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연원 사숙 인물고
來庵門人③

无悶堂 朴絪

사  재  명
(경상대 강사)

  박인(朴絪, 1583-1640)은 선조 16년 계미(1583; 황명 신종황제 만력 11년) 12월 6일 갑인 진시에 야로현 우거촌(일명 우계촌, 현 야로면 하림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관향은 고령(高靈)이고, 자는 백화(伯和)이며, 호는 스스로 임헌(臨軒)이라고 하였다가 인조 15년(1637, 정축)에 뜻한 바 있어 무민당(无悶堂)으로 고쳤다.

  중시조인 환(還)을 1세로하여 2세인 동신(東臣)은 고려조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내고서 11세손 윤빈(允斌)은 신령현감(新寧縣監)을 지냈으니 5세조이다. 고려 관(寬)은 기자전(箕子殿) 참봉이고 증조 순신(舜臣)은 군자감 주부(軍資監 主簿)이다. 조부 충노(忠老)는 일찍 별세하여 드러나지 아니하고 선고 수종(壽宗)은 용사(龍蛇)의 난에 창기하여 의진(義陣)에 참여한 창의장이며 성균 생원이다. 어머니는 강우의 문한가로 알려진 서산인 정건(鄭健)의 딸이었다.

  박인은 남명선생의 고족(高足)이면서 강우사림의 종장인 외종숙 내암 정인홍(1535∼1623)선생 문하에 입문하여 고고탁절한 기상과 ‘敬義之學’의 요체를 탐구하였으며, 당시 내암의 명성을 듣고 모인 문하생들과 종유하기도 하였다.

  박인의 생애와 사상은 『무민당선생문집』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으며, 『무민당선생문집』은 시문집으로서 9권 5책(「본집」 7권 4책, 「별집」 2권 1책)으로 된 목판본이다. 이는 1789년(정조 13) 사림파 5대손인 성림(聖林) 등이 편집·간행한 것이며, 문집구성은 다음과 같다.

  권두에는 정종로의 「서문」이 있고, 「별집」의 권말에 성림의 「발문」이 있다.

  본집 권1에는 「세계도」,「연보」,「시」 122수가 있으며, 권2·3에는 「서」 68편이 있다.

  권4에는 「序」4편, 「記」4편, 「說」4편, 「잡저」3편, 「제문」7편, 「묘비명」1편이 있으며, 권5에는 「남명선생언행총록」과 「남명선생연보」가 있다.

  권6·7에는 부록으로 「만장」29수, 「제문」16편,「행장」2편,「묘갈명」·「묘지」·「용연서원상량문」·「이건시상량문」·「봉안문」·「상향문」·「이건후상향문」 각 1편이 있다.

  별집 권1에는 「제영」55수,「언행총록」·「용연서원청액소」 각 1편이 있으며, 권2에는 「사우록」·「문도록」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3세 때(1585, 을유) 박인은 어머니를 잃고 재종조모 형씨(邢氏)의 보살핌으로 자라났다.

  5세 때(1587, 정해) 자질과 기량이 고요하고 묵중하며 행동거지가 변함이 없었고, 생원공이 기특히 여기고 사랑했다.

  7세 때(1589, 계축) 처음으로 입학하여 글을 읽었다. 선생이 글을 읽음에 품성이 정미하고 영특하여 어려서부터 성인의 거동이 있었다.

  10세 때(1592, 임진) 능히 문장을 지어내는 비범한 면모를 보였다. 이 때는 왜놈들이 침략하여 항복하는 자가 많았는데, 선생은 나라 사람의 왜놈됨이 점점 많다하니 유수찬 중룡(仲龍)이 보고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시의 뜻이 깊고 머니 다른 날에 성취함을 가히 측량치 못한다’고 했다.

  11세 때(1593, 계사) 생원공을 따라 성주로 가서 왜놈을 물리쳤다. 이 때 중국 사람이 선생을 보고 뜻이 호걸하고 매진함에 평생 글읽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17세 때(1599, 기해) 고향에 돌아와 글을 읽었다. 이 때 병화로 서적이 탕진하고 曾史에 사권을 얻어 읽었다. 한 권을 다 읽고 문리가 통하여 『논어』와 『맹자』는 다만 의심나고 어려운 곳만 물었다고 한다.

  18세 때(1600, 경자) 힘써 배우고 문장이 능숙하여 과거에 통했다. 선생이 학문에 전력하고 의리를 연구하여 밥먹기를 잊어버리듯 하였으며, 뭇 서적을 차례로 해독하여 문장을 지음에 이름이 더욱 드러났다.

  20세 때(1602, 임인) 명문 순천인 毅愍公 朴而絢(贈 工曹判書)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8남매를 두었다.

  21세 때(1603, 계묘, 선조 36년) 생원공이 생원복시에 합격하니 선생이 처음으로 과거에 나아갔다. 8월 임란 때 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한 덕천서원에 남명선생과 최수우당의 위판 봉안 때 처음으로 남명학파의 회합에 참가하였다.

  22세 때(1604, 갑진) 고을시험에 합격했다. 선생이 일등이 되었으나 제2에 남궁에서 낙방되었다. 비록 선고의 권유로 향시에 응시하여 4차례나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과업을 일삼지 않았다. 나중에는 어버이의 허락을 받아 순수한 학문 연구에 매진하였다.

  25세 때(1607, 정미) 겨울에 용강(龍岡)촌에 복거했다. 선생이 용강촌에서 복거하고 서실을 잠실(潛室)이라 이름하였다. 그는 이곳을 『주역』 읽는 곳으로 삼고, 구도하는 데 몰두하였다. 새벽에 일어나서는 문안하고 물러 나와 잠실에 거처하였으며, 해가 저물도록 꿇어 앉아 글을 읽고 침잠하였다. 이 해에는 내암이 남계(먏?·덕산(德山)·향천(香川)  세 서원의 산장(山長)이 됨으로써 우도 사림의 종장으로서 위치를 확고하게 된 시기였다.

  27세 때(1609, 기유, 광해1년) 봄에 고을 시험에 합격했다. 일찍이 선생이 구도하는 뜻이 있어 억지로 과거에 응한 것은 어버이를 위한 것이었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뜻이 없었다. 남명선생의 시 중에서 “티끌 흙이 오장 속에 나면, 지금 곧 배를 따개어 흐르는 물에 씻으리라”는 글귀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생원공에게 과거 폐하기를 청하였다. 생원공이 그 결단을 가상히 여겨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성경(聖經)에 잠심하여 몸을 위하는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28세 때(1610, 경술) 임헌(臨軒)이라 자호하였다. 이 호는 『주역』 「臨卦」에 “대개 군자가 가르치는 생각은 무궁하여 백성을 보존함이 가이 없다.”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시를 지어 20년 전의 일을 돌이켜 생각하니 부질없이 귀황을 쫓아 평생을 그르쳤다고 하였다.

  29세 때(1611, 신해) 봄에 향약법을 시행했다. 3월에 문묘종사 문제로 남·북인간의 대립이 심각해졌다. 나중에 『산해사우연원록』의 간행이 지연된 것도 당시 대북에 동조하여 오현의 종사를 반대했다는 것이 구실이 되었다.

  30세 때(임자, 1612) 가을에 덕천에 가서 남명선생 사우(祠宇)와 묘소를 배알하고 두류산에서 놀았다. 그가 남명선생을 존모하여 유적을 찾고 두류산에 놀면서 법계사에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겨울에 『근사록』을 읽고 시 한수를 지었다.

  31세 때(1613, 계축) 겨울에 정인홍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시 박인은 내암의 외척이자 동향인 이었으며, 존중한 명망을 지고 있었으므로 내암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이 때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대비를 폐할 것을 꾀하니, 박인은 내암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불가함을 말하였다. 박인은 당시 계축옥사가 일어나고 우의정의 소명을 받은 내암에게 영창대군의 신구 주청을 품신하기도 하였으며, 내암은 6월과 10월, 11월의 3차례에 걸쳐 영창대군 「신구소」를 주소하고, 15차례나 사직소를 올림으로써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32세 때(1614, 갑인) 겨울에 내암에게 편지를 보냈다. 동계 정온(1569∼1641)이 일에 대하여 정직하게 말하였다가 큰 화에 빠지게 되자, 박인은 글을 보내어 그를 구원할 것을 지극히 말했다. 동계 정온이 「갑인봉사소」를 옹호하는 통문을 돌리므로써 문인간에 분열이 생겼다. 박인은 내암에게 글을 보냈고, 또한 이이첨의 무리가 간사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인륜을 폐하여 법도를 문란하게 함을 피력하였다. 그러자 그는 뭇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으나 조금도 걱정하지 아니하고 태연하였다. 원근에서 이것을 보고 탄복하여 우러러 사모하는 자가 많았다. 강대수(姜大遂, 字 學顔, 號 寒沙; 1591∼1658)에게 글을 주었다. 또한 한사가 일을 말하다가 회양(淮陽)에 귀양가게 되니, 그가 글을 주어 힘쓰게 했다.

  34세 때(1616, 병진) 북인이 투서하여 공척함을 입었다. 고령 사림에서 통문을 보내와 성토당했다. 영창대군의 죽음에 관련된 정온의 항소는 당시 정국에 커다란 파문이 일게 되었고, 그를 신구하는 문제와 관련해 권력지향적인 소장문인들과 맞서 대북에서 이탈한 중진세력이 이른바 중북화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폐모론에까지 이어졌던 것으로 나타났다.

  37세 때(1619, 기미) 정월에 생원공의 상사를 당했다.

  40세 때(1622, 임술) 용강 잠실에 있었다. 선생이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단정하게 앉아 어깨와 등이 솟고 곧아서 마치 그림과 목상 같았다. 종일토록 글을 보아서 성경과 현전을 모두 연구하여 『중용』과 『대학』을 더욱 좋아하여 손수 한부씩 써서 외우고 완색했다. 가을에 두류산에 놀았다.

  41세 때(1623, 계해, 인조 원년) 봄에 서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인조반정으로 내암이 억울하게 처형당했다. 이로부터 그는 전일에 있었던 스승 내암에 대한 시비를 말하지 아니하고, “의견이 다름으로써 지나간 허물을 나무라리오. 좇아서 미워하면 군자가 사람을 대접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겨울에 고산정사(孤山精舍)에 가니 하홍도(河弘度, 字 重遠, 號 謙齋; 1593∼1666)가 와서 찾았다. 고산은 정훤(鄭暄, 號 學圃; 1588∼1647)의 정사인데, 겸재가 박인의 이름을 많이 들었으므로 와서 찾은 것이다.

  42세 때(1624, 갑자) 유일 천거에 들어갔다. 인조가 반정한 뒤에 유일을 구하니 이윤우(李潤雨, 字 茂伯, 號 石潭; 1569∼1639)가 제일가는 사람으로 박인을 천거했다. 이 해에 영모재(永慕齋)를 낙성했다. 생원공이 일찍이 조동(釣洞)에 정자를 세우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했고, 이제 와서 선생이 그곳에 정자를 지어 영모재라 하고, 장서감을 존경감, 외방을 양정당이라 하였다. 그리고 경의 삼성(三省), 사물(四勿), 사무사(思無邪), 신기독(愼其獨), 용잠구연(龍潛九淵), 봉상천인(鳳翔千 ), 천균기력(千勻氣力), 만장광염(萬丈光焰) 등의 글자를 써서 걸었으며, 『성리대전』 중에 요긴한 말을 벽에 써서 붙이고 깊이 연구하여 가절에 사우로 더불어 술을 싣고 배를 타고 시내 못 사이에 연소하여 놀았다. 가을에 조임도(趙任道, 字 致遠, 號 澗松; 1585∼1664)가 방문했다. 겨울에 장렬공(壯烈公) 박영서(朴永緖)를 조문했다.

  43세 때(1625, 을축) 여름에 조간송의 글에 답장했다. 간송의 글에 “노형이 일찍 과거를 하직하고 문을 닫아 뜻을 구하여 성경과 현전에 전심하여 연구하고 옛 사람의 행실과 말씀을 몸에 돌이켜 실천하니, 이것이 임도가 추종하여 가르침을 받고저 하되 길이 멀어서 종유하기가 쉽지 아니하고 한갓 북두칠성 같은 바램만 부지런하고 봄바람 같은 좌석을 가까이 못한다”고 하였다. 가을에 선생이 꿈에 한 글귀를 얻었다. 즉 “오랑캐의 말이 지금 한강물을 엿보니 이는 당나귀가 죽도록 화산에서 늙는다”고 했다. 명년 정묘에 한 이의 계병이 국경을 침범하니 선생이 탄식하되 “난리가 나기전에 징조가 먼저 보이니 지극히 신령한 것이 어찌 마음이 아니리요. 내가 암혈에서 늙어 죽을 것을 여기서 안다”고 하였다.

  44세 때(1626, 병인)에 남계 이중무(枏溪 李重茂)의 편지에 답장했다. 이 때 동계가 경상도 감사가 되자 선비들이 한훤당의 서원을 군북 지동암(志同岩)에 건립하고자 하여 남계가 편지하여 의논하니 무민당이 답장했다.

  45세 때(1627, 정묘) 봄에 북노(北虜)가 의주(西鄙)를 침범하여 임금이 강도에 피난했다. 태학에 올라 천거를 행했다. 우복 정경세(字 경인)가 전랑이 되어 선생의 행의가 높고 일을 미리 아는 소견이 있다함을 듣고 험난을 당하여 고치지 아니하고, 도를 지키어 즐거워함으로써 천거했다. 영모록을 이루었다. 이흘(李屹, 字 山立, 號 蘆坡; 1557∼1627)을 조상했다.

  46세 때(1628, 무진) 봄에 덕산에 가니 칠원 조차마(漆源 曺次磨; 1557∼1639)가 남명선생의 「연보」와 「사우록」을 부탁했다. 신도비의 비문을 내암에게 청하였으며, 내암이 정형(正刑)되었을 때는 정온과 상의하여 시신을 걷어 매장하였다고 한다.

  47세 때(1629, 기사) 가을에 벽연재(壁淵齋)를 낙성하고, 다음해 5월에는 사옹원(司饔院)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49세 때(1631, 신미) 수암 유진(修巖 柳袗, 西厓의 셋째 아들, 1582∼1635)이 합천 군수로 부임하여 동왕 11년까지의 재임기간 동안 『西厓集』의 간행을 추진하였다. 수암은 도임하자 스스로 무민당을 찾아와서 道義之交를 맺고, 재임 중 군민들이 일으킨 고의적인 재난에 직면할 때마다 무민당과 상의해서 자신의 진퇴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50세 때(1632, 임신) 7월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51세 때(1633, 계유) 봄 용연재(龍淵齋)를 낙성했다. 덕산을 방문하여 조모정(曺慕亭)과 만나 「남명선생연보」와 『산해사우연원록』의 저술에 대해 논의했다. 『산해사우연원록』의 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해 정동계(鄭桐溪)가 용암서원(龍巖書院)의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52세 때(1634, 갑술) 정동계가 거창의 용천정사(龍泉精舍)에 있을 때 연하장을 보냈다. 그 연하장에는 남명학파의 명맥을 유지 계승하고 있는 인물을 동계(桐溪)로 보았으며, 남명에 대한 세간의 시의에 굴하지 않았다. 또한 그 도학의 순정함을 변호 홍보하기 위해서는 남명의 교우나 문인들이 모두 당시의 현인 군자였음을 알리는 『師友錄』을 편찬해서 보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하였다.

  53세 때(1635, 을해) 『주역』 64괘와 「태극도」를 직접 기록했다. 가을에 회연서원(檜淵書院)을 배알하고 입암(立岩)에서 놀았다.

  54세 때(1636, 병자) 2월 혼신의 노력으로 『산해사우연원록』을 탈고하여 정사(淨寫)를 마쳤다. 그 후에도 수정 작업은 계속되었지만, 훗날 간행에 이르기까지는 무민당 사후 우도 유림의 동향으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때 무민당은 안질(眼疾)에다가 8∼9년전부터 산증(疝症)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특히 지난 겨울부터 병세는 더욱 심각하여 작업에 커다란 지장을 주었으며, 출입에도 부자유스러웠고 4년 뒤 세상을 떠나는 원인이 되었다. 12월 북노가 서울을 침범함을 듣고 선생이 의병을 일으켜 동생 위(緯)에게 부탁하여 의장의 처소에 보냈다.

  55세 때(1637, 정축) 정월 조정이 북노와 더불어 강화함을 듣자, 삼전도의 국치 후 당명을 고쳐 무민당(无悶堂)이라 하고 문을 절호문(節戶門)이라 하였다. 무민당이라는 말은 정묘·병자·재차의 호란 끝에 정월에 인조가 삼전도에서 수강단(受降檀)을 쌓고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쳤다고 하니 이는 ‘대개 나가지 아니하면 허물이 없다’는 의미에서 취한 것이다.

  57세 때(1639, 기묘) 봄에 벽한정(碧寒亭; 오늘날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문화재 제233호로 지정)이 낙성되었다. 가을에 심양(瀋陽)에 인질로 가 있는 세자에게 보내는 회포를 읊은 내용인 두견시(杜鵑詩)를 지었다.

  58세 때(1640, 경진, 인조 18년) 11월 10일 학포 정훤의 고산정사(孤山精舍;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에서 58세를 일기로 고종(考終)했다. 무민당의 행장은 조간송과 임임곡이 찬술했다. 효종 10년(1658, 무술)에는 사림들이 유덕을 기려 용연서원(龍淵書院)을 창건하여 배향하였다. 숙종 17년(1690, 경오)에는 영남사림 동암 주채(東巖 周采) 등 800여인의 용연서원 사액소청이 저지되었으며, 그 소두인이 삭적의 처분을 받게된 것도 남인과 대립한 전력을 문제 삼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상의 연보를 통해서 무민당의 남명학파로서의 면모는 『산해사우연원록』과 「남명선생연보」, 그리고 「언행총록」의 편찬 및 간행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무민당이 찬한 「남명연보」는 원래 중요한 일이 있었을 때만 그 해와 나이를 아울러 적고, 그렇지 못한 해에는 남명에 관한 아무런 기록도 없는 조략한 형태로 된 것이었다. 이는 탈고 후 「姜令公」(姜寒沙)에 의해 한 두 차례 교정이 가해 진 바 있었으나 여전히 중요한 사실의 기술에 누락이 있을 뿐 아니라 年所가 잘못 수록된 곳도 남아 있다.

  『산해사우연원록』은 남명 조식의 사우록으로서 인조년간에 무민당에 의해 편찬된 것이다. 이 『산해사우연원록』은 무민당의 사후 수년, 강대수(姜大遂, 字 學顔, 號 寒沙; 1591∼1658)의 원장 재임 기간 중 덕천서원을 중심으로 이 작업이 추진되고 있었다.

  『산해사우연원록』은 성순(成錞, 字 而振, 號 川齋, 1590∼1659; 浮査 成汝信의 第四子이자 凌虛 朴敏의 사위)의 『川齋遺稿』에 수록된 「行狀」·「墓碣銘」 등에 河謙齋 및 제현과 더불어 이 「사우록」을 수교(綴?하여 입재(入梓)했다(『謙齋集』 「사우문도록」 成而振條)는 기록이 보이며, 朴无悶堂·河謙齋·趙澗松 등이 『남명집』 및 『학기유편』을 논정하기도 하였다(『德川師友淵源錄』 권6의 崔絅條)고 한다.

  무민당의 임종을 지켜본 정훤은 무민당이 卒한 다음해에 찬한 「再祭朴伯和文」(『學圃集』 卷4)에는 무민당의 문집 및 유저인 『산해사우연원록』의 간행이 논의되고 있었으나 좌절되었다고 한다. 「제문」에서는 무민당의 몰후 19년째인 효종 9년에 그를 제향하는 용연향사(龍淵鄕祠)의 건립이 시도될 무렵부터 현종 10년·숙종 17년에 걸쳐 무민당의 정치적 입장, 혹은 소속당파에 관한 평가를 둘러싼 대립이 통문전과 관부(官府)의 소지전(所志戰; 歎願書)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숙종 17년의 경우에는 용연서원의 사액소청이 저지되고 그 소두인(疏頭人)이 삭적의 처분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무민당집』의 별집 권2에 있는 「언행총록」이 문집 권5의 부록에도 있으며, 여기에 수록된 내용은 대부분 문집의 부록 등에서 절취해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별집 권2는 그 내용의 대부분이 문집의 권5 등과 중복되고 있다. 이것은 결국 무민당의 『산해사우연원록』이 남명별집의 형태로 간행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문집의 별집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다르므로, 독립적인 저술로서의 원래 형태를 유지하여 별행본으로서도 통행될 수 있도록 배려하였음을 나타낸다. 필사본인 『산해사우연원록』의 권2는 「남명조선생」편으로 되어 있고, 여기에는 김동강(金東岡)이 찬한 「행장」과 성대곡(成大谷)의 「묘비문」, 그리고 무민당의 「언행총록」과 「붕우서술」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으며, 별집에 이르러서는 「행장」과 「묘비문」이 허미수(許眉?와 조용주(趙龍洲)의 「신도비문」 및 정동계에 의한 학기 「발문」으로 대체되었다.

  무민당을 비판하는 측이 그에게 가한 죄목은 한결같이 광해군 때 대북에 동조하여 五賢의 종사를 반대했다(『卞誣錄』 所收 儒生呈書)는 것이었다. 무민당처럼 내암의 문도로부터 출문의 처분을 당한 인물에 있어서조차 그 이전의 남인과 대립했던 전력이 오랫동안 문제시되고 있음은 그것이 『산해사우연원록』의 출판이 지연된 배경을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해체 내지 전반적인 남인화가 불가피했던 사정을 시사해 주고 있다(이상 『산해사우연원록』의 편찬 및 간행에 관해서는 吳二煥 교수의 「『南冥集』諸板本の成立とその思想史的背景-17·8世紀の刊本を中心として-」을 참고).

  무민당은 당시 남명에 관한 불리한 시대·정치적 상황과 건강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 사실의 객관적 기술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북정권이 몰락하자 대북의 허물을 그들이 존숭한 남명의 학문내용에까지 추급해서 이것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조성됨에 따라 남명의 연원가에서 조차 자신들의 父祖 혹은 師門이 남명의 학통인 것을 감추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후 남명학파의 잔여세력들은 학파의 연원을 내암의 관련기사나 이름을 문집에서 삭제하기에 바빴으며, 당시 남인적인 시각에서 좌·우도의 대립에 관련된 민감한 부분을 가능한한 삭제 혹은 축소하여 초고의 모습을 변질시키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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