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1
남명학파 고문헌 소개(6)

『圭 菴 集』

김 경 수
(본원 사무국장)

1. 저자 및 간행경과

규암 송인수(宋麟壽, 恩津人, 字는 眉 , 1499-1547)의 문집인 『규암집(圭菴集)』은 본인의 직접 저술인 원집 1권, 다른 사람들의 글을 묶은 부록 2권, 연보 1권 등 모두 4권 2책으로 된 木活字本이다.

규암 선생은 을사사화로 화를 당한 인물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인데, 이로 인해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과 그 자신의 저술은 거의 없어졌다. 따라서 그의 생애에 대한 사항은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 수습된 것들과 후인들의 저술에 의존하여 살펴볼 수 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연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는 연산군 5년(1499) 11월 16일 한양의 유점동에서 부친인 參判公 世良과 모친 文化 柳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의 출생지는 모친의 고향 즉 외가인 청주의 馬巖里라는 설도 있는데, 일찍이 그는 이 곳을 만년에 살 곳으로 점찍어 자주 왕래하였으며, 후에 이 곳에서 죽음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규암 선생은 10세부터 大司成 尹倬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尹公은 趙光祖의 문인이므로 士林派의 학문적 맥락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20세에 牧使 博의 따님인 안동 權씨에게 장가들었다. 그리고 22세에 별시문과에 丙科 第7人으로 급제하여 承文院權知正字를 시작으로 홍문관, 사간원, 병조, 예조, 사헌부 등의 여러 벼슬을 역임하게 된다. 28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루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 36세에 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는데 병으로 부임하지 못하자 유배 당하였다. 유배지인 사천에서 지방의 많은 후진들을 교육하였는데, 龜巖 李楨이 대표적인 문인이다. 39세에 유배에서 풀려나 벼슬에 복직하였으며, 41세에는 특별히 품계를 올려 병조, 예조, 형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이 해 여름에 부친상을 당하여 청주에 어머니와 함께 모시고 역시 3년상을 치루었다. 상을 마치고 43세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 대사헌을 거치면서 퇴계 선생을 비롯한 당대의 거유들과 많은 교유를 가졌으며, 뒷날 남명 선생의 신도비명을 쓰기도 한 趙絅이 찾아와 『근사록』과 『심경』등을 배웠다. 45세에는 전라도 관찰사로 나갔으며, 이 때 각 군에서 四書三經을 간행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에는 冬至聖節副使로 북경을 다녀왔다.

中宗이 승하하고 明宗이 즉위하여 다시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한성부좌윤으로 있을 때 윤원형과 이기 등에 의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되어 청주로 돌아갔다. 2년 뒤인 49세 때에 이른바 ‘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등이 아래에서 권력을 농단하여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은 서서 기다리는 지경이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라는 내용의 양재역 壁書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을사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한 추가 형벌이 있게 되어 형을 결정함에 이기가 죽여야 할 사람으로 지목하여 이름에 크게 점을 찍자 정순붕이 아까운 인물이니 구해 주자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결국 賜死되었다.

후일 전라도 儒生 安順瑞가 상소를 올려 신원을 청하고 奇大升이 이를 적극 주장하였으며, 선조 3년에 다시 율곡 이이등의 청으로 신원되었으니,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지 24년 만의 일이다. 이에 여러 지방의 선비들이 다투어 사당을 세워 제사를 드렸으니, 회덕의 崇賢書院, 청주의 莘巷書院, 문의의 魯峯書院, 제주의 橘林書院, 전라도의 華山書院 등이 그것이다. 현종 원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文忠의 시호를 받았으며, 3년에는 노봉서원이 사액받았다.

그는 조정에 있을 때 김안국, 이언적의 신임을 받았으며,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일재 이항 등과도 서로 교유가 있었다. 남명선생과도 일찍이 깊은 교유가 있어 『大學』을 선물하였는데, 남명은 이 책을 받고서 그 느낌을 「書圭菴所贈大學冊衣下」라는 글로 남기고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남명 선생은 규암이 죽임을 당한 후에 평생 동안 잊지 않았으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고 전해진다.

『규암집』의 간행경과를 살펴보면, 규암 선생의 시문은 그가 죽임을 당하면서 제대로 수습되지 못하였고, 전란 중에 또 많이 산실되었으며, 게다가 후사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문집으로 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규암 선생의 형인 宋龜壽의 7대손 宋周相이 주로 호남지방에 남아 있는 규암의 유고와 여러 문집에 남아 있는 碑銘 등 관련 기록을 모아 1739년 처음 편찬하여 宋煥箕가 교정을 하였다. 그 후 11대손 宋志洙가 여러 문집과 야사를 검토하여 연보의 틀린 것을 바로 잡고 보충하여 갑진년(1844)에 재편찬하였다. 그 후 宋台憲, 宋弼憲, 宋在容 등이 주도하여 다른 집안에 전해지는 글을 일부 수습하여 보충하고, 연보를 보완하고서 宋秉璿이 교정하고 서문을 달아 1907년 간행한 것이다.

2. 체재 및 내용상의 특징

『규암집』의 첫머리에는 먼저 송병선의 서문이 있으니, 책의 간행경위와 규암의 행적 및 학문에 대해 여러 선현들이 높이 평가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어서 권1의 목차가 실려 있다. 권1에 실린 글은 규암이 직접 쓴 글들만을 묶었는데, 앞에 詩가 99수 수록되었다. 이어 상소문이 2편 있으니, 「論特進侍講不當廢箚」와 「「陳四事疏」인데, 「진사사소」는 그가 대사현으로 있을 때 올린 것으로서 군주의 정치에는 講學, 納諫, 設校, 用人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다음은 편지글이 4편 있는데, 그 중 「受後 命告訣門人書」는 賜死되기 직전에 從弟인 宋麒壽에게 자식을 부탁하는 글이고, 「戒子應慶遺書」는 아들 응경에게 독서에 힘쓰고 주색을 멀리하고 부끄럼 없이 살 것을 당부한 글이다.

이어 묘갈명이 두 편 있는데, 그 가운데 「孺人李氏墓碣銘」은 바로 남명 선생의 모친의 것으로, 두 사람의 친분관계를 짐작케 한다. 銘 중에서 이르기를 ‘어진 아들 낳아서 義로써 행동을 가르쳐, 道學의 실제와 유림의 중망 얻었네. 曺門에 碑가 있고 그 銘은 사람들 입에 있어, 그 銘에 부끄러움 없으니 참으로 뛰어난 어머니일세.’라고 하여, 훌륭한 어머니로부터 뛰어난 아들이 나왔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어 墓表가 두 편 있으니, 이상이 규암선생이 직접 저술한 글의 전부이다.

권2부터는 부록으로 앞에 목록이 있고, 다음은 선조 3년에 내린 「伸寃傳旨」로 을사사화 추죄인인 송인수에게 직첩을 환급하라는 내용이고, 이어 이 때 노봉서원에 사액하고 내린 金萬基가 지은 「宣額賜祭文」이 있다. 계속하여 「致祭文」이 3편 있으니, 곧 현종 6년, 숙종 42년, 영조 26년에 내린 것으로 이와 같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서 국가에서 제문을 내리고 제사를 드린 경우는 드문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당대의 名儒들인 이언적, 이황, 주세붕, 정사룡, 성제원, 신광한, 이항, 김인후, 신잠 등이 규암 선생에게 준 詩가 실려 있다. 다음은 「遺事」가 있으니, 여러 책들에서 인용한 규암 선생의 행적, 약력, 일화, 학문, 師友관계 등을 초록해 놓았다. 여기에서는 윤원형과 이기 등과 반목하게 된 경위 및 賜死를 결정하던 날의 과정, 이 때의 언행, 그리고 이 때에 일어난 異蹟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 뒤에는 송기수가 지은 「신도비명-병서」와 「묘지명-병서」가 실려 있고, 권2의 끝에는 從曾孫인 우암 송시열이 쓴 「神道碑陰記」가 있다.

권3에는 첫머리에 송시열이 지은 「諡狀」이 있어 약력과 행적, 사사되는 경위와 신원되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그 다음은 「三賢閭記」가 있는데, 이는 규암 선생의 형인 龜壽와 매부인 성제원 세 사람을 당시의 사람들이 三賢이라 칭하였기에 유점동의 집과 청주의 집을 삼현려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내용을 송시열이 기록한 것이다. 이어 문인 이정이 지은 「贊」에서는 이기의 무함으로 화를 당하게 된 것을 애통해 하고 있다. 그 다음의 「同庚修契帖」은 동갑끼리인 15명 계원의 명단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뒤의 「院享錄」은 송인수를 모신 숭현서원, 신항서원, 화산서원, 노봉서원, 귤림서원 등 여러 서원의 기문, 비문, 상량문, 제문, 疏 등을 모아서 붙인 것이다. 그리고 권3의 끝에는 閔維重이 쓴 송인수의 묘에 제사 드리면서 지은 제문이 있다.

권4에는 「연보」가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끝에는 이 책의 편찬 과정을 연대별로 알 수 있게 해 주는 「跋」이 3편 있으니, 첫번째의 것은 宋周相이 1739년에 지은 것이며, 두번째의 것은 宋志洙가 1844년에 지은 것이고, 마지막의 것은 책이 현재의 모습으로 간행되었을 때인 1907년에 송병선이 쓴 글로써, 그 각각을 살펴보면 책의 간행경과를 상세히 알 수 있다.

『규암집』은 비록 규암 선생이 직접 저술한 글이 매우 적어 그 학문의 자세한 내용을 알기에는 부족하지만, 을사사화라는 역사의 한 부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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