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3
남명문학의 현장답사기

李令公遺愛碑,
스승이 생각한 참된 官人像

鄭 羽 洛
(경북대 강사 )

올 여름은 참으로 수확이 있었다. 스승이 합천군민을 대표해서 글을 쓰고 군민의 이름으로 세운 비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난 8월 18일 덕천서원에서 있었던 ‘南冥祭' 행사에 참가했다가 대구로 돌아오는 길에 합천의 涵碧樓에 들렀다. 스승이 추구했던 자유를 보고자 함이었다. 스승은 함벽루 앞으로 흐르는 황강의 아득한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장자적 망아의 세계를 의식적으로 추구했다. 그리고 그 사정을 [함벽루]라는 오언절구에 담았다. 함벽루 들보에 걸려 있는 스승의 시를 통해 눈앞에 아득히 번져가는 자유의 세계를 조망하였다. 그리고 입구 오른편 산기슭에 늘어서 있는 비석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태 합천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던, 스승의 언어로 새겨진 비가 저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나의 뇌리를 강타했다. 그리하여 산기슭으로 기어올라가 빗돌 하나하나를 살피기 시작하였다. 중간 지점이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거기 수 백년동안 그의 몸에 이끼를 키워온 빗돌 하나가 나를 보면서 막 숨쉬려 하는 것이 아닌가! 바로 ‘李令公遺愛碑'1)였다. 그 빗돌에 손을 닿는 순간 나는 시간의 뜨거움에 감전되고 말았다. 스승이 두드리는 천석의 종소리가 나의 혈관 속에서 다시 울리기 시작하였다. 마침 오늘이 남명제가 열리는 날이라 스승의 계시가 있는 듯도 하였다. 참으로 오랜만의 해후였다.

이 비는 합천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 李增榮(?-1563)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스승이 군민을 대표해서 쓰고 세운 것이다. 1559년 11월에 세웠으니 지금으로부터 437년전의 일이다. 당시 어디에 세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산재해 있던 합천의 비가 이쪽으로 옮겨지면서 함께 옮겨온 것이 아닌가 한다. 가로 87cm, 세로 202cm, 폭 17cm 의 형식을 지녔으며 비문은 전체 13행, 각 행 평균 25자로 음각되어있다. 이 비문은 대체로 네 단락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관과 민의 이상적 관계, 둘째, 합천군수 이증영과 합천군민의 관계, 셋째, 이증영의 선정내용, 넷째, 군수의 사랑에 대한 합천군민의 도리가 그것이다.

가)에서 스승은 관과 민의 이상적 관계를 부모와 갓난아이의 관계로 보았다. 관은 부모가 갓난아이를 보살피듯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을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바로 합천군수 이증영이라는 것이다. 생각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나)에서 이증영을 부모에 합천군민을 갓난아이에 대응시키고 있다. 타인에 대하여 좀처럼 허여하지 않았던 스승으로선 실로 파격적인 평가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게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스승은 다)에서 찾고 있다. 백성들의 부역을 삭감시키고, 빈민을 구제하여 모두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하였으며, 또한 향약을 일으켜 예의를 알도록 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라)에서는 관과 민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된다면 끊임없이 자애로운 부모와 효도하는 자식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자식된 도리로 이 비를 세워 덕을 기린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증영은 과연 누구인가? 『仁宗實錄』과 『明宗實錄』에 근거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그는 명종이 세자였을 때의 사부였다고 한다. 예로부터 대군은 사부를 보고 절하지 않는 법이었는데, 이증영이 명종의 비범함을 알고 예법의 중요성을 역설하자 명종은 증영에게 절을 했다고 전한다. 명종은 즉위한 후에 그가 행실이 청렴하고 근실하다 하여 活人署 別坐와 主簿(1546년 명종원년), 工曹正郞(1552년, 명종7년), 漢城府 庶尹(1553년 명종8년), 中樞府 僉知(1559년 명종14년) 등을 제수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외직을 맡기기도 했는데 陜川郡守와 淸州牧使가 대표적이다. 합천군수는 한성부 서윤으로 얼마간 근무하다가 중추부 첨지가 된 해인 1559년까지, 청주목사는 중추부 첨지로 얼마간 근무하다가 사망한 해인 1563년까지였다. 그가 죽자 명종은 비통해 하면서 예조에 지시하여 특별히 제사를 지내게 하고 戶曹 判으로 추증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545년 3월에 이증영은 상소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지적하며 개선방안으로 9조목을 제시하였다. 마음을 바로 잡는 것, 장례를 정성껏 치르는 것, 효성과 우애를 돈독히 하는 것, 친족들을 화목하게 하는 것,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 학교를 일으키는 것, 재능 있는 인재를 쓰는 것, 기절을 장려하는 것,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 중 앞의 셋은 修己에 해당하며, 뒤의 다섯은 治人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의 것, 즉 어진 사람을 높이는 것을 더욱 힘주어 강조하였다. 어진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수기와 치인이 함께 온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증영은 합천군수로 있으면서 백성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공적이 인정되어 명종은 그를 당상관으로 승격시켜 중추부 첨지를 제수하였다. 합천군의 선비들 또한 이것을 인정하여 그가 합천을 떠나갈 때 연회를 베풀고 송별시를 지어주며 아쉬워하였다. 權應仁2)은 「松溪漫錄」에서 이때의 사정을 기술하며 그 중의 시 한 구절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스승 또한 이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 한 수를 저서 『남명집』에 남긴다. 「別李學士增榮」이 그것이다.

이증영을 향한 스승의 그리운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1구에서는 한스런 달에 감정이입된 쓸쓸한 자아를, 2구에서는 1구에서 제시한 그 자아를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그리고 3구에서는 육신의 이별을, 4구에서는 마음의 영원함을 노래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육신이 서로 헤어지지만 이면적으로 마음은 항상 만나고 있다는 역설적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다. 스승은 친구도 벼슬을 하면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가는 한 관리에 대하여 이같은 심정을 들어 그를 전송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것은 바로 백성을 향한 이증영의 목민관적 태도에 기인할 것이다.

스승은 백성을 나라의 근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피폐한 백성을 향해 눈물 흘렸다. 그리하여 백성의 곤궁을 목도하면 조금이라도 백성에게 이익 되는 것이 있을까 하여 관리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서 민생구제가 실현되기를 바랐다.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관리 이증영에게 띄운 편지가 있다.3)

위의 자료는 「與李陜川書」의 일부이다. 경남 합천군 쌍백면 육리에서 매부 鄭雲의 장례를 치르면서 가난한 백성 정순경이 어머니가 돌아가셨는 데도 장사를 치르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정을 알고 당시 군수였던 이증영에게 편지하여 관에서 구제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증영 스스로가 장례를 정성껏 치를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거니와 그의 애민적 목민태도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던 터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스승의 결고운 백성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간파하게 되는 것이다.

스승은 백성을 갓난아이 보살피듯한 합천군수 이증영을 통해 참된 관인상을 읽고 있었다. 그에게 친밀감을 느낀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합천군수로 있을 때 백성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합천을 떠날 때 송별시를 지어주기도 하였으며, 떠난 뒤에는 합천군민을 대표하여 공덕비를 세워주기도 했던 것이다. 스승이 이 일을 자임하고 나선 것은 오히려 후임으로 올 여러 관리들을 경계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앞사람을 본받아 뒷사람은 마땅히 백성들을 갓난아이처럼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를 세우고 난 2년 뒤에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되지만 스승의 언어는 빗돌에 남아 수백년동안 합천의 백성들을 지켜왔다. 그리고 참된 관인상을 생각하며 오늘날 우리의 관인 혹은 위대한 도적들을 향하여 백성들의 곤폐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다. 천석의 경종을 울리면서 말이다.

주)

  1. 『南冥集』에는 「李陜川遺愛碑」로 되어있다.
  2. 權應仁은 국내에서는 스승의 시를, 중국 蘇東坡의 시를 제일로 평하였다. 그가 지은 일종의 詩話集인 『松溪漫錄』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에 이증영과 관련된 시화 하나가 전한다. “李侯增榮守陜川, 治平第一, 陜人周怡, 送別詩曰, 萬口是碑安用石? 一言爲 不須金. 古人之言曰, 君子贈人以言, 小人贈人以金, 此一聯, 辭意尤妙”
  3. 스승이 관리에게 백성의 어려운 사정을 알렸던 자료는 『남명집』에 둘이 보인다. 하나는 본문에서 든 「與李陜川書」이며, 다른 하나는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遊頭流錄」이다. 후자의 일부를 들면 다음과 같다. “22日. 碧嶺揷天, 白雲鎖門, 疑若人煙罕到, 而猶不廢公家之役, 粮聚徒, 去來相續, 皆至散去, 山僧乞簡於州牧, 以舒一分, 等憐其無告, 裁簡與之, 山僧如此, 村氓可知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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