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3
남명문학의 현장 답사기

黃溪瀑布 2,
잣나무와 국화,그 영원한 정신이여

鄭 羽 洛
(경북대 강사 )

사물은 저마다의 모습과 성격이 있다. 모습을 物容이라 하고 성격을 物性이라 한다. 물용은 다른 많은 사물들과 구별되는 표면적 모양이며, 물성은 이면적 성질이다. 잣나무와 국화 역시 이 두 요소를 갖추고 있다. 즉 잣나무의 물용(木容)은 하늘을 찌르듯이 굳건히 버티고 서 있는 나무의 모습이며, 물성(木性)은 기개이다.눈을 이기고 꿋꿋하게 사철 푸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화의 물용(花容)은 태양을 닮은 꽃의 모습이며, 물성(花性)은 절개이다.1) 서리를 이기고 가을에 피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물용도 물용이지만 물성을 더욱 사랑했다. 즉 그 사물이 지닌 이면적 성격을 더욱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사물에 견주어 높이고자 할 때 작가들은 다른 나무나 꽃 보다 잣나무와 국화를 작품의 소재로 자주 활용하였던 것이다.

잣나무는 소나무와 함께 기개라는 물성을 지녔다. 『論語』「子罕」篇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라고 한 공자의 말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또한 신라 시대의 승려이었던 忠談이 지은 향가 「贊耆婆郞歌」에서도 이같은 사실은 잘 나타나 있다. 충담은 이렇게 노래했다.

이 노래는 천상의 풍경(달, 구름)과 지상의 풍경(냇물), 즉 우주적 공간이 한 작품안에 융합되어 있다. 특히 9구의 ‘잣나무'는 중요한 의미 기능을 한다. 천상 공간과 지상 공간을 이어주면서 기개있는 기파랑의 영웅상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직의 기하학적 선을 나타내 보이는 상록의 꿋꿋한 기상, 그것은 바로 잣나무가 지닌 불멸의 물성인 것이다.

국화 역시 잣나무와 일정한 정신적 교섭을 벌이면서 절개라는 물성을 지녔다. 국화는 百花가 모두 시들었을 때 홀로 서리를 이기고 피어나니 지조와 절개를 갖추고 있다고 믿었다. 또한 국화는 그 모양이 태양 같으므로 양으로 충만한 重陽節(重九, 음력 9월 9일)이되면 선조들은 賞菊, 登高, 詩酒로 이날을 즐겼다.2) 당연히 국화가 대표적 시제로 떠오르고 그 물성은 부각되었다. 중양절이 아니더라도 국화의 물성은 자주 시인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시조 시인 李鼎輔(1693-1766)의 詠菊歌는 대표적이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이 작품에는 ‘삼월동풍’과 ‘낙목한천'의 대조를 통해 국화가 지닌 정신적 가치가 여실히 표현되어 있다. 서리를 능멸하는 절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물성 때문에 선비들은 국화를 사랑하여 영창에 떠오른 달이 菊花盆에 비치기라도 하면 아이를 불러 술을 내오게 하곤 꽃잎을 따서 술잔에 띄워 놓고 국화분을 어루만지며 국화의 물성을 체득하려 했던 것이다.

스승은 이같은 잣나무와 국화가 지닌 물성, 곧 기개와 절개를 생각하며 지금의 합천군 용주면 황계리에 있는 황계폭포에 올랐다. 여기서 우리는 잣나무와 국화를 통한 정신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충담은 스승보다 앞 시대의 사람이고 이정보는 스승보다 뒷시대의 사람이니 일련의 사적 맥락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짙푸른 나무들이 천을 향해 마음껏 아우성치는 여름을 보내고 나뭇잎들이 단아하게 물들었을 때 스승은 金宇宏 등의 제자들을 데리고 황계폭포를 찾았다. 그리고「遊黃溪贈金敬夫」라는 시를 지었다.

敬夫는 金宇宏(1524-1590)의 字다. 김우굉은 남명과 퇴계의 문인으로 그의 스승보다 23세 연하였다. 호는 開巖인데 삼척부사를 지낸 七峰 金希參의 둘째 아들로 東岡 金宇 의 둘째 형이었다. 그는 1565년 경상도 유생을 대표하여 여덟 차례에 걸쳐 중 普雨의 주살을 상소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1589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는데, 그해에 동생 우옹이 정여립의 옥사에 연좌되어 안동의 임지에서 회령으로 귀양가게 되었을 때, 영천으로 달려가 동생에게 갓과 옷을 벗어 주고 시 한 수를 지어 주며 이별하였다 한다. 또한 대사간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옥송을 결정한 형조판서를 당당히 탄핵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스승은 김우굉의 이같은 점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위와 같이 노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첫째 작품은 잣나무로 정신의 영원성을 나타냈다. 1.2 구에서는 시간적 배경이 제시되어 있다. 즉 노경에 이른 스승 자신, 그리고 방문한 때는 가을이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날리며 가을 단풍 아래서 잣나무의 영원성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4구에서 보이는 것 처럼 지초와 난초는 군자에 비유되는 물성을 지니기는 했으나 스승은 잣나무의 꿋꿋한 모습을 더욱 좋아하였다. 아마 도 지초나 난초의 개결성보다 잣나무의 강건성을 더욱 사랑하였기 때문이리라.

둘째 작품은 국화로 정신의 영원성을 나타냈다. 1.2구에서 보이는 것처럼 흔히 사람들은 가을 정경을 스산하다고 한탄하지만 사정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아직 봄 뜻이 국화에게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스승은 국화를 통하여 가을에 봄향기를 만난 것이다. 그 향기는 하늘과 땅에 가득하고 코끝에서 진동을 한다고 3구에서 밝히고 있다. 비록 비단이 아름다운 것이긴 하지만 국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국화가 지닌 정신적 측면을 드높혔다. 스승은 황계마을 정도에 거처를 정하고 폭포를 구경하기 위하여 산에 올랐을 것이다. 황계마을은 현재 金寧 金氏를 중심으로 다양한 성씨들이 살며 50여호로 구성되어 있는데 폭포는 그 마을 뒤에 있다.3) 황계폭포는 흔히 중국의 廬山瀑布와 견주었다. 이 때문에 金寧人인 金在權, 金炯碩이 황계폭포 바로 아래 집안 사람 들과 더불어 선조들이 노닐던 곳이라며 정자 2칸을 얽고 이태백의 「望廬山瀑布」의 제1구인 ‘日照香爐生紫煙'에서 ‘紫煙'을 따서 이름을 ‘紫煙亭'이라 하였다. 스승은 황계폭포를 보면서 가변적인 인간의 심성과 불변하는 자연의 이치에 대하여 사유하였다. 그리고 자연에서 인간의 영원한 정신적 가치를 발견하였다. 기개와 절개가 바로 그것이었다. 스승의 생각이 이같았으므로 우렁차게 떨어지는 폭포를 보고 다시 그 주위에 있는 잣나무와 산국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사물들이 갖는 정신적 유기성을 생각했을 것이다. 즉 수 천년을 곧게 떨어지는 물 줄기에서 영원성을 찾아내고 이 영원성이 잣나무의 수맥을 통하면 하늘을 뚫고 솟아오르는 장엄한 기개가 되고, 국화의 수맥을 통하면 혹독한 서리의 시련을 이기고 홀로 봄향기를 전하는 절개가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 셋은 인간 정신의 영원성으로 규정되면서 언제나 우리의 의식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폭포는 한 번 떨어지면 다시 떨어지고, 몇 백천줄기의 흐름이 되는가 하면 또 다시 모여 물보라로 공중을 역류한다.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고 무지개를 띄우기도 한다. 신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힘이 여기에 숨어 있는 듯 하다. 금속같은 절벽을 수직의 빛으로 가르며 수천년을 포효한다. 그리고 자연의 이치를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으로 가르친다. 사물이란 흐르는 것이라고, 흘러서 영원히 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영원한 흐름 속에 곧추선 인간 정신의 위대함이 요약되어 있다는 것도 가르친다. 구차히 따르거나, 구차히 가만있지 않는 기개와 혼탁한 세상을 서릿발로 조감하는 절개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스승이 우리의 비겁한 일상을 향하여 던지는 비수가 아닐 수 없다.


 주)
  1. 기개는 씩씩한 기상이며, 절개는 불변의 태도이니 이 둘은 같은 의미망을 거느리고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하여 기상과 불변에 주목하기로 한다. 두 물용과의 연결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2. 스승이 重陽節 詩酒의 풍속을 읊은 것은 「淸香堂八詠」중의 하나인 「霜菊」이 대표적이다. 들어보자.옅은 이슬 찬 국화 수많은 송이에 맺히고(薄露凝寒菊萬鈴), 일렁이는 향기 온 데 퍼지나 뜰 가운데가 가장 짙다네(活香多處最中庭). 높은 당에서 때때옷 입고 춤추는 중양절에(高堂綵舞重陽節), 사람 얼굴 맑은 술잔에 비스듬히 비치네(人面橫斜酒面淸).
  3. ‘황계'는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합천군 용주면의 황동과 택계동이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이때 삼가의 대평동 일부도 황계마을로 병합되었다. 『한국지명총람』10(경남편.부산편Ⅲ),한글학회,1980.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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