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2
남명연원을 찾아서(7)

藥圃 鄭琢

鄭  大  烈
(三江民俗館長)

  선생의 성은 청주 정(鄭)씨요, 휘는 탁(琢), 자는 자정(子精)이니 시는 정간(貞簡), 약포(藥圃)는 자호이다. 선생의 선세(先世)는 고려 보승장군(保勝將軍, 諱 克卿)을 1대로 연세현사(連世顯仕)한 청주(淸州) 대성(大姓)으로서 그 7대 서원백 문극공 오(西原伯 文克公 W)가 안동에서 졸장(卒葬)된 뒤 그 자손이 드디어 영남인이 되었다. 선생은 그 1대로부터 15대손 그리고 문극공의 8대손이다. 장수현감 휘(諱)는 원로(元老)와 생원 교(僑)를 각각 그 증조부와 조부로 모신 선생은 고휘 (考諱) 이충(以忠)과 비 평산 한씨(V 平山 韓氏)와의 제2자로서 중종 21년 병술(1562) 10월 8일 인시에 그 외향인 풍천군 용문면 금당곡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은 태어나자 벌써 영수(穎秀)함이 범아(凡兒)와 달랐고 8세에 비로소 수학하여 즉시 글의 대의를 통했다 한다. 그리고 13세에 병석에서 기삼백기국치문법(朞三百氣朔置聞法)을 스스로 고험(考驗)했다 하니 그 영민조성(穎敏早成)했음을 가히 알 수 있다. 17세에 퇴계 이황선생 문에 올라 여기서 심학지요(心學之要)와 천실(踐實)의 공을 쌓기 시작했으니 당일의 제제다사(濟濟多士)중 특히 임진호종공신(壬辰扈從功臣)으로서 서애 유성룡 선생과 같이 동문의 쌍벽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타일에 대용(大用)될 기틀이 실로 이때부터 이룩되어 갔던 것이다. 뒤에 33세에 문과급제, 36세에 진주교수를 거치면서 덕산의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서‘游深被推許 見得겝∈?氣像 故先生之始終全節 蓋有得於感化’도 컸다. 23세에 배위(配位)를 맞았고, 27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이어 태학제유(大學齊儒)가 되어 천인지리(天人之理)를 강구함에 모두 감탄하였다 하거니와 개제돈확(愷悌敦確), 수여정금(粹如精金), 권권호선(拳拳好善), 면진덕(勉進德), 낙이다서(樂易多恕), 불사애이(不事厓異)로 표현되는 인품과 덕성을 밑바탕으로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을 추천하고 신구(伸救)한 지인(知人)의 형안을 겸하고 경학(經學)을 비롯한 천문, 지리,  상수 등을 무불통관(無不通貫)하였으며, 병가 (兵家) 특히 고금 팔진·육화(八陣六花) 등의 진법을 정밀하게 연구하였다. 이러한 평일의 모든 온축(蘊蓄)을 기울여 구국제민한 무관불력(無官不歷; 陛資 移除拜百數十回)의 선생 입조(立朝) 50년 관로(官路)의 계제(階梯)도 여기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래로 선생은 거의 차지(蹉?를 보지 않고 중앙무대에서 계속 활약하기 40년이니, 이는 선생의 연보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 적이 도성에 가까워지자 마침내 선생은 7순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창황히 호종했다. 국도를 등지고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평양에서 다시 영변으로, 여기서 마침내 분조지의(分朝之議)가 결정되어 대가(大駕)는 의주로, 동궁은 강계로 향할 때 선생은 동궁의 이사(貳師)로서 학가(鶴駕)를 호종하는 중명을 받들게 되었던 것이다. 초숙우찬(草宿雨餐)으로 강계로를 돌다가 다시 춘천로로 고쳐 이천, 이천에서 성천에, 왕세자는 여기서 군국대권을 권섭(權攝)하게 되었다.

  다시 용강에서 영변으로, 임기처변(臨機處變) 결책보필(決策輔弼)하면서 전전불측지변(轉轉不測之變)을 면하게 한 수훈(殊勳)은 역력하다. 왕세자 호가의 임무를 마친 뒤에도  선생은 7순의 나이에 잠시도 투한(偸閑)함이 없이 또 다시 분쇄신(粉碎身)하는 위국정충을 계속했다. 평양이 탈환된 뒤, 영변을 떠나 계미년 정월 이십일 동궁을 모시고 대가(大駕)를 정주에서 배알했다. 뒤이어 대가를 정주에 호종, 다시 해주로 나와 대가는 회란(回|)의 길로, 선생은 다시 삼경(三京)이 수복되자 돌아가는 명나라 장관의 전위사(餞慰使)로 명을 받들게 되었다. 우선 입성복명(入城復命)하여『용만문견록(龍彎聞見錄)』을 바치고, 다음 날 뒤쫓아 동궁행차를 따라가 전주부에서 과세(過歲)하게 되니, 그 때에 선생의 연세가  69세였다. 그 해 동궁을 모시고 전주·공주·홍주 등 세 성을 왕래하면서 불폐한서(不廢寒暑)하고 무사를 교련했고, 홍주에서는 날마다 기민(飢民)을 진휼(賑恤)하는데 심혈을 다했다. 8월에 비로소 대조명(大朝命)으로 공주에서 동궁을 모시고 입경하여 다시 비변사에 입사했던 것이다.

  선생 72세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양호(兩湖)로 몸소 가서 인심을 수정(綏定)할 것을 여러 차례 청하였으며, 그 해 가을 중궁전(中宮殿)과 묘사주(廟社主)를 따라 해주로 향하여 신계현에 이르렀다. 다시 소명을 받아 동궁을 모시고 환경(還京)하였으며,74세 되던 해 4월에 동궁을 모시고 遂安郡에 가서 중궁전에 문안드리고, 윤사월에 환경하니, 거의 천리원정의 치구(馳驅)를 불사했던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신구한 것은 그 해 3월이었다. 기타 예하(隸下)를 이사(蔯?하는 수다(數多)했던 임란 전후의 좌직(坐職)으로서의 선생의 노심초사는 선생문집 기타에 소소(昭昭)한 바이다. 이로써 상상하고 남음이 있을 것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실로 후인으로 하여금 감분흥기(感奮興起)하게 하는 만절(晩節)을 다한 선생은 마침내 그 해 9월 성추(省楸)를 이유로 귀향하여 인병체류(因病滯留)했다. 드디어 좌의정으로 제수되었으나 재삼고사하여 중추부사에 체부하고 이어 걸해(乞骸)했으나 불윤(不允)된 채 노병이 심고(沈痼), 선생의 나이 78세에 상장(上狀)하여 치사(致仕)를 걸(乞)하매 영중추로 승수(陞授)하고 치사는 청허(請許)되었던 것이다. 나라에서는 호종훈 삼등에 수록되고 충근정량호성공신(忠勤貞亮扈聖功臣)의 호를 내렸으며, 충훈부(忠勳府)에 화사(畵師)를 보내 도상(圖像)하게 하고 봉조가록(奉朝駕祿)을 내리는 등 국가원로로서의 극진한 예우를 한 몸에 받다가 80천수로 선조 38년(1605) 9월 19일 풍천 고평리 집에서 마침내 고종(考終)하였다. 부문(訃聞)되자 선조께서는 진도(震悼)하여 철조삼일(輟朝三日) 함에 도민까지도 파시항곡(罷市巷哭)하였다 한다. 왕과 왕세자는 각각 승지와 궁관(宮官)을 보내 임조(臨弔)하였으며 이어서 예관으로 하여금 각각 치제(致祭)했다. 그리고 장수(葬需)까지 내려 귀후서관(歸厚署官)으로 치상(治喪)하게 하고 승문원관으로 하여금 제주(題主)하게 했다. 그리하여 다음해 2월 이같은 국장의 예로서 안동시 풍산읍 오미2동 간좌원(艮坐原)에 선생은 영면되었다. 인조 13년에 정간(貞簡)으로 증시(贈諡)되었다. 동 18년에 사림이 향현사(鄕賢祠)를 예천군 남쪽에 세우고 숙종 26년 읍호정(O湖亭), 도정서원(道正書院)을 낙동강 상류 내성천 동쪽에 세워 선생을 시축(尸祝)하였다. 선생의 유집은 원집과 속집 2종으로 원집은 선생 5대손 황해감사 玉이 영조 36년 왕명에 의하여 황해감영에서 발간했으니 총7권 44책, 속집은 7대손 천참봉 필규(薦參奉 必奎)에 의하여 순조18년에 4권 2책으로 발간되어 각각 세상에 전한다. 『피난행록(避難行錄)』과 『용만문견록(龍彎聞見錄)』은 원집에 수록되어 있다.(문화재 보물 494호)

 


 g_home2.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