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3
남명문학의 현장 답사기(6)

月潭亭에서 본  風景 혹은 時間

정 우 락
(경북대 강사)

‘월담정’은 月潭 鄭思賢(1508-1555)이 지은 것으로 고령군 지산리 월기 마을에 있었던 정자다. 정사현은 晉陽人으로 초명이 ‘思玄’이며, 자를 希古라 하였고, 월담은 그의 호이다. 대대로 진주에서 살다가 그의 아버지 麟대에 와서 고령으로 거주지를 옮기기 되었고 나주 박씨를 어머니로 모셨으며 외아들로 자랐다. 창녕조씨에게 장가들었으니 바로 스승의 누이였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3남은 序, 廈, 應이고 1녀는 담양부사를 지낸 적이 있는 金信玉에게 시집을 갔다. 월담은 특히 효행에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48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면서 세 아들을 불러놓고 모부인께 봉양을 다하지 못하고 죽게 됨을 가장 안타깝게 여긴다고 하였다 한다. 이로써 그의 효행은 재확인된다.

그는 평생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은둔하였으니 전형적인 처사문인이라 하겠다. 처사적 삶에 대한 심지는 다음과 같이 그의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위의 작품에서 보듯이 월담은 먼저 세상의 일을 석자 되는 거문고에 있다고 했다. 反俗的 태도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거문고 석자와 가장 어울리는 집은 고대광실이 아니라 석가래 몇 개 얹어 놓은 조그마한 집이다. 여기에 자신의 생애를 부친다고 했으니 반속적인 태도가 더욱 증폭된 셈이다. 시상을 여기까지 전개시킨 월담은 바로 이같은 상태에서 ‘眞境의 樂’을 만끽할 수 있다고 했다. ‘진경의 낙’이란 다름 아닌 가을달이 찬 못에 산뜻하게 비치는 경계 바로 그것이었다. 일찍이 北宋의 학자였던 邵雍(1011-1077)은 ‘달은 하늘 한 가운데 떠 있고, 바람은 물위에 불어오네. 이렇듯 淸明한 氣味를, 체득한 사람은 아마도 적으리라.’1)고 노래한 적이 있다. 천일합일의 경계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월담이 ‘진경’이라 한 것도 바로 이 경계를 말한 것이다. 이로 보아 월담은 소옹이 느꼈던 정신적 경계를 시공을 초월하여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인합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인간의 사유나 행위가 자연의 이법과 일치하는 데서 그 가치가 실현된다고 보는 하나의 인식체계이다. 연원은 중국 고대에 두고 있다. 중국의 고대인들은 황하유역에서 천연적인 자연의 혜택을 받으며 살았다. 이들에게서 자연은 인간의 모든 생활이나 운명을 관장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자연을 그들은 천으로 인식하였으며, 만물을 주재하는 상제로 구체화하여 畏敬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같은 생각이 송대에 와서 철학화된다. 즉 인간의 윤리나 도덕적 행위가 자연의 이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性’이 수양을 통해 사물 속에 내재해 있는 ‘理’와 일체화됨으로써 성인과 같은 심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같은 일체화, 즉 합일을 인간이 본연의 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이상적인 경계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스승은 월담의 이 정신적 경계를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월담을 자신의 매부로 삼았고 그가 타계했을 때 세상을 일찍 떠남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며 직접 묏자리를 잡아주기도 했다. 스승은 월담정에 자주 들러 매부 월담과 道義를 강마하였으며 아울러 朴潤(1517-?) 등 고령지방의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게 된다. 스승이 당시 월담정에 머물면서 「題鄭思玄客廳」이라는 칠언절구 한 수를 남긴다. 스승의 작품집에도 월담과 마찬가지로 내적 정신적 경계를 노래한 작품이 더러 있지만 「제정사현객청」은 그 관심을 현실로 옮겨 놓은 것이다. 현실과 밀착되어 있는 이같은 작품은 스승 문학세계의 기본 줄기라 할 터인데 사정의 이러함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을 감상해 보자.

수련에 보이는 ‘녹라지’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중국 湖南省 綠蘿山 밑에 있는 못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지금은 매립되어 고령 여중고 교정이 되었지만 거기에 있던 못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이처럼 고유명사로 보지 않고 풀어서 이해하기도 한다. 어쨌든 스승은 정사현의 객청, 즉 월담정에 올라 그 아래에 있는 못으로 시선을 보내며 빗방울이 떨어져 물결 무늬를 만드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시선을 못너머에 있는 산으로 이동시켜 멀리 있는 것은 안개에 잠겼다고 했고 가까이 있는 것은 어둑하다고 했다. 비가 오고 있으니 그럴 수 있었다. 원경으로 이동했던 시선을 다시 월담정 주변으로 끌어당겨 못가에 있는 늙은 소나무와 정자의 문을 기대고 있는 오래된 나무를 주시한다. 그리고 스승은 이 나무가 있는 풍경을 통해 문득 오랜 시간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시선을 다시 주산에 늘어서 있는 가야의 고분에게로 옮긴다. 그리고 생각한다. 신라 진흥왕 23년 異斯夫가 이끈 대군을 맞아 가야의 道說智王은 목숨을 걸고 분전하였으나 결국 나라를 구제하지 못했던 사실을. 또한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대가야의 마지막 격전지임을. 연장선상에서 황량한 월기 마을을 떠올린다. ‘月器’는 ‘月基’ 혹은 ‘月磯’로 표기하는데 모두 달의 찼다가 기우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스승역시 이것을 생각하였으므로 월기의 존망을 노래하였다.2) 가야의 패망과 월기마을의 존망이 시간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물의 존재와ㅂ 부재라는 보편적 원리에서 그렇게 결부될 수 있었다. 이는 스승의 통찰력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스승은 어려서부터 내륙과 해안, 서울과 지방사이를 오가며 국토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국토의 요소요소에 배어있는 오랜 시간을 읽어왔다. 가락국의 수도인 김해에 산해정을 지어놓고 생활하면서 수로왕을 떠올리기도 하며,3)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지나며 포석정에 들러 신라의 멸망을 안타까워하기도 한 것도4) 모두 같은 이유에서였다. 미련에 보이는 것처럼 국토엔 다시 봄이와 풀이 파릇파릇하고 그것을 보면서 스승은 한치한치 자신의 혼을 녹인다고 하였다. 풍경이 주는 시간의 중압감 때문이라 아니할 수 없다.

풍경을 통해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시간은 살아난다. 스승이 잡아준 황정산 기슭의 묘터에 월담이 오랜 시간 누워 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스승의 누이 조씨부인도 누워 있다. 『嶺南輿誌』에 의하면 조씨부인은 월담과 사별한 후 철마다 죽은 남편의 옷을 마련하여 무덤 앞에 태우기를 3년이나 하였다 한다. 3년상을 마치고 여러 아이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내가 이미 네 아버지를 따라가고자 하였으나 너희들이 다 자라지 않았으므로 지금까지 목숨을 이어왔다. 이제 집안을 너희에게 맡기게 되었으니 여한이 없다.”고. 그리고 스스로 숨을 멈추어 남편의 뒤를 따랐다 한다. 대상을 마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정려비를 세워주었는데 임진병화로 소실되었다가 현재 새로 단장되어 黃鼎山 묘소 아래에 있다.

물방울이 떨어져 고요한 동심원으로 번져가던 연못은 학교 운동장으로 변하였고, 월담정도 黃山齋로 이름을 고쳐 군청 옆 도로변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스승의 시력으로 보았을 늘어서 있는 가야의 옛 무덤, 있는 듯 없는 듯한 월기 마을은 그대로 있다. 없어진 것은 없어졌으나 있는 것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의 오랜 숨결을 감지하는 후손이 있었다. 鄭洙煥翁(73세)이 바로 그이다. 정수환옹은 월담의 14대손으로 선조가 계시는 곳에 빗돌을 세우고 깊은 명상에 잠긴다. 풍경 속에 떠오른 선조의 시간을 새롭게 읽기 위함이었다.


주)

  1. 『性理大全』, “月到天心處, 風來水面時. 一般淸意味, 料得少人知.”
  2. 월기 마을은 마을 호수가 15호 이상이면 망한다는 말에 따라 항상 15호 미만의 조그마한 형태로 존재한다고 한다. 달이 보름을 넘어서면 기울듯이 마을 또한 같은 원리라는 것이다.
  3. 「山海亭偶吟」, “十里降王界, 長江流恨深. 雲浮黃馬島, 山導翠鷄林.”
  4. 「鮑石亭」, “楓葉鷄林已改柯, 甄萱不是滅新羅. 鮑亭自召宮兵伐, 到此君臣無計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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