, 1575년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시호를 文敬이라 하고, 1610년 문묘에 從祀하니 오현 가운데 선생이 수위이다.

  매년 2월 中丁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소장전적은 하사서적인『춘추』10권, 『오경백편』 5권, 경현록 등 95종 529책이 있다. 그 밖에 하사 제기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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