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2
남명연원을 찾아서

(4) 東岡 김우옹

李 商 元
(本院 硏究委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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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洲 사람들은 흔히 ‘兩岡’이라는 말을 한다. 양강이란 東岡 金宇 선생과 寒岡 鄭逑 선생을 일컫는 말이다. 두 분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 벼슬과 학행으로 조선 중기 이후에 성주의 대표적 두 인물로 꼽힌다. 두 사람은 南冥 선생의 문하에서 敬義의 旨訣을 들었고 山海學統의 高弟로서도 이름이 높다.

동강 선생의 본관은 義城, 자는 肅夫이고 東岡은 號이며 直峰布衣라는 別號로 불리기도 한다. 고려 金紫光祿大父 太子詹事 龍庇의 후손으로 절제사 文節公 用超의 7대손이며 삼척부사를 지낸 七峰 金希參의 넷째 아들로 중종 35년(1540)에 경북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도실(思道谷)에서 태어났다.

동강은 8살 때 七峰公에게서 문자를 배우기 시작하여 15살 때 沈碑賦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9살 때는 진사가 되고 20살 때 南冥의 高弟인 德溪 吳健이 星洲敎授로 부임하자 그 문하에서 배우기도 하였다. 28살 때(1567) 別試文科에 乙科로 급제하여 承文院權知副正字에 보직되었으나 신병으로 부임하지 않고 선조 5년(1572) 弘文館正字로 入侍하여 임금으로서 興學의 마음가짐을 강론하여 왕의 총애와 예우를 받아 修撰, 應敎를 역임하였다. 선조 6년(1573), 大提學 金貴榮에 의해 金孝元, 許 , 洪迪과 함께 湖堂에 뽑혀 賜暇讀書를 한 뒤 경연관이 되고 直提學, 三司, 兩 , 提學을 거쳐 禮曹, 吏曹, 刑曹參判을 지내고 안동부사가 되어 백성을 사랑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것을 政事의 근본으로 하여 善政을 베풀었다.

선생은 선조 22년(1589) 鄭汝立이 반란을 일으켜 반역하니 그와 가깝다는 이유로 연루되어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었다. 선조 25년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이 풀려 義州行在所에 가서 부호군, 병조참판이 되었고 한성부좌윤, 대사성, 대사헌, 교정청당상, 동지경연사, 부제학, 이조참판을 역임하다가 벼슬을 버리고 仁川으로 물러나니 따르는 學人이 많았다.

동강은 선조 34년(1601) 淸州의 松谷으로 옮겼는데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선조 36년(1603) 11월에 돌아가니 향년 6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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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은 선조 22년(1589)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회령으로 유배되었는데 이 일은 당시 영의정 노수신이 정여립과 선생을 함께 천거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1592년 귀양이 풀릴 때까지 선생은 독서와 저술에 힘썼는데 그 대표작이 續綱目 15권으로 그 각판은 고향인 대가면 사도실 晴川書院에 보관되어 있다. 그 밖에 문집 10권과 경연강의 등의 저서가 있고 玉堂에 있을 때 왕명에 따라 聖學六箴, 存心養性箴을 짓고 귀양에서 풀려 의주행재소에 가서 병조참판으로 복직되었을 때 지어올린 備禦機務七條가 있다.

선생은 부수찬으로 입시하였을 때 선조께서 학행이 뛰어난 인재를 묻기에 동향이며 친구인 한강 정구를 천거하여 그를 출사하게 하였으며 1583년 대사간으로 있을 때 병조판서 李珥의 직무상의 과실을 탄핵하다가 유배된 朴謹元, 宋應漑, 許 등의 遠地 유배가 과중함을 영의정 노수신과 함께 주청하여 구하였다.

그리고 1589년 崔永慶이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무고를 입고 정철의 국문을 받다가 억울하게 옥사한 것을 대사헌으로 있을 때 상소하여 그 억울함을 신원하게 하고 좌의정 尹斗壽·우의정 兪泓이 용렬 무능하고 사리사욕을 탐하며, 정철이 어진 사람을 죄로 얽어 죽인 것을 논박하였다. 또한 선조 31년(1589) 柳成龍이 영의정으로서 무고를 입어 장차 불측한 화를 당하게 된 것을 위험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그 억울함을 풀어주었다.

선생은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회령으로 귀양가면서 함경도 마천령에서 重峰 趙憲을 만났는데, 그가 “이곳에 오니 후회되는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公論은 마땅히 후세를 기다릴 일이지 어찌 한 때의 위세로써 그 옳고 그름을 정할 것이냐”란 말로 대답하였다. 이와 같이 동강의 성품은 호방하고 남의 억울함을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의를 보고서 감연히 일어섰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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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년 11월 선생이 돌아가시자 조정에서는 선생에게 扈聖功臣으로 이조판서, 대제학을 증직하고 숙종 때 文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선생의 행장은 동향의 친구이자 동문인 한강 정구가 지었고 그 끝에 장현광이 덧붙여서 행적과 선생의 기개를 더 적어넣었으며 神道碑는 선생의 묘소가 있는 대가면 옥화동 능꼴마을에 세워졌는데 이조판서 葛菴 李玄逸이 글을 짓고 영의정 眉 許穆이 전서로 썼다.

성주의 晴川書院과 檜淵書院, 회령의 鰲山書院, 청주의 鳳溪書院, 경성의 咸池書院, 종성의 東岡祠에 제향되었으며, 특히 청천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동짓달 열 나흩날 유림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서원 옆에는 선생의 가묘가 있고 서원 앞 書庫에는 續綱目 10권과 문집 5권의 각판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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