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1
남명학파 고문헌 소개(4)

『葛 川 集』

金 敬 洙
(本院 事務局長)

1. 著者 및 刊行經過

4권 2책의 木版本으로 된 『葛川先生文集』은 3권까지는 葛川 林薰의 詩文을 묶었고, 4권은 行狀, 墓碣 및 祭文을 수록한 책이다.

갈천 임훈선생은 燕山君 6년(1500) 7월 15일에 父 進士 石泉公 得蕃과 晉陽 姜씨(壽卿의 女)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本貫은 恩津이고, 字는 仲成이며 號는 自怡堂인데 뒤에 枯査翁으로 고쳤다. 세상 사람들이 葛川선생으로 불렀으나, 이는 그의 曾王父인 諱 天年公이 함양으로부터 安陰(현 安義)의 갈천동으로 이사와서 살았던 地名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는 지극한 孝行과 뛰어난 학문, 그리고 백성들의 民生苦를 걱정한 牧民官으로서 선비들의 師表로 추앙받으면서 일생을 살다가 선조 17년(1584)에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85세의 長壽를 누리고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선생의 행적을 門人인 進士 陽 鄭惟明이 쓴 行狀과 그의 아들인 桐溪 鄭蘊(1569-1641)이 쓴 墓碣에 따라 간략히 서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선생의 효행은 어려서부터 남달라 5, 6세 때에 이미 부모의 시중을 잘 받들었으며, 27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아우들과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자신의 나이가 60이 넘어서도 부친을 봉양함에 한치의 어김도 없이 즐겁게 해드렸으며, 석천공이 돌아가시자 역시 3년의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러한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鄕人들이 監司에게 이를 보고하여 표창하도록 청하니, 스스로 「孝라는 것은 정성이 實이고 禮는 虛입니다. 예가 비록 극진해도 정성이 징험이 없으면 효라고 말할 수 없는데 하물며 예 또한 볼 것이 없음입니다.」 라고 하여 사양하였다. 그 뒤 1564년에 明宗이 아우인 瞻慕堂 林芸과 함께 旌閭를 내리니, 이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내린 것으로 이른바 生旌閭라고 하여 가장 영예로운 일로 꼽는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大學』의 修己와 『中庸』의 덕목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그리고 선비들이 중국의 역사만 알고 우리의 역사를 모르는 병폐를 지적하여 東史를 강조하였다. 41세에 生員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는데 행동거지가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그 덕망으로 54세 때 성균관의 추천으로 社稷暑參奉에 처음 제수되어 벼슬길에 나아가게 된다. 이로부터 集慶殿, 濟用監, 典牲暑 등의 참봉을 거쳤다. 67세 때에는 명종이 특별히 學行이 뛰어난 선비 6명을 뽑아 6품직에 제수하였는데 선생이 그 가운데 한 분이었다. 이 때 선생은 彦陽縣監을 거쳐 比安현감을 지내면서 善政을 베풀었다. 이어 지례현감, 공주목사, 掌樂院正의 벼슬을 받았지만 나이가 많아 사양하였는데 83세에 마지막으로 정3품 通政大夫 掌隸院判決事에 제수되었다.

선생은 언양현감으로 나아가 백성들의 궁핍한 생활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 잘못된 폐단을 해결할 내용들을 6가지로 분류하여 상소하였으며, 그 외에도 몇 차례의 封事를 통하여 민생을 구제할 계책들을 올렸으니 그의 愛民정신을 살필 수 있다.

선생은 평생 玉溪 盧 과 信交를 가졌으며, 퇴계 이황과도 교분이 있었고, 뒤에서 살피겠지만 남명선생과 각별한 교유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2년 후(1586)에 儒林에서 龍門書院을 세워 아우와 함께 향사를 드렸으며, 이 서원은 1662년에 賜額되었다. 그리고 약 200년 후인 1861년에 吏曺判書가 추증되고, 이어 1871년에는 孝簡이라는 諡號를 받았다.

이 책의 간행경과에 대해서는, 특이하게도 이 책은 구체적인 간행사실을 알 수 있는 跋文이 없어 정확한 내용을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이 책이 大賢들의 문집에 어울리지 않게 분량이 적은 것은, 行狀에 「선생은 젊어서부터 저술이 많지 않았으며 중년 이후에도 상소문과 편지글 외에는 별로 없었다. 혹시 碑文이나 墓誌도 부탁하면 응하는 경우가 적었고, 젊어서부터 시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만년에 흥취가 일어 읊는 작품도 맑고 渾厚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라고 한 사실에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간행시기는 당대의 거유인 尤庵 宋時烈(1607-1689)이 쓴 서문의 끝에 崇禎 乙巳 陽月 日이란 年記가 붙어 있음을 미루어 볼 때, 1665년 10월 경으로 짐작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용문서원이 사액된 때와 멀지 않음으로 선생에 대한 현창사업의 일환으로 봄이 무난하겠다.

2. 체재 및 내용상의 특징

『갈천집』의 체재는 다른 문집들과 비슷하게 꾸며져 있다. 첫머리에 송시열의 서문이 있고, 권1에는 詩가 수록되어 있는데 오언절구 6수, 오언율시 6수, 칠언절구 17수, 칠언율시 2수, 그리고 挽詩 11수 외에 賦 3수가 실려 있다.

여기서 詩 제1수가 「花林洞月淵岩次南冥韻」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이 시는 갈천이 67세 되던 해에 남명이 방문하여 함께 그 곳의 절경을 구경하면서 읊은 것이다. 남명은 그 전에 갈천이 父親喪을 당했을 때도 弔文하러 가기도 하였는데, 이 때에는 이미 3년상을 마치고 난 뒤로 『남명선생년보』 66세 條에 「3월에 선생은 옥계 노진, 개암 강익을 만나 갈천선생 형제를 방문하여 함께 玉山洞을 유람하였다」고 되어 있으며, 이 당시에 인근의 모든 선비들이 다 모였고, 이 자리에서 남명은 성리학에 대한 강론을 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시가 次韻한 남명의 시는 다음과 같다.

또한 갈천은 남명의 죽음에 73세의 나이로 挽詩를 지어 보냈으니,

이 시를 보면 갈천이 남명의 뜻을 얼마나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더불어 남명의 인품을 漢나라의 嚴光에 비유하여 그 지조를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권2에는 민생을 구제할 방책과 국왕에게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는 요점을 담은 자신의 상소문 4편과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쓴 상소문 2편이 있으며, 이어 뇌계 兪好仁과 先府君 및 옥계 노진의 行狀 3편이 있고, 그 다음에는 각종 서문 3편과 편지글 3편이 실려 있다.

권3에는 祭文, 通文이 있고, 이어 「兪子玉遊頭流錄後」와 「登德裕山香積峯記」가 있으니 朝鮮朝 山水遊覽錄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그 다음에 陋巷記, 龍門記, 仁政殿記, 南薰殿記 등의 기문이 있고, 이어 靈覺寺重創記, 三水菴重創記가 있으니 권2에 있는 送澄上人遠遊序와 더불어 불교와 관계된 글로써 그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끝에 文獻公 一 先生祠堂記가 있고, 拾遺篇에 墓碣이 하나 붙어 있다.

권4에는 정유명과 그의 아들인 정온이 쓴 행장과 묘갈이 연이어 있고, 제문 2편과 挽詞 2편이 있으며, 책의 맨 끝에는 壬寅年 2월 초 8일에 知製敎 李殷相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는 賜額祭文이 있으니 곧 1662년 용문서원이 사액될 때의 글이다.

『갈천집』은 강우학파를 연구하는 자료에 있어 상당히 초기의 문집으로 꼽을 수 있으며, 당시에 갈천선생이 이 지역에서 차지했었던 위상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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