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1
남명학파 고문헌 소개(7)

『松溪先生實紀』

김  경  수
(본원 사무국장)

1. 저자 및 간행경과

  上下 2권 1책의 목판본으로 된 『송계선생실기』는 조선중기 밀양의 處士 송계선생이 남긴 몇 편의 글과, 다른 자료들에서 뽑은 선생과 관계된 글들을 묶은 책이다.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선생의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고려의 개국공신 신숭겸이 그 비조이다. 선생은 연산군 5년(1449) 12월 27일에 부친 탁(倬)과 군수 손순무(孫荀茂)의 따님인 모친 일직(一直) 손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으니, 남명선생보다 2년 먼저이다. 字는 자함(子?이고, 자신이 지은 호는 석계(石溪)인데 돌아가신 후에 후학들이 송계라는 별호로 추존했다.

  11세 되던 해부터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일찍부터 과거에 뜻을 끊고 오로지 성현의 학문에 전념했다. 18세에 찰방 이철수(李鐵壽)의 따님 홍양 이씨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두었으며, 서자를 하나 두었다.

  32세 되던 해에 남명선생이 김해에 산해정을 짓고 정착하자 이때부터 왕래하며 도의로써 서로 사귀었는데, 당시에 대곡 성운, 청향당 이원, 황강 이희안 등이 산해정에 모여 학문을 강토하고 『산해회강록』을 지으니, 화담 서경덕은 이 소식을 듣고서 ‘하늘의 덕성(德星)이 다 모였다’고 하였다. 또한 선생을 만난 후 평소 사람을 인정하는데 인색했던 남명선생이 높이 평가하였으며, 후에 동계 정온은 ‘송계선생, 남명선생, 황강선생을 세상에서 영남삼고(嶺南三高)라 칭한다’고 하였다. 47세에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 후 50세, 53세, 63세 때에도 조정에서 부름이 있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처사로서 생을 마쳤다.

  한편 선생은 48세 때에 불행하게도 장남을 잃고서 세상에 허무를 느껴 재악산(載岳山)의 금강암(金剛庵)으로 들어가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몰두하다가, 12년 뒤인 59세 때에 제자들의 청으로 돌아와 석계변에 松竹을 심고 초옥을 지어 석계정사라 이름하고서 책을 벗삼아 지냈다.

  명종 17년(1562) 5월 21일에 유언으로 관직명을 쓰지 못하도록 하고, 자손들에게 孝友를 당부하는 유서를 남기고 조용히 운명하니, 향년 64세였다.

  선생의 학문은 『소학』과 육경으로 근본을 삼아 독실히 행함을 귀하게 여겼으니 이는 영남학파의 학문적 연원을 이은 것이며, 남명선생과 더불어 강우학파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그 공부는 30세 이전까지는 침구가 없이 늦도록 글을 읽다가 잠시 책상에 업드려 잘 뿐이었고, 그 후에도 잠깐씩 자리에 누울 정도로 독실하였다. 특히나 59세 이후 석계정사를 지은 다음에는 작은 병풍 두 폭을 만들어 손수 ‘경이직내 의이방외(敬以直內 義以方外 : 경으로써 내면을 바르게 하고, 의로써 바깥을 반듯하게 한다) ’라는 글을 써두고 좌우명으로 삼았다. 이는 남명선생이 산천재의 창벽간에 敬과 義를 써 두고서 ‘이는 吾家의 日月이다’라고 한 것과 비추어 보면, 두 선생의 학문적 교류와 사상적 일치성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선생은 당대의 은일 명유들인 동주 성제원, 소요당 박하담, 청송 성수침, 갈천 임훈, 일재 이항 등과 종유하였으며,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박재(璞齋) 김유(金紐), 성암(省庵) 송유경(宋惟敬), 낙천(洛川) 배신(裵紳) 등이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14년 후 부사 김극일이 ‘閭表碑銘’을 지어 碑를 세우고 비각을 지어 선생의 학덕을 기렸다. 또 광해 8년(1616)에 사림에서 선생을 신산서원에 남명선생과 병향할 것을 청한데 대한 윤허를 얻어 신산서원에 봉안하여 향사를 드렸는데, 이 서원은 고종 때 훼철되어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인조 15년(1637)에 선생을 예림서원(禮林書院)에 봉안하였으며, 이 서원은 현종 10년에 사액받았는데, 지금도 밀양시 북부면 후사포리에 있어 향사를 드리고 있다.

  한편 『송계선생실기』의 편찬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인조 2년(1624)에 증손인 영몽(英蒙)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선생의 문자들을 여러 곳에서 수습하여 『실기』의 상권을 편찬하였다. 이후 책에 포함할 내용들을 수습하면서 발문을 여러 사람에게서 받았는데, 1805년에 쓴 송환기의 발문, 1809년에 쓴 김굉과 이우의 발문이 있고, 발문의 처음에 1815년에 쓴 정종노의 것이 있으니, 이 책이 간행된 시기는 1815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서 첨가할 것은 후에 이 책의 뒤에 補遺를 붙혀 추가로 간행한 것도 있다는 사실과, 또 이들을 합집하여 영인하고 앞에 국역주해를 붙인 『송계선생실기』가 1990년에 경북대학교부설퇴계연구소에서 간행한 본이 있어 후학들이 선생의 학문과 사적을 공부하는데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체재 및 내용상의 특징

  이 책의 첫머리에는 「송계선생실기목록」이 있고, 이어 「송계선생세계도」가 있는데 선생은 시조인 숭겸으로부터 19세손으로 밝혀져 있다.

  『실기』의 상권 첫 부분에는 책의 편집방침에 대한 설명이 있으니, 큰 골격은 『敬賢錄』의 체재를 따랐으나 내용상 맞지 아니한 부분은 일두 정여창의 『文獻公實紀』에 맞추어 바로 잡았다고 되어 있다. 다음은 누구의 서술인지도 모르고 내용도 미비한 「事實」이 있고, 이어 문인 김유가 지은 「行狀」이 있다. 이어 배신이 지은 「행록」이 있는데, 그는 뒤에 남명선생의 「행록」을 짓기도 했다. 다음은 선생의 일화를 소개한 「遺事」와 선생의 인물됨을 형용한 여러 글들을 모은 「敍述」이 있는데, 많은 내용이 남명선생과 관계된 것으로써 두 선생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다음은 선생이 직접 쓴 글들인데 「拾遺」편으로 묶었다. 먼저 앞뒤가 결락된 「輓三足堂」이 있고, 다음은 둘째 아들 有安에게 보낸 편지인데 내용은 부인의 장례에 대한 절차를 말하고 있다. 이어 부친의 墓表가 있는데 집안의 내력만을 간단히 기술하여 수식을 피하는 간결한 성격을 엿보게 하며, 다음의 「참판김공묘갈」도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다음은 문인 송유경을 훈계한 「戒宋正郞 惟敬」이란 글인데, 내용은 ‘敬과 省 두 글자는 잠시도 잊어서는 안되며, 昏과 昧 두 글자는 종신토록 큰 병이니 모름지기 힘쓰고 힘쓸 것이라’고 하였다. 상권의 마지막은 자손들에게 조상의 유업을 받들고 우애를 지킬 것을 당부하는 「遺書」가 있으며, 그 아래에 증손인 영몽의 『실기』 수습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 부기되어 있다.

  하권의 첫머리에는 문인 김유가 찬한 「師友錄」과 이에 대한 부기가 있다. 다음은 생원 朴壽宗과 正言 吳長이 선생을 신산서원에 남명선생과 병향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인「請幷享新山書院疏」가 두 편 실려있으니, 선생의 학문과 남명선생과의 돈독한 관계를 자세히 담고 있다. 그 아래에 조정에서 이를 검토하고서 윤허한다는 내용의 「禮曹回啓」가 있다.

  다음은 예림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내용의 상소문과 이를 윤허한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 뒤에는 선생에게 벼슬과 시호를 추증할 것을 청한 상소문이 진사 愼寅龍과 참판 申思建의 이름으로 두 편 있는데, 앞의 것은 의논 중에 영의정이 참석치 않아 결정되지 못했으며, 뒤의 것은 당시 조정에 일이 많아 윤허를 얻지 못했다고 작은 글씨로 부기되어 있다. 다음은 금계 황준량의 「만장」과 장음정 나식의 「제문」, 학사 김응조와 한사 강대수의 「성묘문」이 있다. 이어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여표비, 신산서원, 예림서원 등의 제문과 告由文, 그리고 축문이 실려 있다. 그 뒤에 부사 김극일이 지은 「閭表碑銘 幷序」가 있고, 뒤에는 여헌 장현광과 윤급의 「여표비중건발문」이 이어진다.

  그 다음 남명선생이 직접 지은 「묘갈명」이 있는데, 그 앞 부분에서 삼족당 김대유의 죽음에 이어 동주 성제원과 황강 이희안이 죽었고 또 청송 성수침이 죽었는데, 삼족당과 황강의 묘갈명을 이미 쓰고서 다시 송계의 묘갈을 쓰게 됨을 슬퍼하고 있다. 하권의 끝에 남계 임희무의 「詩章」이 붙어 있다.
  부록으로 발문이 네 편 있어 선생의 학덕을 칭송하고 책 편찬의 경위를 설명하고 있는데, 선생이 남긴 글은 비록 이 한 책의 작은 분량이지만, 이 속에서도 선생의 인품과 학덕을 충분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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