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연원 사숙인물고
來庵門人①

陶村 曺應仁

史 載 明
(경상대 강사)

曺應仁(1556-1624)의 字는 善伯, 號는 陶村이며, 창녕인이다. 陶村의 世系는 신라의 창성군 曺繼龍에게서 비롯되며, 그 후로 벼슬이 대를 이어서 고려에 들어와서는 더욱 창대하여 여덟 사람의 平章事와 아홉 사람의 少監이 났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이름과 덕망있는 이들이 계속 나와 가문을 이어왔다.

陶村에 관한 기록은 『陶村先生文集』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 문집은 「도촌선생실기서」, 「도촌선생세계도」, 「도촌선생실기」 제1권, 「도촌선생실기」 제2권 등으로 구성되었다. 「도촌선생실기」 제1권에는 詩2편(挽李龜城胤緖와 挽金西溪聃壽), 祭文2편(祭金西溪文과 祭尹汝述景男文)이 있으며, 附錄에는 詩2편(題智谷書堂 2首), 挽2편(李潤雨 石潭, 朴絪), 書1편(文緯 茅谿), 祭文1편(文緯, 李挺序 龍溪) 등이 있다. 「도촌선생실기」 제2권에는 부록으로 「行狀」, 「墓碣銘幷序」, 「墓地銘」, 「 實」, 「跋文」 등이 실려 있다.

陶村은 처음 道學으로 이름 높았던 金聃壽에게 배웠으며, 弱冠의 나이에 寒岡 鄭逑의 문하에서 『大學』을 배웠고, 鄭仁弘(字 德遠, 號 來庵, 1535-1623)과 같은 고을에 살면서 그를 師事하였다. 그는 가야의 來庵 鄭仁弘이 사는 고을에서 생장하면서 來庵에 대하여는 이미 그 명성을 흠모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그 밑에서 주선하면서 오랜 기간 그의 말을 들어왔던 터였으므로 陶村으로서는 당연히 그를 독실히 믿었을 것이며, 모든 것이 그와 닮았을 것이다.

陶村은 임란 당시 스승 前掌令 鄭仁弘이 義兵을 일으켜 倭敵을 토벌할 때, 河渾, 文景虎, 權瀁 등의 막료들과 함께 有司를 갈라 정해서 병사를 모아 대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大東野乘』卷26 「亂中雜錄」壬辰年 5月條; 『龍蛇日記』; 『燃藜室記述』第16卷).

한때는 그의 스승인 來庵이 退溪가 南冥을 두고 老莊에 바람이 든 사람이라고 했다하여 퇴계를 여지 없이 공격하고 비난하자, 그 문도들까지도 모두 뒤를 따라서 그를 지지하였다. 그렇지만 陶村은 南冥에 대해서 아는 이로 하여금 알게끔 하는 中道의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 당시 陶村의 말을 苞山 郭 (癸丑年 4월)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라고 하여 상대방을 비방하여 공격만 하기 보다는 오히려 남명의 학문적 세계에 대한 전모를 드러내어 모든 이로 하여금 수긍하게끔 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자기의 스승 남명을 섬기는 것까지는 좋지만 자기 스승과 어긋났다고 해서 일대의 儒宗을 이룬 퇴계를 비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陶村의 長子인 挺立이 쓴 「行狀」에서도 來庵이 晦齋·退溪 두 현자를 공격하고 나설 때 陶村은 스승인 來庵에게 南冥의 학문세계에 대해 사실 그대로 드러낼 것을 단독으로 충고한 기록이 보인다.

사실 來庵의 스승인 南冥의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에의 구명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老莊과 관련하여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긍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南冥은 16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士禍期로 대표되는 성리학의 이념 구현 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시기를 실제적으로 경험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학문적 세계를 구축하였다. 대체로 사화를 겪고 은거한 사람들은 非朱子學的 思想, 특히 그 중에서도 老莊思想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는 한국교육사를 통해서 볼 때, 조선 중기에 士禍期를 겪으면서 정치적 좌절을 겪은 처사형 지식인들이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중앙에서 주요한 관직을 지낸 인물들 중에서도 초기에 老莊思想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들이 보인다.

南冥이 교유했던 徐敬德(1489-1546), 李之涵(1517-1578) 등은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儒家的 思想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老莊思想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南冥은 특히 『莊子』 「人間世」篇의 ‘心齋’라든지 「大宗師」篇의 ‘坐忘’과 같은 形而上學的 超越精神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렇듯 南冥과 老莊의 思想的 連繫性은 당시의 유가적 학문경향과는 달리 노장적 경향을 띤 남명 학풍의 특이성이라는 관점으로 파악하려는 학자들도 적지 않게 보인다.

南冥이 불교, 노장, 양명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光海君日記』)은 이미 여러 자료들(『退溪集』; 『宣祖修正實錄』; 『光海君日記』; 『燃藜室記述』; 『大東野乘』)을 통한 글이라든지, 門人들 스스로가 南冥이 道流之言에 능히 통하였음(『南冥集』 卷五, 金宇 撰 「行狀」)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를 보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으로 검토해 볼만 하다.

둘째, 부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 南冥의 학문적 경향성을 논함에 있어 그에게는 老莊的 경향이 적지 않다는 것이 당대의 학자나 후세의 학자들에 의하여 널리 지적되어 온 바이다. 그것은 주로 남명의 학문과 처세에 대하여 批判的이고 否定的인 시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특히 退溪 李愰이 南冥의 「辭丹城縣監疏」를 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는 남명의 식견이 신기한 것을 숭상한다고 하여 그를 비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폄하하기조차 하였던 것이다. 또한 퇴계의 「崇正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이렇듯 南冥이 老莊思想에 깊이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退溪는 “鷄伏堂銘 같은 것은 그 說이 老莊書 가운데서도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로 曠蕩玄邈한 것이다(『陶山全書』 卷二十六, 「答黃仲擧」)”라고 하면서 南冥의 학문이 노장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하였다. 비록 퇴계에 의해 당시에는 상대방을 폄하하는 언사로 쓰인 말이지만, ‘노장을 숭모한다’라고 한 南冥에 대한 평가는 사실 그러한 학문사상의 풍모가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당시 南冥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대해서 來庵이 스승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목을 『光海君日記』에서 다음과 같이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 來庵은 퇴계가 남명에 대해 지적한 ‘傲物輕世’, ‘難要以中道’, ‘老莊爲崇’에 대해 스승의 입장을 변명하였다.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은 사화기로 점철되어 노장적 분위기가 사회전반에 만연하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으며, 남명의 노장사상에 대한 이해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來庵이 퇴계의 ‘老莊爲崇’이란 지적을 극력 배척했던 이유는 16세기 말에 가까와 지면서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비주자성리학적인 사고가 배척을 받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명의 학문이 노장을 崇尙했다는 퇴계의 말은 남명의 문인인 來庵에 의해 비판(『光海君日記』 39卷, 光海君 3年 3月 丙寅條)되면서 나중에는 퇴계와 남명 양 문인간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陶村은 來庵에 대해서 처음에는 스승이요 제자 사이였으므로 될 수 있으면 그를 붙잡아 흠집이 없는 사람으로 만드려고 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급기야 다시 손을 쓸 수 없이 낭패로 끝났을 때는 혼자 말 못할 아픔을 가슴에 담고 밤 깊은 줄 모르고 괴로워했으며, 來庵이 극형을 당한 후 시신을 거두어 돌아왔을 때는 그와 평소 가까이 지내던 모든 사람들이 다 무서워 피했으나 陶村 만은 가서 곡을 하고 또 장례까지 도왔던 것이다(「行狀」). 선비는 궁했을 때 節義를 본다고 했지만 사생 존망이 달라지고 어려움이 닥칠 염려가 있다하여 태도를 달리 하지 않기를 이렇게 하였으니 옛 사람이 이른바 독실하고 후중한 군자라는 것이 바로 陶村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陶村은 친구와 사귐에 있어서는 신의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이들을 중히 여겼다. 가령 藍橋 朴公이라든지, 陽 文公, 娥林의 茅谿 文公, 八溪의 雪壑 李公 같은 이들이었다. 그리고 청백하고 깔끔하기로 朴大菴 같은 이들은 여간해서는 허여를 잘 않는 이들이었지만 陶村에 대해서만은 같은 또래로 대하여 가끔 찾아 주었고, 寒岡 鄭逑선생은 우리 남쪽의 대 현자이고 斯文의 종장으로서 그의 말 한 마디면 천금도 가볍고, 그가 자리에 한 번 앉아 주면 그 자리가 열흘까지도 향기가 날 만한 분이었지만 그런 분도 그 고장을 지나게 되면 반드시 陶村을 찾아 유숙하였던 것이다(「行狀」). 이렇듯 그는 신의와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義理정신의 일면은 「서계 김담수의 죽음을 애도함 (挽金西溪聃壽)」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陶村은 함창에 있는 종가집 사당과 밀양에 있는 외가댁 선산의 거리가 모두 몇 백리였지만 해 마다 혹은 4∼5년에 한 번씩은 꼭 가서 배알하고 성묘했으며, 중년에는 桐溪 鄭蘊이 撰한 墓地銘에서,

라고 하여 주변 사람들을 보살피는 배려 역시 깊었음을 알 수 있다.

陶村이 벼슬하던 시기는 光海君 때 당시 山林의 碩學으로 일컬음을 받던 자들도 결국 誘惑에 빠지게 되는 지경이었는데, 그는 “권신 무리들과 결탁하여 좋은 명성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陶村先生實紀序」)”이라고 하여 스승에게 조차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鄭寒岡 선생 문하에 들어가 있으면서 학문의 근본원리에 대하여 터득한 바 있고, 또 文簡公 鄭桐溪와도 취향이 같아 명분과 절의로써 서로 격려하고 다듬은 바 있었기에 그것이 바탕이 되어 견해가 그 만큼 정당하고 소신이 그 만큼 확고하여 무슨 말에도 현혹되지 않고 어떠한 위압도 그를 두렵게 하지는 못했으며, 그렇게도 조용하고 간곡하게 하는 일들이 자연 中正의 궤도에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의 학문하는 방법도 그 심오한 뜻을 캐내 義理를 알아내는 것을 주안으로 삼고, 문장을 하면서도 되도록 실속 없는 형식은 버리고 오직 실용적인 측면에 착안했으며, 史學에는 더욱 일가견이 있어 고금의 치란성쇠와 인물, 그리고 출처 등에 대해 마치 눈앞의 일처럼 막힘이 없었다. 그는 관로의 진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것은 그가 무단히 한 말이 아닌 것이며, 그의 이러한 생각은 당시 머리가 다 희도록 과거장만 쫓아다니면서 구구한 방법으로 한 자리를 얻기라도 한다면 마치 그것을 영광으로만 생각하고 부끄러워 하거나 그만 둘 줄도 모르는 그러한 자들에게는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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