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과 영광의 역사,
그리고 우리들

정  재  명
(영남정형외과 원장)

  지난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흐린 날씨에 가끔씩 비를 뿌리겠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신순남이라는 러시아 동포 3세 화가의 그림 전시회를 보러 갔었다. 옛날의 소련 땅에서 까레이스키(고려인)들이 걸어온 파란 많은 삶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그림으로 나타낸 수난의 역사를 놓칠 수가 없었다. 전시회는 제목이 “수난과 영광의 유민사-신순남전”이었다. 자세한 역사적 사실은 알 수 없었으나, 그들 까레이스키들이 살아온 시대적 상황과 옛 소련이라는 체제를 이해한다면 그들이 걸어온 형극의 길은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고난을 극복하여 승리한 삶의 역사를 그림으로 보면서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런 훌륭한 작품을 그려낸 작가 신순남씨의 정신력과 치열한 예술혼에 대해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배지와 같은 곳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주저앉거나 꺾이지 않은 한 화가의 삶을 생각하고 예술적 성과를 보면서 우리 민족의 얼과 발자취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은 갈 때와 달리 날씨가 개였으나 지금의 우리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아 마음이 도리어 무거워졌다. 과거 우리 민족이 때로는 짓밟히고 억압받으면서도 꺾이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어, 마침내 이기게 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묵묵히 제 할 일 열심히 해온 백성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배운 것을 왜곡하여 세상에 아부하는 무리들이 설쳐대어 나라는 엉망으로 되어가고 있다. 바로 여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신순남씨 가족과 러시아 동포들이 어려움 속에서 살았을 때 이 땅의 우리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고통스런 날들을 살았다. 지난날의 고난에 못지 않은 영광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들녘이나 저자거리의 백성들과 참호 속에서 쓰러져간 수많은 장병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는 소용돌이 치는 세계사 속에서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다시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함께 우리의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잘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정말로 실망스럽다. 낯두껍고 뻔뻔스러운 무리들이 설쳐대기 때문이다.

  일찍이 남명선생은 “내신은 후원에서 세력을 얻어 용을 못에 끌어 들이 듯하고 외신은 백성의 재물만 긁어서 이리가 들판에 뛰는 듯한데 또한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셨는데 지금은 그 때보다 더 심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깨우쳐 줄 선생도 없으니 더욱 암담하다. 또 말씀하시기를 “학자들은 입으로만 천리를 논하며 이름을 도둑질하고 남을 속인다.” 하시면서 몸소 실천하지 않는 것을 꾸짖었는데 이것 역시 딱 맞아떨어지는 오늘날 우리의 얘기다. 저자거리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며 어떤 정서가 흐르고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황당무계한 이론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온갖 유세를 부리지 않나, 딱딱한 이념의 틀에 갇히어 밥알 하나라도 제손으로는 만들어 본 일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온갖 일을 하지 않나, 앞으로 우리 민족은 어떻게 해야만 된다고 장황한 이론으로 요란하게 떠들어 대면서 허세를 부리다가 상황이 달라지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기가 왜 잘났는지에 대해 입에 거품을 물지 않나, 보기에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단식 투쟁을 하면서도 뒤로는 남모르게 포식을 하며 주먹을 허공에 쳐들지 않나!

  그러나 지난날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 나라는 입으로만 떠들고 머리에 바람만 잔뜩 들어 제 뱃속 불리기에만 급급한 인간들이 지켜 온 것은 아니다. 도망할 줄만 아는 관군들이 지켜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니까 바로 평소에 생업을 충실하던 의병들이나 말없는 백성들이 지키고 가꾸어 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하다. 제 할 일을 열심히 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수많은 용들보다도 차라리 흙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지렁이를 더 바라고 있으며, 공리공론만 일삼는 허위의 지식인들이 아니라 무엇이든 한 가지라도 참으로 쓸모있는 일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을 희망한다. 스스로는 자기 배 하나 채울 능력도 없으면서 남을 속이는 저 위선에 가득찬 사람들에게 힘없는 민초들이 하는 일을 방해나 하지 말고 들판에 거름이나 보태주기를 참으로 간절히 바란다. 정치인은 정치인답게, 관리는 관리답게, 선생은 선생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공자의 말씀을 변형한 이 소박한 언표는 천고의 진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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