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답사기(1)

우리나라 성리학의 요람
紹 修 書 院

한 상 규
(동주여전 교수)

소수서원은 경북 영풍군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1541년(중종 36)에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이듬 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하였다. 1584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550년에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아울러 국가의 지원도 받게 되었다. 소수서원은 국가의 재정적 지원을 받게된 사학 교육기관으로서 공인된 교육기관이 위치를 확보하여, 그 뒤 다른 서원들의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양향을 주었다. 특히 서원이 단순한 향사와 교육적 기능 수행만이 아닌 지방 사림들의 정치사회활동의 의미를 포괄하고 있으므로 소수서원의 설립과 발전내용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 서원에 배향된 안향(1243년 고려고종30 ∼ 1306 충렬왕32)은 18세의 젊은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등용된 이후 6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47년간 관직을 역임하면서도 늘 학문에 힘쓰고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안향이 태어난 순흥의 지형은 웅자한 소백산의 맑은 계곡이 어울어지는 천의 지세로 고려 왕자들이 안태지(安胎地)가 되어 왔다. 이러한 풍광이 수려한 곳은 옛부터 사찰이 있기 마련이다. 소수서원의 자리는 옛 고려조의 숙수사(宿水寺)가 있던 터다. 안향의 공적은 여말에 도입된 성리학의 연구와 보급에 힘쓴 유학자일 뿐 아니라 국가교육재단인 ‘섬학전’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며 시행토록한 교육자이다.

섬학전은 정부관리들이 각기 은포(銀布)를 추렴하여 인재양성의 비용과 유학서적을 구입할 비용으로 충당되었다.

안향이 충렬왕을 수행하여 원(元)나라에 처음 간 것은 47세(1289) 때이다. 이 때 연경에서 처음으로 주자서(朱子書)를 얻어 보았으며, 마침내 성리학 도입의 선도자가 되었다. 그는 주자의 호 회암(晦庵)을 본떠 스스로 회헌(晦軒)이라고 불렀다.

서원은 일종의 사립 종합대학의 성격을 띤다. 우라나라의 학교교육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국가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태학(太學)을 설립하여 오경, 삼사, 삼국지 등의 유교적 학문을 수용하였으며, 이어서 통일신라에서는 신문왕 2년(682)에 당나라의 국자감을 모방하여 국학을 설립함으로써 관학부터 출발하였다. 안향이 살았던 고려말의 교육은 충렬왕이 즉위하여 국학으로 개칭될 때까지 270여년간 이어졌다. 안향이 학교부흥에 뜻을 갖게 된 것은 충렬왕 원년(1275)에 설립한 국학에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안향은 1278년에 국학교육을 관장하는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부임하였으나, 그동안 전란으로 학교가 폐허되어 기풍이 부진하여 국학에 수학하는 학생이 없는 것을 개탄하고, 유학진흥을 위해 학교교육의 부흥에 전념하였다.

주세붕이 백운동에 서원을 세운 까닭은 이곳이 바로 안향이 젊었을 적에 독서하던 숙수사의 옛터로써 풍광이 수려한 탓도 있지만 교육에 관한 뜻이 남달리 강한 군수였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당시 세상인심이 황폐하여 이것을 구제하는 길로 유학의 정신을 일으켜 보자는 의도였다. 주세붕은 그 뒤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1551)에도 최충(崔沖)을 제향하는 ‘문헌서원’을 창설하였다. ‘그에 의하면 교육이란 모름지기 어진이를 존경하는 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서원 터를 닦다가 땅에 묻힌 구리 3백여 근을 얻게 되고(숙수사의 옛종) 이것을 팔아 서적을 구입하는 한편 장학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를 내지 못하는 사람의 학자금으로 제공되었다. 주세붕의 이러한 교육열로 민심을 거둘 수 있었고 인삼재배를 실시하여 물산을 크게 장려하였으니, 지금의 풍기 인삼이 유명한 연유가 된다. 고려는 불교국가로 전국민이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말년에 가서 타락한 불교의 변질과 방만한 사찰 소유의 전답으로 인해서 국가 경제가 피폐한 원인이 되었다. 백운동서원의 역사(役事) 때에는 불교가 정리되고 있는 과정이어서 많은 스님들이 서원의 역사에 동원되기도 하고, 서원의 노비로 호구를 지탱해 가고 있었다.

이황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1549) 감사에게 글을 올려 백운동서원에 편액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청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을 당시, 이황은 유생에게 편지를 쓴 일이 있다. ‘춥지는 아니한가? 즉시 기숙사를 고쳐 주겠다’라는 내용이었다. 군수를 맞이하는 관내의 백성들은 군수의 정사에 믿음이 가기 시작하면서 앞을 다투어 자신들의 자제를 서원에 입학시키려고 했고 술과 안주를 놓고 갔다. 이 뒤로 서원의 음식제공은 끊이지 않았다.

소수서원에는 안향을 주향으로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으며(국보 제111호) 안축·안보가 배향되고 있다. 강당과 동서재, 학구재, 지락재가 있고 정문 밖에는 경염정이 있다. 영구봉(靈龜峰)을 옆으로 하고 죽계의 아홉 구비가 감도는 수려한 곳, 옆으로는 소백산의 연화봉 기슭에 자리잡은 명당이다. 가히 우리나라 성리학의 요람으로서 천고의 선비를 배출한 곳이다. 필자는 3년 전 이곳에 교육관을 지어 많은 청소년을 교육하는 정신도장으로서의 공간을 기념하는 준공식에 초청연사로 참석하여 안향의 정신을 흠모한 바 있다. 이황은 유생들에게 이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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