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3
남명문학의 현장답사기

斷俗寺政堂梅,
스승의 事物觀과 풍자의 세계

鄭 羽 洛
(경북대 강사)

 

이 작품은 스승이 지은 「斷俗寺政堂梅」라는 칠언절구의 전문이다. 스승은 단속사라는 절에 가서 가장 먼저 절의 전체적 분위기와 거기에 사는 중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절이 있는 산으로 시각을 넓힌다. 1구에 보이는 부서진 절, 거기에 사는 파리한 중,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예와 같지 않은 산은 모두 이를 말한 것이다. 다음은 절에 있는 구체적 사물을 보고 그것과 관련된 절조를 잃은 한 사람을 떠 올린다. 2구에 보이는 것처럼 그 사람은 옛 주인을 버리고 집안을 나온 것이다. 구체적 사물이란 무엇인가를 3구에서 밝히고 있다. 매화가 그것인데 추위 속에 피어야만 할 ‘매화의 일’을 그르쳤다고 조물주를 비판 하고 있으니 예사롭지 않다. 그 이유를 4구에서 들고 있다. 즉 지조없이 아무 때나 핀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1) 단속사는 어떤 절인가 하는 문제, (2) 정당매란 어떤 매화인가 하는 문제, (3)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 (4) 우리는 왜 이 작품에 주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첫째, 단속사는 어떤 절인가? 이 절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에 있었던 절이다. 748년(경순왕7) 直長벼슬을 지낸 李俊(혹은 李純)이라는 사람이 창건했다고 하기도 하고, 763년 信忠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현재 절터에는 부러진 당간지주와 단속사지 동삼층석탑(보물 제72호)과 서삼층석탑(보물 제73호)만 남아 있다. 금당이 있었던 곳이나 강당이 있었던 곳에 초석이 남아 있기는 하나 민가가 들어서서 그 규모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경내에는 神行禪師碑와 大鑑國師(坦然)의 영당, 崔致遠(857-?)의 독서당 등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근처에 최치원이 쓴 「廣濟 門」의 각서가 있다고 한다. 특히 대감국사비는 없어졌지만 탁본한 비문이 남아 있어 대감국사에 대한 행적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신충이 그린 경덕왕의 초상이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솔거가 그린 維摩像이 있었다고도 하나 그 종적은 묘연하다.

一然은 『三國遺事』「避隱」 제8「信忠掛冠」조에서 신충에 대한 고사를 적어 두고 있으니 그는 내심 이 절의 창건자를 신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일연이 전하는 신충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신충은 신라 孝成王과 함께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었다. 이 때 효성왕이 “훗날 자네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하며 잣나무를 두고 맹세했다. 수개월 후 효성왕은 임금자리에 오르게 되고, 공신은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신충은 거기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충은 소위「怨歌」1)라는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여 잣나무를 마르게 했다. 효성왕은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정무 때문에 옛친구를 잊을 뻔 하였구나.”하며 벼슬을 주니 그 잣나무가 소생하였다는 것이다. 신충은 효성왕과 경덕왕의 사랑을 받으며 높은 벼슬을 하다가 경덕왕 22년 벼슬을 그만두고 지리산에 들어갔다. 임금이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효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하고 거기 살았다 한다.

둘째, 정당매란 어떤 매화인가? 고려말 조선초 사람인 姜淮白(1357-1420)이 소년시절에 斷俗寺에서 공부하며 매화를 심었는데2)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政堂文學에 이르렀다고 해서 단속사에 있는 매화를 정당매라 한다. 강회백은 진주가 본관으로 자는 伯父이며 호는 通亭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公襄王 1년에 세자의 스승이 되었고 이어 判密直司事와 이조판서를 겸임하게 된다. 이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천도를 중지하게 하였다. 이후 그는 政堂文學 겸 司憲府大司憲이 되기도 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잠시 진양에 유배가기도 하나 조선 건국 후 다시 벼슬하여 東北面都巡問使를 지냈다.

『養花錄』이나 金馹孫(1464-1498)의 「政堂梅跋」에는 정당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즉 앞의 책에서는 ‘단속사에 통정이 손수 심은 매화를 중들이 매년 북을 주고 잘 길러 가지와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이끼가 또한 덮여 있었다. 그 밑에 아직 죽지 않은 한 자 남짓한 낡은 등걸이 있다. 花譜에서 말하는 이른바 古梅와 다름이 없으니 참으로 영남 지방의 귀중한 古物이라 하겠다.’라 하고 있다. 그리고 뒤의 글에서는 ‘정당이 젊었을 때 심은 매화가 1백여 년이 되어 늘어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그의 증손 姜用休가 유적을 찾아 와서 새로 매화를 그 곁에 심어 놓은 지 벌써 10년이 되었니, 정당만이 손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화도 자손이 자라는구나.’라 하기도 했다.

셋째,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인가? 출처가 분명하지 못한 선비를 비판한 것이다. 단속사에 있는 정당매를 강회백이 심었으니 스승은 이를 보면서 강회백의 출처를 의심하게 된다. 아무렇게나 피는 매화에 빗대어 한 말이다. 강회백은 고려가 망하자 지조를 지켜 숨지 않고 다시 조선조에 벼슬하였다. 그러니 2구에서 보듯이 고려조의 왕인 ‘前王’은 강회백이 자신의 신하인 줄 알았는데, 그가 집을 나가 다른 사람을 섬기고 말았으니 집안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셈이다. 3구와 4구에서 스승은 조물주까지 비판하고 있다. 즉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는 매서운 바람과 차가운 눈을 이기고 향기를 뿜어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렇게나 피운다고 하면서 말이다. 여기서 ‘어제’란 고려를 말하고 ‘오늘’이란 조선을 말한다. 그러니까 강회백이 고려조에도 벼슬을 하고 조선조에도 벼슬을 하였듯이, 그가 심은 매화는 어제도 피고 오늘도 핀다는 것이다. 조물주를 들어 비판하고 있으니 강회백에 대한 실절에 대한 비판을 더욱 증폭시켰다 하겠다. 이 때문에 李濟臣(1536-1583)은 『 鯖 語』에서 스승의 이 시를 들어 강회백의 실절을 조롱한 시라고 평가하였던 것이다.

넷째, 우리는 왜 이 작품에 주목해야 하는가? 이를 통해 스승의 사물관과 풍자의 세계를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보았듯이 『양화록』에서는 매화나무가 오래되었다는 것을 중시하였고, 김일손은 매화가 새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러니 모두 매화나무라는 식물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스승은 그 매화와 관련되어 있는 인물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사물자체에 대한 이론적 탐구보다 그 사물과 관련된 사람을 눈여겨 보려했던 스승의 事物觀을 이해하게 된다. 풍자적 기법을 통해 주제를 표출하고 있음을 또한 알게 된다. 諷刺(satire)란 대상의 약점을 비판하고 공격할 때 성립되는 것으로 교정이나 개선의 목적을 지닌다. 스승이 「단속사정당매」를 지은 까닭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이다. 즉 이 작품을 통해 스승은 강회백의 실절을 비판하면서 당대의 선비들이 지조를 지키기를 바랐던 것이다. 『言行總錄』에서 스승을 들어 ‘비유에 능하였으며 사물을 제시하여 주제가 연상되게 했고, 해학을 섞어 조롱하고 풍자하였다.’고 평가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다음의 작품에서도 스승의 이러한 면은 명확히 드러난다.

이 작품 역시 당대의 인심을 풍자한 것이다. 1구에서는 자신에게 이익이 있으면 취하고 그렇지 못하면 버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常情이라 하였다. 2구에서는 구름 또한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3구와 4구에서는 풍자의 이유를 들었다. 개인 날에는 남쪽으로, 흐린 날에는 북쪽으로 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편적 인심을 들어 풍자하였다 하겠으나 절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세상 인심을 좇는 선비를 풍자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단속사정당매」에서와 마찬가지로 스승의 사물관이 노출되어 있다. 즉 매화를 그 꽃 자체로 보지 않고 사람과 결부시켜 이해했듯이, 구름을 구름 자체로 이해하지 않고 세상의 인심과 결부시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스승이 지녔던 사물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 하겠다.

스승이 단속사를 언제 몇 번 방문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자료가 없으니 알 길이 없다. 다만 어느 늦은 봄 날 四溟大師(1554-1610)를 여기서 만나기도 하고,3) 66세 되던 해 2월에 李楨(1512-1571)·趙宗道(1537-1597) 등을 여기에서 만났다는 단편적인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로 볼 때 사람들을 만나거나 지리산 주변의 산수를 감상할 목적으로 자주 들르지 않았을까 한다. 스승이 만년에 거처하였던 山天齋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도 신라 시대부터 있어 온 유서 깊은 절이니 말이다. 여기에 있는 정당매는 수령이 82년 11월 10을 현재 610년, 나무 높이는 3m, 보호수 고유번호는 제12-41호, 관리자는 운리의 강낙중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매화나무 곁에는 ‘政堂梅閣’이 세워져 있었으며, 그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었다. 오른쪽 비에는 ‘政堂文學通亭姜先生手植梅碑’, 왼쪽 비에는 ‘通亭姜先生手植政堂梅碑’라 음각되어 있었다. 모두 강회백이 매화나무를 직접 심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정당매 곁을 떠나지 못했다. 하늘을 향해 시커멓게 죽은 매화가지에서 아우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저마다의 논리로 성을 쌓고 살았던 할아버지들의 아우성을 말이다. 오늘날 우리의 가슴 속에 반추되는 저 격렬한 언어들, 그것을 우리는 노여움 가득찬 눈빛으로 오늘도 반복하고 있다. 죽은 매화가지 위에 참새가 서너마리 앉아 있었고, 하늘은 더없이 선명한 빛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그 매화나무 곁을 서성이고 있었다.


 주)

  1. 「怨家」는 이렇다. “뜰의 좋은 잣나무는 가을에도 시들지 아니하매, 너와 같이 가리라 하신 우러르던 얼굴 사라질 줄이야. 달 그림자 옛 연못을 지나가는 물결을 원망하듯, 모습이야 바라지만 세상이 너무 싫구나.”(뒷 구는 없어짐)
  2. 강회백은 이때 梅花詩 한 수를 남긴다. “한 기운이 순환하여 갔다가 다시 돌아오니(一氣循環往復來), 하늘의 뜻을 납일 전에 핀 매화에서 볼 수 있어라(天心可見臘前). 은정으로 국을 만들던 열매가(直將殷鼎調羹實), 부질없이 산 속에서 떨어지고 또 피는구나( 向山中落又開)”
  3. 이때 스승은 「贈山人惟政」을 남긴다.“돌로 된 홈통 위로 꽃은 지고(花落槽淵石), 옛 절 축대엔 봄이 깊어라(春深古寺臺), 이별할 때를 잘 기억해 두시게(別時勤記取), 정당매 열매 푸른 때를(靑子政堂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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