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남명제 강연문
南冥先生의 政治思想과 言路
曺 康 煥
(東亞日報 論說委員)
사람이나 자동차가 다니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배가 다니는 물길도 있고 비행기가
다니는 날길(항로)도 있습니다. 남편, 아내의 길이 있고 군인의 길, 스승의 길이
있으며 사람으로서의 가야할 길이 있는가 하면 마음의 길도 있고 말에도 길이 있는
것입니다.
言路 - 그것이 바로 글자 뜻 그대로 말길입니다. 이 말길 또한 다른 길들과 마찬가지로
탄탄대로가 있고 가시밭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언로는 탁 트여 있어야
하고 암초도 없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국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디 언로란 “군주나 정부에 바른 말을 하는 길”이었습니다. 史略에 폭정이
극심했던 주나라 勵王에게 간하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防民之口 甚於防川”(대저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내를 가로막는 것 보다 더한 것입니다)
내를 어거지로 막으면 터지게 되고 터지면 인명손상은 물론 재산손실도 엄청납니다.
백성들의 입을 막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를 다스리는 사람은 물이 흘러 내리도록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들이 생각하는 대로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충신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주나라 勵王은 계속 백성들의 말길을 막다가
드디어 폭동이 일어나고 여왕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언로와 관련, 조선조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 靜庵 趙光祖입니다. 정암은
中宗에게 “언로의 통함과 막힘이 곧 국가대사와 직결됩니다. 언로가 통하면 나라가
편안하고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합니다”고 진언했습니다.
敬과 義로 대표되는 남명의 심오한 학문탐구, 후학양성, 선비정신 정립등 선생이
끼친 업적은 이를데 없이 드높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백성과 군주간에 언로를 트는데
있어서도 선생은 조선조 그 어느 학자 못지않게 큰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백성들에
대한 걱정으로 평생을 보낸 선생은 백성들의 뜻을 조정에 전해 나라를 바로 잡는
일이라면 그 누구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선생은 그 당시 벌써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민주적 사고방식으로 항상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면서 임금에게
무려 7차례나 상소를 올렸습니다.
상소문 중에 1555년 단성현감의 벼슬을 사양하면서 明宗에게 올린 丹城疏가 유명합니다.
여기에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殿下의 국사가 그릇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들의 마음 또한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비유컨데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한테 파먹혀
진이 다 빠지고 말라 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돼 버린지 이미 오래입니다.
소관들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들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오직 뇌물 긁어 모으는데 혈안입니다. 뿐만 아니라 內臣들은
파당을 일삼아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外臣들은 향리에서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백성들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은 장탄식만 나올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르기 수차례였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밤이면 잠 못이룬지가 오래입니다.
나라가 이 지경이고 보면 慈殿(대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나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 어린 선왕의
한 외로운 자식일 뿐입니다. 천백 가지 天災를 어떻게 대비하고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무엇으로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 힘도 없는 신은 이럴 때를 당하여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없고 아래로는 터럭만큼도 백성을 구제할 수 없으니 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전하의 벼슬을 도적질해서 그 녹만을 먹으며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근자에 변방에 변고가 있었으나 모두가 매관매직을 일삼고
재물을 수탈하는 데에만 혈안이어서 민심이 흩어져 쓸만한 장수도 없게 되고
성안에 병사 한 사람 남아 있지 않게 되었으니 적이 무인지경으로 쳐들어 온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하찮은 피부병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과
속의 병은 그 보다 더 심각합니다.
국사를 정돈하는 요결은 오직 전하께서 한번 크게 마음 먹기에
달려있습니다. 하오나 전하께서는 전하가 하시려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
말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그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활연히 깨달으시어 분연히 학문에 진력하사
明德, 親民의 도를 얻으신다면 거기에 萬善이 갖추어져 있어 백가지 응변책이
연이어 나올 것이니 그것으로 대비하시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날 전하께서 왕도에 치력하신다면 그때에는
미관말직이라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직분을 다할 것입니다…“
선생이 宣祖에게 마지막 올린 헌책은 그 내용이 가장 요긴 적절한 것이기에 여기에
일부를 발췌 소개합니다.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남에게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 자신이 선을 밝히고 몸을 정성스럽게 하는데 그 要本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性情 속에 萬理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仁義禮智가 곧 그 體요, 萬善이
그體로부터 나옵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이 작당하여 좀도적질을 하면 포졸에게
잡아들일 것을 명하면서 벼슬아치들이 도적질하여 나라를 쇠진케 하는데 대해서는
言官이나 사직당국도 이를 추궁하지 않습니다. 일개 관헌이 이를 규찰하려 하면
이내 그에게 죄를 씌워 파직시켜 버립니다.
전하께서 하늘이 굽어보듯 노하시어 왕권의 위엄을 떨치시고
舜이 四兇을 물리치고 孔子가 少正卯를 죽인 것처럼, 친히 재상과 집사들을 조사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고 직접 처단하신다면 그들은 임금이 악을 증오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백성들도 죄악을 범하는 것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이 글을 받은 선조는 “근자에 올린 글을 늘 좌우에 두어 읽고 있습니다. 그
‘格君之非’하는 말에 감동되어 내 비록 불민하오만 유념할 것입니다”고 답했습니다.
이 밖에도 조정에서 부르는 命을 사양하는 소장, 무진봉사, 식물선사에 대해 사은하는
소장 등이 있습니다. 모두가 국가의 난국과 도탄에 빠져 허덕이는 백성들을 염려하는
글들입니다.
상소문에 나타나 있듯이 南冥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기본적인
개념은 우국과 위민입니다. 우국과 위민은 정치론에서 실천적이며 진보적인 민중정신으로
이어집니다. 이같은 사상은 유학의 전통적인 정치사상의 중심적 이념들인 ‘王道論’‘民本論’‘愛民論’등에
바탕을 두고 표출된 것입니다.
선생은 王의 德에 의한 통치론을 긍정하면서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주의 明德에 의한 통치론에 자신의 모든 사상을 위탁한
것은 아닙니다. 선생의 정치사상의 중심축은 君측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民측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民측 중시의 사고방식에 바탕을 둔 선생의 정치사상은
결국 국가의 근본은 民측, 즉 백성편에 놓여져야 한다는 유학의 ‘민본론’‘애민론’에
귀결되어 있읍니다.선생의 민본 애민정신은 ‘民巖賦’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시는 백성을 물과 바위, 천심에 비유해 지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몇
구절을 인용해 봅니다.
“배가 물위를 가기는 하나 뒤집어지기도 한다. 백성이 물같다
함은 백성이 임금을 모시지마는 나라를 뒤엎기도 한다”
“물은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풍랑이 있어 가까이하기 어렵다.
마음은 볼 수 없는 것이지만 험함이 안에 있어 없신여기기 쉽다”
“한 사람의 필부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음은 매우 하찮은
것이지마는 그러나 그것이 밝게 비쳐지는 것은 하늘이 그것을 보고 듣기 때문이다”
“桀, 紂는 湯, 武에게 망한 것이 아니라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해 망한 것이다. 한나라 劉邦은 소시민이었고 진나라 2세 황제는 큰임금이었다.
그런데도 필부와 만승이 바뀌었으니 이런 큰 권한이 어디 있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백성의 손에 있는 것이니 가장 두렵지 않은 것이 가장 두려운 것이다”
선생은 주종관계에 있던 君臣관계를 횡적 雙務관계로, 늘상 官에 짓밟히던 民生을
民本의 위치로 끌어 올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선생은 이 시에서 물이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는 것처럼 백성은 군왕을 추대하기도 하고 정권을 뒤엎기도 한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또 물은 백성이요, 배는 임금이며 물은 평탄할 때도 있고
격랑이 일 때도 있으며 배는 물 위를 순항할 때도 역행할 때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배는 ‘물 위에서의 배’이지 물이 ‘배의 물’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배는 물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고 물을 무서워 할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선생은 정치사상에 있어 다소 관념적이었던 당시의 성리학자들의 사상체계에서
탈피하여 정치적 관심의 중심을 현실사회와 민중의 세계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대권이 백성의 손에 있다는 선생의 확고한 인식에는 선각적 진보성이 뚜렸합니다.
왕실에 대한 호칭에서도 전통적 맹종이나 종래의 관념적 인식에서 탈피하고 있습니다.
대비를 ‘一寡婦’로 , 군주를 ‘一孤嗣’로 부른데서 그같은 인식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군주에게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백성에게는 무조건적
복종만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뒤에 茶山 丁若鏞의‘湯論’에
이어 민권사상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당시 조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선생을 벼슬에 불렀는데도 선생이 끝까지 나아가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허명으로 선비를 유혹 농락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매번 사직소를 올릴 때마다 허명을 들어 왕명을 꼬집어 사양했던 것이며 경륜을 펼
수 있는 정국이 조성된다면 언제라도 벼슬길에 나아가겠다고 한 것은 허명에 팔려서는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과시한 것입니다.
그 당시 선비들은 기묘 을사사화 등으로 풀이 죽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경우
세상을 외면하는 隱逸로 흘러 나라와 민생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어떤 불의를 보아도
수수방관하는 유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선비들도
벼슬아치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대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바로 선생이 제시해 주고 또 그것을 실천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선비들이 본래의
사명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 전환시켜 놓았으니, 선생의 핵심적인 사상은 바로 현실정치를
비판하고 역사문화를 이끄는 주체로서의 선비정신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선생은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도 秕政과 관의 타락과 횡포를 비판하며 국가안위와
민생을 위해 건실한 방책을 올림으로써 종래 재야선비들이 취했던 은일의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선비가 사회국가 속에서 해야할 직분을 솔선 수행했습니다. 선생은
바로 사존관비의 풍토를 조성한 것입니다.
선생의 이런 행적들은 7차례의 상소와 그 내용에서 여실히 나타났습니다. 즉 언로를
터 백성의 처지를 군주에게 직소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백성과 집권층간의 직통
언로를 통해 군주가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도록 했습니다. 물론 선생만이 상소를
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임금에게 보내는 상소는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쪽같은
현실비판, 용기있는 현실진단과 함께 왕도와 친민의 바른 길 등 과감한 대안 제시가
담겨져 있는 선생의 잇단 상소는 백성과 군주사이의 직통 언로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선조대왕까지도 선생을 “언론을 발함에 있어 의기가 순정하고 말씀이 엄했다.
누가 말했던가 이는 봉황의 소리라고. 모든 사람의 입에서 자갈을 벗겨 간신들의
뼈를 서늘하게 하였고 뭇 벼슬아치들의 얼굴에 진땀이 흐르게 하였다. 위엄은 종사에
떨쳤고 충성스런 분노는 조정을 뒤흔들었다”고 칭송했습니다.
尤庵 宋時烈도 선생의 인품에 대해 “만길 벼랑에 서서 일월과 빛을 다투는 기상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경하는 마음을 자아내게 한다”고 추앙했습니다.
선생은 군주보다 민생을 앞서 생각하고 항상민권을 주체로 여겼습니다. 선생은 이 모든 것을 언로를 통해 임금에게는 물론 온 나라에 널리 알렸습니다. 선생이야 말로 고매한 학자에 머무르지 않고 언로를 통해 민생 민권 민주주의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선구적 정치 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각도에서 선생을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