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敎란 무엇인가
-儒敎 文化圈의 歷史와 社會-

加 地 伸 行
(日本 大阪大學 敎授 )

二. 儒敎에 있어서의 죽음(死)

죽음을 무서워하고 사후에 대한 설명을 희망하는 동북아시아인에 대하여 유교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유교에서는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나누고, 정신을 주재하는 것을 魂, 육체를 주재하는 것을 魄이라고 한다. 이 魂·魄이 主宰되어 있는 상태를 「生」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이 兩者가 분리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죽으면 魂은 천상에 떠 있고, 魄은 지하에 가버리고 이 지상에는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래서 이론상으로 말하면 魂과 魄을 다시 불러서 일치시키면 생의 상태가 된다. 즉 招魂·招魄의 儀禮에 의하여 死者는 그리웠던 이 세상에 再生할 수 있다. 이렇게 재생될 수 있다고 하면 죽음의 공포는 사라진다고 생각하였다.

招魂再生儀式 - 이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샤머니즘」이다. 샤머니즘은 東西古今 도처에 있는 것이라 하등 신기한 것은 아니다. 儒敎도 그 발생에 있어서는 샤머니즘의 일종에 불과하였다.

단지 유교 이외의 샤머니즘은 단순한 샤머니즘으로 끝나고 이론적 발전이 없었다. 그런데 유교는 이 샤머니즘을 기초로하여 그 위에 체계적 이론을 구축하였다. 세계의 샤머니즘 중 아마 유교만이 그러한 이론적 발전을 성취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어떠한 이론인가?

유교에서는 招魂再生의 儀禮를 누가 행하는가! 고대사회에서는 儒者가 「샤먼」이었다. 그러나 유교의 보급에 따라 점차로 가족(子孫)이 이를 담당하게 된다. 즉 死者의 자식, 혹은 자손이 사자의 혼백을 부르는 儀式을 행한다. 死者(祖上)의 靈(魂·魄)을 재생시키는 것은 자손의 역할이다. 이 儀禮에 의하여 사후에도 다시 이 세상에 되돌아 올 수 있다고 이해하였다. 그렇게 보면 사자의 재생을 위해서 자손을 낳는 것이 필요하였다. 그 외에 더욱 중요한 것을 생각 해냈다.

자기는 부모의 複製이다. 나아가, 자기의 자식은 자기 부모의 복제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자식을 낳는 것은 자기의 부모 및 조상의 생명을 次代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식을 낳았다고 하면 자기는 개체로서는 소멸하지만 자기 생명의 후신, 즉 복제(copy)는 이 세상에 남을 수 있다. 즉 이 즐거운 세상에 자기의 후신은 확실히 살아 남을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돌아가신 조상의 祭祀를 지내고 그 靈(魂·魄)을 이 세상으로 불러서 재생하고 또한 자식을 낳으므로써 자기의 생명을 존속시켜 갈 수 있다는 것이 죽음의 공포를 제거해 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조상과 자손, 그 상하관계의 축소판이 있다. 그것은 현실의 부모·자식의 관계이다. 부모는 장래의 조상이고 자식은 장래의 자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祖上…父母-自己-子息…子孫」이란 관계는 「과거(조상)·현재(현실의 부자)·미래(자손)」에 걸친 시간적 연속의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조상을 제사지내는 것, 살아계시는 부모를 敬愛의 정을 다하는 것, 자손을 낳는 것, 이 세 가지를 포함한 것을 「孝」라고 한다.

보통 「孝」라고 하면 부모에 대한 敬愛의 情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것은 유교가 말하는 「孝」의 일부에 불과하다. 유교가 말하는 「孝」는 조상에 대한 제사, 부모에 대한 敬愛, 자손의 존속, 이 세 가지를 합한 것이다.

그러면 이 「過去·現在·未來」를 관통하는 孝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자기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신체는 부모의 복제다. 그 부모도 또한 조부모의 복제다. 그렇다고 하면 자기가 조상(부모·조부모…)의 생명의 전신인 이상 자기는 조상이 옛날 살고 있었을 때부터 확실하게 살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기는 백년전, 아니 천년전에도 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일만년전, 아니 생명의 탄생이래 계속 살아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또 내가 자식을 낳고 자식이 손자를 낳는 등 생명이 존속할 수 있다면 자기도 또 미래에도 생존할 가능성이 있지 않는가. 즉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거나 또는 완화시켜주는 설명을 규명하면 자기는 과거 오랜 시간을 생존해 왔고 장래에도 생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죽음 또는 사후의 설명은 실은 생명론이었던 것이다. 조상에 대한 제사·부모에의 敬愛·자손의 존속이란 효는 실은 생명론이다. 영원한 생명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생명론이다.

망인의 魂은 하늘에 부유하고 魄은 지하에 위치한다. 그런데 자손의 招魂儀禮에 의하여 그리운 이 세상에 오래도록 존속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닥쳐오는 죽음의 공포도 누그러지지 않겠는가. 죽음의 공포를 제거해 주는 것은 가족이고 자손의 존재이다. 동북아시아인이 墓를 모으고 그것을 자손이 지키고 성묘제사지내줄 것을 절실히 원하는 감각의 근본은 여기에 있다. 신이나 불타는 필요없는 것이다. 다짐하기 위하여 말하거니와 묘는 불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유교에서 도입한 것이다.

三. 儒敎理論의 構造

동북아시아인을 지도한 것은 유교다. 그러나 실은 그 역으로도 말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인의 감각 즉 靈의 존재를 믿고 샤머니즘에 의하여 초혼재생된다고 하는 감각을 파악하여 이론화한 것이 유교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주장을 동북아시아인이 유연하게 받아 들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동북아시아인의 감각은 현재에도 살아 숨쉬고 있다. 예컨데 사람에 붙은 혼령을 씻어 없애는 淨靈행위의 감각이다. 그러한 감각이 일반화된 것이 조상의 靈에 공양한다는 제사이다.

이러한 拜靈行爲는 불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불교에서는 죽으면 성불한 자 이외의 대부분은 그 혼이 中有(中陰이라고도 한다)라는 시간에 들어간다. 육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즉시 소각해 버린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묘는 불교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묘를 만드는 것은 유교다.

그런데 중유의 시간은 49일간이며 그 시간내에 생전의 선악의 정도에 따라 내세에 태어날 행방(六界-천상계, 인간세계, 수라세계, 아귀세계, 축생세계, 지옥세계)이 결정된다. 보통 인간세계에 태어나나 잘못되면 축생, 아귀, 지옥으로 보내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후 49일간은 영혼이 존재하지만 50일째부터는 어디론가 轉生해 버린다. 그 후에는 사망한 조상의 영혼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 조상봉양이나 묘를 만드는 것은 인도불교와는 관계없는 행위이다. 그것들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어 유교의 영향을 받아 이를 수용한 의례이다.

이와 같이 불교 본래의 모습을 크게 변화시킬 정도로 동북아시아인의 영혼을 믿는 감각은 철저하다. 유교는 이를 토대로 하여 조상숭배를 하고 효라는 사상을 짜냈다. 즉 효에는 종교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효의 내용 중, 부모에의 敬愛는 현실의 가정생활에서 행하여지는 일상적인 것이다. 거기에는 敬意의 표현이 있고 습관화되어가면서 가족도덕이 생기게 된다. 그 가족도덕은 유교에 있어서 「禮」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예도 죽음과 관계가 있다.

가정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의례를 유교에서는 冠婚喪祭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喪禮이다. 이 상례의 형식이 다른 의례의 참고기준이 된다.

그 상례에 있어서도 또한 規準을 부모의 상례에서 정하였다. 부모의 죽음이야말로 최고을 슬픔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최고의 슬픔을 표시한다. 그리고 부모이외의 친족의 상례는 비교적 간략하게 규정된다.

이렇게하여 禮가 성립된다. 그 冠婚喪祭의 제례는 동시에 정신적 훈계로서 윤리성을 가진다. 예컨데 타인의 상례 때 큰소리나 가무는 금물이다.

그러므로 유교에 있어서의 예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고 윤리성을 가지게 되므로 「禮敎」라고 한다. 따라서 효에는 종교성 이외에 「禮敎性」이 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는 효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이다. 동북아시아의 구사회에서는 가족은 부자관계에 의하여 성립되어 있으므로 (현대와 같이 부부가족의 구성이 아니다)이 효를 토대로하여 그 위에 여러 가지 가족윤리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가족윤리에 있어서는 종교성과 예교성이 혼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효를 토대로한 가족윤리는 종교성과 예교성의 두 기둥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유교는 이 가족윤리를 토대로하여 사회윤리나 정치론을 구성하여 가게 된다. 그 최초의 추진자가 공자이다. 孔子 이후 儒者들은 가족이론 뿐만아니라 그 위에 정치이론, 경제이론 등 보다 사회성이 있는 것을 설정하고 그것의 유가적 해결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종교성과 예교성이 점차 분리되어가서 끝내는 정치이론이나 경제이론에 있어서 예교성이 중심이 되었다. 그런 중에서도 가족이론에 있어서만은 예교성이 남아있다.

그래서 유교의 사회적 세력이 커지고 나중에는 유교가 국가이론이 되어 국책의 입안을 유교관료가 행하게 됨에 따라 유교사상의 주류가 마치 예교성에 있는 것과 같은 양상을 띄게 되었다. 즉 유교사상 중 정치·경제사상 및 그 정책의 발전은 유교에 있어서 예교성과 종교성의 분리를 가져왔다.

더욱이 유가관료가 실권을 잡음에 따라 점차로 유가사상 즉 정치사상이 예교성이란 등식으로 이해되어 가족윤리에 있어서 종교성이 희미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치사상에서 예교성의 강조로 가족윤리에서도 예교성이 중시되어 가족이론에서 종교성은 더더욱 미약해지게 된다.

이렇게 하여 유교란 윤리도덕(禮敎性)이고 종교가 아니라는 관념이 형성되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면적인 이해이고 불충분하거나 틀린 이해이다. 동북아시아인, 특히 지식인이 그러한 틀린 이해를 한 것이다. 그 큰 이유는 동북아시아에서 지식인은 동시에 유가관료였으므로 유교에 있어서는 정치나 경제의 이론이 중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초혼의례의 종교적 성격의 의미를 이해못하게 되었다.

四. 儒敎와 現代

동북아시아의 전근대사회에 있어서는 유교, 엄밀히 말해서 예교성이 정치를 지도하였다. 그러나 근대화와 더불어 체제의 변혁이 있었다. 즉 민주주의 체제로의 전개였다.

이 변혁과 더불어 정치, 경제, 일반사회에 있어서 유교의 예교성은 지도성을 잃고 붕괴하였다. 잔존하는 것도 있으나 거의 붕괴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가족사회에 있어서 종교성은 여전히 건재하다. 또 가족내라는 한정은 있지만 조상숭배라는 종교성과 결부된 예교성도 살아 있다. 양자는 혼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형태는 금후에도 상당히 장기간 존속해 나갈 것이다. 왜냐하면 유교의 종교성과 이에 관련된 예교성은 이데올로기나 지적 이론으로서는 좌우할 수 없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가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2차대전 이후의 대변혁을 거쳐서도 조상숭배라는 행위는 꿈쩍도 않고 존속되어 왔다. 불교와 조화를 이루면서 묘를 만드는 것, 조상숭배의 현상은 쇠퇴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이나 한국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것이 가정에 정신적 안정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효를 토대로 한 조상숭배를 축으로 하는 유교의 영향이 보이는 지역」이 유교문화권이다. 즉 유교의 종교성을 토대로한 지역이 유교문화권이다.

그런데 유교의 예교성을 토대로한 지역이 유교문화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이것은 본질적 이해가 아니다. 동북아시아에 있어서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 유교의 종교성이고 이것과 직접 관련된 한정적 범위의 예교성이다.

그러므로 동북아시아의 유교문화권의 문제, 특히 현대의 문제를 검토할 때, 이 종교성을 중심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장기이식문제의 경우 윤회전생을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바로 육체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초혼재생의 유교에서는 사후의 육체(실은 白骨)는 오래도록 이 세상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혼재생 때 심장이나 각막이 없으면 이 세상에 되돌아 오는 의미가 없어진다. 이러한 감각의 동북아시아인에 대하여 장기제공을 요구하려면 성의 있는 위령제를 올리는 것이 문제해결의 전제가 될 것이다. 또한 중국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일본인구의 감소현상이란 대비적현상은 유교의 생명론이 살아있는 중국과 유교의 생명론을 가르치지 않는 일본과의 상이에 의한 것이다.

또 자손의 영속이란 문제를 지구적 규모로 확대해 볼 때 환경파괴라는 것은 유교적 입장에서 말하면 엄하게 비판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에서의 발언은 거의 없다. 즉 유교의 종교성이란 유교의 본질이 학교교육이나 가정교육에 있어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이 현대의 여러 문제를 앞에 두고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그렇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의식교육에 있어서 종교의 과목을 새로 넣어 동북아시아의 종교 즉, 儒敎, 佛敎, 道敎를 불문하고 정확하게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오해없도록 말하면 종교 그 자체를 교육하는 것이지 특정의 종교를 주로하지 않는 이상 헌법의 제약에 하등 저촉되지 않는다. 2차세계대전 이후 종교를 정확하게 교육하지 않은 태만의 죄가 상당히 크다.

☆○★●◇◆△▼★●▲▽△


 g_home2.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