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冥先生이 그리워지는 時代

송 준 식
(진주전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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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유치원에 입학한 어린이가 먼저 배우는 것 중의 하나가 “앞으로 나란히”를 바로 하는 것이다. 이는 “순서”에 따라 차례로 줄을 똑바로 서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배우는 시작이다. 그리고 얼마 안가서 어린이들은 “키” 순서와는 또 다른 기준의 순서가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곧 “공부 잘하는 순서”에 따라 또 다른 “앞으로 나란히”를 하게 된다. 비록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선생님이나 부모님 역시 이 순서에 따라 더 예뻐하거나 덜 예뻐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 공부 잘하는 순서가 돈이나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기준이 되고 이 순서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우받아도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이런 식으로 학교로부터 형성된 고정관념은 결국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가치관과 행동 양식에 그대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오늘날 우리 교육의 문제로 부각되어 온 소위 입시 위주의 교육, 과잉 교육열, 학력 인플레이션 등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여기에 수반된 여러 가지 교육모순과 사회적 혼란의 양상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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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공부 잘하는 순서”의 “순서”와 “공부”이다. 순서를 정하는 것은 어떤 타당하고 개관적인 기준이 있어야 모두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영어 단어를 많이 외우고, 수학 문제를 잘 푼다는 것 등이 공부이고 그것을 잘하는 순위가 순서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은 한 개인이 건전한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동시에 자아실현을 담보하는 것을 측정할 수 있는 어떤 지표가 되어야 한다. 곧 “공부 잘하는 순서”와 “개인의 건전한 사회생활 및 자아실현”의 양자간의 확실한 관련이 있다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런 관련이 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그저 막연히 그럴 것이라는 또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기대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막연한 기대에 맞추어 “공부 잘하는 순서”의 경쟁에 부모나 교사 모두는 모든 정열을 여기에 경쟁적으로 투자한다. 지금 문제되고 있는 입시 위주의 교육, 과잉 교육열, 학력 인플레이션 같은 것들은 여기에서 나온 부산물이 아닌가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한 개인이 건전하게 사회생활을 영위하고 이러한 사회적 행위는 개인의 자아실현이라는 내부적 조건과 조화를 이루면서 한 사회가 합의한 사회적 성취의 객관적 기준에 합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는 개인의 내부적인 조건이나 건전한 사회생활은 경시되고 사회적 성취의 객관적 조건만이 중시되기 때문에 교육을 포함한 갖가지의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모양이다. 남명선생이나 퇴계선생이 살던 조선 중기에도 이러한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남명선생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할 대안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남명선생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것이다.

남명선생이 퇴계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與退溪書)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비질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상처를 입게 되고 그 폐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니 아마도 선생 같은 장로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시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덕계선생에게 보낸 편지(與吳子强書)에서 그러한 폐해에 관해서“시속이 숭상하는 바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당나귀 가죽에 기린의 모형을 뒤집어 씌운 것같은 고질이 있습니다. 온 세상이 모두 그러해 혹세무민하는데 급급하고 있으니 크게 어진 이가 있더라도 구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사문의 종장인 사람이 오로지 상달만을 주로 하고 하학을 궁구하지 않아 구제하기 어려운 습속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서 남명선생은 원천부(原泉賦)에서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남명선생은 학습자 자신이 자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바탕으로한 누적 조건과 일상 생활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일에 기초한 교육과정의 운영이라는 객관적 기준의 조화를 제시하고 있다. 이 양자를 조화시키는 것이 교육이 지향하는 목표라고 주장하면서 당시의 시속이 공허한 외부적 조건만을 강조하는 교육의 양태와 이러한 경향을 묵수하는 당시의 풍조를 개탄하면서 당시의 지도적 학자들의 자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남명선생의 지적은 오늘날 우리 교육의 모습과 너무 비슷하고, 선생이 제시한 방안은 오늘의 교육의 난맥 나아가 사회의 혼란을 해소할 수 있는 많은 시사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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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나라의 시국은 난마처럼 얽혀져 있어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지 뚜렷한 답이 없다. 정말 남명선생이 우려하던 당시의 시국과 너무나 흡사하다.

“전하의 나라 일이 이미 그릇되어서,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은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 버렸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지가 이미 오랩니다. 조정에 있는 사람 가운데 충성되고 뜻 있는 신하와 일찍 일어나 밤늦도록 공부하는 선비가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 형세가 극도에 달하여 지탱할 수 없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낮은 벼슬아치는 아래에서 히히덕 거리면서 우선 주색만을 즐기고 높은 벼슬아치는 위에서 어름어름 하면서 오로지 재물만을 늘리며 물고기 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데도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을 심기를 용이 못에서 끌어들이는 듯 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 벗기기를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 하니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때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乙卯辭職疏)라고 하면서 당시의 시국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국에서도 그 난맥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고답적인 방식으로 대처하는 당대의 선비들에게 선생은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오늘의 소위 지도자적 위치에 있다는 사람들은,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선생의 외침을 듣고 있는가? 정말 남명선생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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