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代 交替期의 問題意識과 그 解決方案(2)

金 忠 烈
(本院 院長)

본 시론은 김충렬 원장이
고려대학교 대학원장직을 끝으로
40여년 걸어온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기념강연한 내용으로,
여기서는 그 결론부분을 4호에 이어서 연재한다.
-편집자 주-

3. 동양의 인생관과 문화관으로 현대의 문명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

① 우선 우리는 오늘의 물질문명을 추동시켜온 근본개념인 ‘무한우주관’을 다시 검토하여 최소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유한한 세계라는 것을 새롭게 자각해야 한다. 이것은 재화의 양은 유한하다는 동양의 유한우주관을 인정하고, 이를 인간의 문화이상을 설정하고 건설하는 데에 절대여건으로 삼아야 함을 말한다.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오늘의 문명위기가 극복될 수 없음은 물론이고, 21세기의 문화 또한 인류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할 것이다.

② 다음으로 우리의 바람직한 문화유형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사숙고해서 그것을 선전하는 일이다. 동양문화는 일찍부터 농경문화를 축으로 인간중심의 윤리도덕을 ‘人道’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동양의 물질생산과 생활은 수 천년 동안 이 농경문화가 주류를 이루었고, 윤리도덕이 인간관계의 질서 또는 인생관의 이상적 목적체계를 설정하는데 근간이 되었다. 반면에 오늘날 문명의 주류는 물질주의가 이끄는 체계를 설정하는데 근간이 되었다. 반면에 오늘날 문명의 주류는 물질주의가 이끄는 기술문명이다. 이것은 지금 비록 병폐와 위기라는 진단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 나름대로 수 천년 내려온 인간의 문제를 여러 방면에서 해결해 준, 어떤 면에서는 인류의 구원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인류문명의 향후 노선에서 완전히 제외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인간생존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농경문화적 요소들을 질식시키는 사태를 초래하도록 용납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러한 결과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21세기의 문화유형을 일단 ‘農工文化’로 설정하고, 지금까지 ‘工的인 요소’가 主가 되고 ‘農的인 요소’가 從으로 전도되었던 것과는 달리 후자가 主가 되고 전자가 從이 되는 문명체계로 전환해 가야 한다.

③ 농경은 자연 속에서 그 자연의 질서와 공능에 의해 영위되므로 ‘자연’을 중시하고 모든 것의 근원을 자연에서 찾는다. 농경문화가 탄생시킨 철학이 그러하고 문화가 그러하다. 또한 농경은 비록 가난하고 부족한 면은 있지만 인류가 생존해 갈 수 있는 기본적인 것조차 충당 못시키는 그런 절대 부족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농경문화적 요소를 중시함으로써 자연존중의 사상을 고취시켜 자연을 정복 대상의 범주로부터 해금시켜 이제부터는 그것을 순응과 조화의 대상으로 새롭게 그 위상을 정립시켜야 한다. 또 거기에 맞추어 인간은 그 자연의 가용한계 내에서 물질생활을 추구하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자제하고 그 의지를 다른 면으로 돌려 거기서 승화된 욕망을 보상받는 ‘心主物從’의 가치체계를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④ 그러면 일부에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미 물질문명의 생활습성에 깊숙이 젖어 있고 또 정치경제를 포함한 모든 생활체계가 그렇게 짜여 있는데 어떻게 뒤바꿀 수 있느냐고. 말하기는 쉽고 행하기는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세부적으로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이 결국은 우리의 결단이 담보되지 않는 모든 주의와 주장들은 외형이 아무리 그럴 듯하고 논리가 아무리 치밀하더라도 공염불일 수 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물질향유와 지금의 편리한 삶이 계속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시간상의 완급만 있을 뿐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이러한 파국에 대하여 우리의 결단이 그 해결의 길을 터 나가지 않는다면 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사고의 전환’이다. 이것이 먼저 이루어져야 이 문제에 관한 모든 주의와 주장들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21세기를 맞이하는 바람직한 자세일 것이다.

⑤ 결국, 우리는 최소한 현재의 물질생산과 경제발전의 속도를 적어도 현재의 수준에서 멈추게 하고 지금까지의 직선적인 발전체계를 순환반복의 과정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들 풍요한 물질생활과 편리한 기계이용을 싫어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을 끝가지 추구하고 지탱할 수 없는 것이 이 세계가 지니고 있는 숙명적인 한계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스스로 자제하는 자신을 대견스럽게 여기는 인간의 자기‘해탈’이 있어야 할 것이다. ‘萬法唯心造’라고 했던가? 동양의 철인들은 전통적으로 『易』復卦의 陽爻가 처음 태동하는 것을 두고 그것에서 천지의 정신을 읽는다고 했다(‘復其見天地之心’). 21세기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는 먼저 우리들 마음의 본자리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구도적인 ‘省察工夫’와 사명의식에서 비롯된 ‘憂患意識’을 가진 자만이 가능하다.

4. 인성교육에 대한 비판과 근본 방안 제시

마지막으로, 사족 같기는 하지만, 위와 같은 문제의식의 연장선 속에서 우리 사회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문제해결의 한 방식에 대해 간략한 소감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곧 인성교육의 문제이다. 인성의 타락현상은 어제 오늘의 사건이 아니라 수 천년 전부터 있어 왔던 문제들이다. 『孟子』에 의하면 춘추시대에도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고 신하가 군주를 죽인 예가 허다했다. 유가의 도덕율인 이른바 ‘三綱五倫’을 교육의 지상목표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도 부모를 죽이고 배우자를 죽이는 반인륜적 사건은 종종 일어났다. 이런 까닭에 더욱 윤리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三綱行實圖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하였던 것이다.

근래 몇 가지 반인륜적 사건들을 계기로 우리 사회 각계에서는 도덕재무장운동이 일어나 共同善의 추구니 孝교육이니 하는 나름대로의 목소리를 높이고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물론 인성교육의 효과가 단시일 내에 나타나는 것은 아니므로 성급하게 그 성패를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운동이 전시적 차원에서만 머물 뿐 구체적인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렇듯 일시적인 전시성 구호로 인성의 회복운동을 전개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듯하다. 인성교육 문제가 어려서부터 심지어는 태아교육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인데, 이를 대학에서 맡아 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무엇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 방법인 것 같아 역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大學』에서 “物에는 本末이 있고 事에는 終始가 있으니, 그 先後를 알아야 문제 해결의 정도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한 말은 인성교육의 방식에서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즉 인성교육은 그 근본과 시초에서부터 계발하고 교정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인성’의 본질에 대한 유가적 논리를 밝혀 보기로 하자.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中庸』 첫머리에서는 “하늘(自然)에서 품부되어 온 것이 性(생명본질 또는 본능)이다”(天命之謂性)라고 전제하고 있다. 이 말은 곧 인간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의 잠재적인 가능성은 태어나면서 이미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동양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우주라는 유한한 공간 속에 담겨진 萬有는 그 속에서 不易의 變易을 거듭해 옴으로써 수 천만년 동안 그 나름의 생존법칙을 형성하게 되었고, 이 본능이 곧 ‘性’이다.

그런데 이 ‘性’은 그 싹만 주어졌을 뿐 완성된 것은 아니어서 모든 존재들은 자기의 육체적 성장과 함께 주어진 ‘性’을 확충해야 한다. 특히 역사문화라는 또 다른 생존법칙의 영역을 갖고 있는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적 성을 계발 성장시키는 한편, 그것을 인간 생존법칙에서도 적합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교정시켜야 한다. 그래서 『中庸』에서는 바로 이어서 “타고난 성은 계발과 교정을 받아 키워져야 하는데, 그 방법은 반드시 ‘道’에 따라야 한다”고 한 것이며, 다시 또 이어서 “이 도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며, 성인이 제시한 도가 망각되거나 유실되지 않도록 늘 보수(학문연구)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는 것이 교육”이라고 한 것이다. 모든 것은 어린 싹일 때 계발 교정하기가 쉽고 또 힘도 덜 들고 효과는 배가한다. 인성교육은 어려서부터 시켜야 한다는 이치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어려서 시키는 인성교육은 밖으로 향해진 지식교육이 아니라 내면으로 향해 자성의 싹과 만나서 그 싹을 스스로 키워가는 천성교육, 즉 순수정감을 체득하고 그것을 돈독히 해서 사사로운 욕심이나 이기적 행위를 스스로의 힘(도덕적 이성의 힘)으로 제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외부사물과 만나기 이전에 먼저 그 만나는 주체(자아)를 반듯하게 세우고 接物應變하는 덕성을 충실히 하자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 간다”고 했다. 이 말은 어렸을 때 길러진 자기제어의 힘(孔子는 이것을 ‘克己復禮’라 하고, 그것을 ‘仁’, 즉 모든 것의 출발점이자 輻輳의 核이라고 했다)은 그가 성장해서 사회생활을 할 때 그대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성교육에 대한 우리의 교육환경과 방법은 어떠한가? 옛날의 인성교육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시작되면서 가정 속에서 대부분 이루어졌다. 그 때의 가정은 바로 혈연 공동체의 최소단위로서 그런 혈연적 관계에 기반을 둔 사랑과 도덕실천의 장이었다. 그 곳은 특히 부모자녀간의 상하위계질서와 형제간의 우애와 신의를 익힘으로써 남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처음으로 배우는 교육의 마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집이라는 외형적인 가정만이 있을 뿐, 사랑과 도덕으로 충만한 내면적인 가정은 사라지고 말았다. 산업사회를 생활터전으로 하여 삶을 영위하다 보니, 부부(부모)가 모두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또 그나마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도 양로원으로 내몰리는 형편이다. 또 산아제한 운동으로 말미암아 아이들은 대부분 외톨이로 성장하고 있고, 주위에서 보고 접하는 모든 것도 온통 TV로 대표되는 인공적 환경뿐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미처 자신의 내면심성과 만나기 전에 외부의 자극에 쉽게 노출되어 심성이 분열된다. 그 결과 그들은 자연의 순박함이나 포근함보다는 기계적이고 규칙적이며 딱딱하고 거친 문명의 틀 속에서 그것을 헤쳐 나갈 투쟁심리를 싹틔우게 되는 것이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라는 것도 타고난 소질과는 달리 사회의 잘못 형성된 가치관에 맞추어져 온갖 종류의 학원이나 강습소, 수련회 등에 아이들을 내몰아 심성교육이 무시된, 지적이고 기능적인 교육에만 길들게 할 뿐이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은연중 남을 이기고 자기만이 제일이 되려는 외로운 투사의 길을 가게 된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의 심성이 선해질 리 없다. 그들에게서 어떻게 도덕적 인격을 바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문제아가 되어 사회와 가정의 질서를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자 이제서야 이를 바로 잡겠다고 사회적 교육이나 운동을 벌이고, 심지어는 대학에서까지 도덕교육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쇄어버린 풀과 나무같이 이미 커버린 아이들의 심성을 어떻게 교정할 수 있겠는가? 잘못하다가는 오히려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아주 꺾어 버리는(‘矯枉過正’) 개악을 초래할 것이다.

결론은 간단하다. 인성교육은 태아 때부터 시작되어 어려서 가정에서 기본이 닦여지고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성교육에서 자연환경이 성격형성의 절대적인 조건이라는 것을 항상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경제발전이라는 절대명제 아래 자연환경을 황폐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사회환경도 온통 물질적 재화만 추구하는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장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이것을 원래의 자연, 안정된 사회로 되돌려지지 않는 한 인성교육은 百年河淸으로 淳化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비록 조금 가난하게 살더라도 맑고 푸르고 싱싱하며 포근한 자연환경을 향유할 수 있어야 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의 자세를 바르게 하고 올바른 길을 가며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문화환경을 가꾸면서 진정한 인생의 의의와 가치를 음미하고 성취시켜 가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우주관의 수정과 함께 인생관의 재정립, 이것이 세기의 교체기에 서 있는 우리의 과제요, 선결요건인 것이다. 작금의 부화뇌동하는 대응방식은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本’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토대로 총괄적인 접근을 해 나갈 때에야 비로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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