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선생사전(4)

신산서원기

배대유(1563-?)
번역 이창호(진삱서숙)

金海古駕洛國也 地望之雄 甲於嶺南 而酒府洞 最居上游 爲一境 區 南冥先生 聿來構亭 扁以山海 藏修涵養 三十年于玆 蓋我東之濂洛雲谷也 往在戊子 鄕人請建書院 方伯尹根壽 邑宰河晋寶 議以克合 卜基于亭之東麓下 安正字憙 尸其事 事垂 訖 于兇鋒 戊申春 安君與黃世烈許景胤兩秀才 就亭之遺址 爲構計 士庶協力 越二年成 上命賜新山額 環拱皆山 而必取新山者 以其名最雅 而獨爲宗也 余嘗按事東萊 聞院宇經始 試往造焉 結構宏緻 位面淸壯 三叉七點 鉅野大海 雄奇勝絶 自成別界 殆造物兒戱劇 而 秘之 以有所待也 噫 先生之道 繼往開來 天地之化 關盛衰之運 彼名區之以先生顯數也 爲亭爲院宇 亦數也 觀夫新山與德川龍岩 先後迭興 東西鼎峙 而又有白雲密邇京師 使四方萬世之士 得有依歸之地 彼天地不欲喪斯文 果如何哉 誠使爰處者 志先生之志 學先生之學 爲忠臣 爲孝子 爲君子儒 則於觀感興起之道得矣 如或 敬義之訓 昧進修之方 群居以荒嬉 毁行而 利 則 豈但自暴之憂 實吾黨之羞 其可懼哉 其可戒哉 昔我先祖 從先生最早 連床咬菜 多在山海 小子生晩 長以未及門爲恨 去歲 寫先生神道碑 祗謁德川 廟庭 第二卽次磨 取李山立龍岩書院 示余日 諸院 必有記識顚末 請以新山相屬 余以蔑學辭 今春又請又辭焉 曺君旋至洛 袖圖若誌 請之深勤 余以三讓爲太刻 仍念 先生之德 如摹天然 固不敢贅一辭 至如 建之跡 余旣得其詳矣 尙 來者 知作之所始遂 爲之記

萬曆四十六年 侍講院輔德 裵大維 撰

김해는 옛날 가락국으로 웅장한 명망이 영남에서 으뜸인데 주부동이 제일 상류에 자리하여 경내의 오지였다. 남명선생이 드디어 찾아와 정자를 짓고 산해라 편액하여 30년 동안 여기에서 장수함양하였으니 대개 우리 동방의 염락 운곡이다. 지난 무자년에 향인들이 서원 건립을 청하자 방백 윤근수와 읍재 하진보가 의논하여 정자의 동쪽 기슭 아래에 터를 정하고 정자 안희가 그 일을 주관하였으나 일이 거의 끝날 무렵 왜구의 병화에 소실되었다. 무신년 봄에 안군이 황세열 허경윤 두 수재와 더불어 정자의 옛 터에다 서원 지을 계책을 세우더니 사서인이 협력하여 2년만에 완공하였다. 주상이 명하여 신산이란 편액을 하사했으니 주위가 모두 산인데도 반드시 신산을 취한 이유는 그 이름이 제일 단아하고 主山이기 때문이었다. 내 일찍이 동래를 다스릴 때 院宇를 짓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니 규모가 굉장하고 뛰어난 경치는 별계를 이루었는데 마치 조물주가 장난으로 이를 숨게 놓고 기다린 듯 하였다. 아! 선생의 도는 옛 성현을 계승하고 후학을 인도하여 천지의 조화에 참여하며 성쇠의 운수에 유관하니 저 명승지는 선생에게 드러난 운수요 정자도 원우도 또한 운수의 소관인 것이다. 살펴 보건대, 신산과 덕천 용암 세 서원은 선후하여 일어났고 동서로 정립했으며 또 백운서원이 경사와 인접하여 사방만세의 선비들로 하여금 귀의할 곳이 있게 하였으니 저 하늘이 사문을 폐하고자 아니 함이 과연 어떠한가! 참으로 이에 거처하는 이들로 하여금 선생의 뜻을 삼고 선생의 학문을 배우게 하여 충신되고 효자되고 군자유가 된다면 감응하여 분발하는 도리를 얻게 될 것이다. 만약 혹 경의의 교훈에 어리석고 진수의 방법에 어두워 모여서 방탕하기만 하고 제멋대로 세속의 이익만 좇는다면 어찌 단지 자포자기의 근심뿐이리요, 참으로 오당의 수치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며 경계하지 않겠는가! 예전 우리 선조께서는 제일 먼저 선생을 따라 밥상을 함께 하고 나물을 씹으며 산해정에 오래 계셨으나 소자는 늦게 태어나 자라서도 문하에 들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지난 해 욕되이도 선생신도비를 베끼면서 공경히 덕천묘정을 배알했더니 둘째 아들 차마가 이산립의 용암원기를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서원에는 반드시 기문이 있어 그 전말을 기록하니 청컨대 신선서원 기문을 부탁한다”고 하기에 내 蔑學이라 사양했다. 올 봄에 또 청하기에 다시 사양했으나 조군이 이내 한양으로 와서 圖와 誌를 보이며 청함이 매우 절실한지라 내 세번이난 사양함은 너무 각박하다고 여겼다. 인하여 생각컨대 선생의 덕은 천연을 닮아서 참으로 감히 한 마디도 덧붙일 수 없으나 창건 사실은 내 이미 상세히 알고 있기에 오히려 후인으로 하여금 건립의 시초를 알게 할 수 있으니 드디어 이를 기록한다.


편집자 주 :
신산서원은 덕천·용암서원과 더불어 같이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다시 중건되었다가 고종 때 훼철되었다. 이후로 몇 차례 복원을 위한 논의가 있었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아쉬운데, 하루 빨리 복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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