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월담 정사현의 선비정신

韓 相 奎
(本院 常任硏究委員)

1. 선비의 정신세계

옛부터 중국에서 내려온 선비에 대한 개념과 그 자질을 논할 때, 선비된 자는 효(孝)와 교(敎), 그리고 사(仕)에 관하여 지켜야 할 수신계가 있다. 첫째, 불효(不孝)해서는 안되며, 첩을 본처로 삼지 말고 제후가 인정한 후계자를 바꾸어서는 안 된다. 둘째, 현자(賢者)를 존중하고 재능을 길러서 덕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국빈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고 하여, 선비된 자는 학식과 덕행을 갖추어야 하며 끊임없이 자기발전을 위해서 힘쓰는 삶의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므로 공자도 선비(士)에 대하여 세가지 뜻으로 말하였다. 즉 선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염치를 알아야 하며 절조를 지켜 나라에 보답하는 충(忠)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효자라는 칭찬을 듣고 이웃을 교화하는 계기를 주면서, 자신에게는 언어에 신의가 있고 행동에 과단성이 있게 된다면 의지가 굳세어서 스스로 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비된 자의 인성과 행위를 논하였다. 이런 의미에 부합할 수 있는 자질 함양은 주자학(朱子學)의 보편주의적 성격에 근거한 본연의성(本然之性)을 회복하는 공부가 요구된다. 그 실천적 학문 영역으로 소학(小學), 대학(大學),중용(中庸)의 덕목을 생활화하는 정신적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

무릇 선비는 젊어서 독서하고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장년이 되면 조정에 나아가 행도(行道)한다는(『맹자』,「梁惠王章句」 幼而學之, 壯而行之)일정한 과정에 뜻을 두고 있다. 그러나 시세에 따라 벼슬에 나아가든지 향리서 교학에만 힘을 쓰든지 간에 도학을 숭상하는 학자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참 선비의 정신세계이다. 이러한 정신적 고향을 대변해 주는 조선시대 유자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면 강우(江右)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명학파(南冥學派)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사림(士林)은 소학(小學)의 생활윤리를 실천화하는 방도로 삼으면서 대학(大學)으로 존양하는 가운데 향리에서 민풍교화(民風敎化)에 역점을 두고 있다.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은 바로 이와 같은 전통적인 산림처사로써 전형적인 선비상을 이룩한 학자다. 선생은 효행(孝行)과 도학(道學)을 강마하면서 전원생활을 바탕으로 이욕(利慾)을 멀리 하고 현실에 자족(自足)하는 삶의 태도로서 지역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시에는 뜻있는 선비가 고명한 정신적 자세로 수양하는 것을 가장 흠모했던 관계로 선생의 도학자적 삶은 지역사회에 미친 정신문화가 지대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선생의 기록이 임진병화로 소실되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못한 채 단지 제한된 자료인 『월담선생실기』에 실린 행장과 「비문」, 약간의 시문 등과 『남명집』을 토대로 선생의 선비정신을 조명하려고 한다.

2. 가계와 생애

월담(月潭)정사현(鄭師賢)은 1508년(중종3) 9월 13일 고령 월기촌(月器村)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재질이 총명하고 몸가짐이 신중하여 여타 아이들과는 달라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성장하였다.

행장(行狀)에 의하면 선생은 9살 때부터 충효(忠孝)에 대한 관심과 뜻을 두었고 문장이 탁월하였다. 때마침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주목을 받고 있던 선비 조식(曺植 1501∼1572)은 후일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하게 하여 매부로 삼았다.

월담은 선생의 자호(自號)이고 초명은 사현(思玄), 자는 희고(希古)이며 진양을 본관으로 한 재지사족(在地士族) 출신이다. 선생의 시조는 은열공(殷烈公) 신열(臣烈)로서 고려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선비로 호는 관정(官亭)이며 타고난 성품이 호방하고 학문이 돈독하여 성리학에 밝았다. 그리하여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는데, 때마침 거란의 침공을 받으면서 큰공을 세워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선생의 고조 충좌(忠佐)는 남행(南行)하여 중훈대부(中訓大夫) 용강(龍岡) 현감을 지냈다. 증조 경(音 )은 중훈대부 영광( 光) 군수를 지냈으며, 조부 원신(元愼)은 생원으로 漢城參軍을 지냈다. 부친 린(麟)대 와서 고령 월기(月器)에 옮겨 지냈는데 이 때가 1499년(연산9)이다. 부친은 기자전(箕子殿)의 참봉을 지냈다. 모친은 나주 박씨이다.2)

월담 선생은 둘째 아들로 창녕조씨(曺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삼남일녀를 두었으니, 서(序), 하(厦), 응(應) 등 아들과 딸은 선산인 김신옥(金信玉)에 출가하였는데 김신옥은 담양(潭陽) 군수를 지냈다. 선생 사후 월담행장을 지었다. 월담 선생은 평생 초야에서 독서와 수양으로 생을 보내다가 1555년(명종10) 12월 18일 별세하였으니 수 48세이다.3)

3. 정열부인의 행적

선생의 부인 조씨는 승문원 판교(承文院 判校) 언형(彦亨)의 딸로써 남명의 여동생이다. 부인은 1506년(중종1) 출생하여 가난하지만 누대로 문인의 집안에서 조행이 돈독한 집안에서 성장하여 출가한 후 정씨집안의 살림을 꾸려나가는데 성심성의껏 하였다. 특히 천성이 맑고 단정하여 집안의 가솔에게 신망이 있고 대소사는 물론 시부모와 남편을 지성껏 모셨다. 불행하게도 남편을 일찍이 사별하여 애통해 하면서 어린 자녀들을 양육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장례 때는 예(禮)를 다하여 치르고 남명과 상의하여 장지를 선정하였는데 부귀나 명예보다는 자손의 안녕을 도모하는 자리가 좋다고 하여 남명이 정하여 주었다. 이러한 생각은 평범한 가정의 부인으로서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의 자애로서 이욕(利慾)에 물들이지 않는 삶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여인의 몸으로써 남편의 묘에 시묘살이 할수는 없기에 새벽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분향을 하며 애통해 하였고 춘하추동 새옷을 만들어 부군의 묘소에 올린 뒤 불태워서 3년간 지성껏 조상하였다. 이 때 부인은 목욕은 물론 머리도 빗지 않고 3년간 지냈으며 슬하의 삼남일녀를 마치 남편 보듯이 키웠다. 부인은 진작 남편을 따라서 운명을 거두려고 했으나 아직 막내가 미혼이므로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3년상을 마치고 난 뒤 자녀들을 불러 모으고 ‘이제 막내도 저만큼 성장하였고 아버지의 3년상도 마쳤으니 나는 아버지 곁으로 가련다. 내가 숨을 거두거든 아버지 곁에 장사 지내다오’하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숨을 중단시켜 운명하였다. 운명한 날이 남편의 길일과 같은 날 하루사이를 두고 늦게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1559년 12월 19일이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왕명으로 정열부인(貞烈夫人)이라는 정표(旌表)를 내리고 여각(閭閣)을 세우도록 하였다.4)

현재는 비각만이 묘소 아래(黃鼎山) 옮겨져 남아있다.

4. 월담의 선비정신

월담은 강우학파의 도학을 수학(修學)한 유자답게 평생 독서와 수양에 전념한 까닭에 처음부터 과업(科業)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직 향리서 남명을 비롯한 제현(諸賢)과 교유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로 일관하였다.

선생은 문자를 알면서부터 세상을 보는 안목이 특별했으며 성숙된 직관으로 학문의 세계에 밀착하였다. 그런 가운데 안으로는 효와 내적 수양에 힘쓰면서 밖으로는 당대 도학의 거두인 남명과 자주 교유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즉, 9살 때 부친이 병환으로 눕게 되자 손가락에 피를 내어 드렸고 대변을 맛보면서 쾌차를 지극정성으로 빌며 간병하였다. 결국 세상을 버려 부친상에 곡하며 지극히 애도하였고, 16살때는 모친이 심한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자 널리 의원을 찾아 문의하고 약을 구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하니 마침내 회복하였다. 이때 마을의 주민들은 ‘하늘도 감복하였으니 효자로다’하고 칭송하였다. 이런 후 얼마 뒤 남명은 합천에서 김해로 옮기면서 산해정(山海亭)에 강학의 장소를 짓고 성리의 학을 경의(敬義)로 실천하려 할 때 왕래하며 연마하였다. 월담선생은 이무렵 남쪽에 정자를 짓고 월담정(月潭亭)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월담이라고 하면서 조용히 지냈다.

월담정은 현재 군청사 남쪽 월기(月器)마을에 있었는데 지금의 고령여자종합고등학교 운동장 자리에 위치하였다. 당시 월담정에는 못이 있었는데 이 주위에서 선생은 세상을 이욕을 멀리하고 도덕을 낙으로 삼으면서 한 수의 시를 읊었다.(精舍原韻)5)

이 시에 나타난 임자연(任自然) 종자연(從自然)의 마음자세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가운데 도가적(道家的) 풍취를 느끼게 하는 자연을 관조(觀照)하는 전형적인 선비의 생활모습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좋은 경치에 위치한 정자앞의 연못을 보고 남명은 「題月潭亭」을 지었으니 어찌 평범하게 들리겠는가. 이 시에 대한 해석을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르게 해석하므로 여기서는 일반적인 견해로 먼저 살펴본다.

월담선생이 종유(從遊)한 인물은 우도의 남명문인 박재현(朴齋賢), 문익형(文益亨), 문익성(文益成), 정구(鄭逑)와 이희안(李希顔), 정삼우당(鄭三友堂), 주이락당(周二樂堂)과 강좌문인 조목(趙穆), 황준량(黃俊良)과 도의교류하였다.

향리 유림에서는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향사하였는데, 1711년(숙종37) 고령 우곡면 사촌동에 신덕린(申德隣)9), 박은(朴闇)10), 정사현(鄭師賢) 등 3현을 향사하다가 운수면 운산동의 운천서원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홍익한(洪翼漢)11)과 김수옹(金守雍)을 추모하게된 영연서원(靈淵書院)이 있다. 영원서원은 1868(고종5)년에 훼철되었다. 영연서원 묘정비문에 의하면 ‘정모는 일찍이 과거를 버리고 성리학에 열중하여 고명한 지경에 이르렀고 같이 도의를 연마한 조목과 이황강 제현이 다함게 말하기를 우리는 월담의 고명함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남명과 월담을 가리켜 어려운 벗(畏友)12)이라고 평하여, 정신적인 교유(神交)가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연서원 향례문에 숙종대왕의 처남인 단암(丹岩) 민진원(閔鎭遠)이 높이 산림처사에 추종했으니 이상이 깨끗하여 당대에 법이 될만하여 후학을 일으켰다고 술회하였다.

월담정을 중심으로 한 선생의 정신세계는 후일 황산재(黃山齋)라고 개칭하면서 기문(記文)은 남명과 도사(都事) 이종기(李種杞)가 지었고 정사시(精舍詩)는 정한강과 이귀암(李龜岩)이 지었다.

월담선생의 학문과 조행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준민(李俊民 1524∼1590)이 천거하고 명종조에 왕이 직접 참봉에 징사(徵仕)했으나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홀연히 자적하며 살다가 충효의 행적이 모자람을 인식하고 자녀들에게 충효의 정신을 실천에 옮기도록 하여 후일 임진왜란 때 아들과 손자들이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구국에 앞장섰다.

남명은 매부인 월담이 운명하자 시신을 쓰다듬으며 ‘이 사람을 불행하게도 일찍 세상을 버리게 했구나’하면서 애통하였고 직접 장지를 정하여 묘갈명(墓碣銘)을 썼다.

여기서 남명은 선비 정공의 묘에 글로써 이어 쓰기를 “군이 젊은 나이에 글공부는 이루지 못했으나 오히려 부형의 사업을 능히 넉넉하게 이었다.”14)고 하면서 조상하였다.

금세에 와서 후손들이 뜻을 모아 선생의 묘소 아래 유적지를 세우는 등 선조의 고명한 정신세계를 본받으려고 정성을 다하고 있다. 월담 선생은 비록 48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갔지만, 한 시대의 향리(鄕里) 지도자로서, 전형적인 산림처사로서, 순수한 선비로서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오늘에 와서 강우학파의 남명학이 유학계에 긍정적으로 자리매김하면서 남명문도인 월담선생에 대한 행적도 소상히 알려져서 교육의 지방화 시대에 알맞는 지방민의 교화와 민풍 순화에 참고가 되어야 한다. 특히 이욕에 사로잡혀 자신과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가치관이 전도된 현대 사회에 선생의 고결한 선비정신이 아쉬운 때이므로 큰 영향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주)
  1. 『月潭先生實記』<行狀>
  2. 晋陽鄭氏世譜
  3. 월담은 운명시 세 아들을 불러 ‘내가 못다하고만 충효를 너희들은 명심하고 다하라’(六八年光人世 促滿腔忠孝有)고 당부하였다. 이 후 임진왜란때 장자 서(序)는 육십이 넘은 고령인데도 불구하고 아들 유례(有禮), 상례(尙禮), 조카 이례(以禮) 준례(逡禮)가 정인홍. 김연. 곽재우 진영을 왕래하며 왜적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로써 유례는 제용감정(齊用監正), 상례는 현감, 준례는 은일참봉을 지냈다.
  4. 위의 책 <貞烈夫人昌寧曺氏旌閭裨銘> 1564년(명종19)에‘貞烈’의 첨지를 내리고 후일(明宗朝) 정려문각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5. 위의 책 <精舍原韻>
  6. 녹라지(綠羅池)는 중국의 녹라산 아래 연못에 비유하여 표현하였으나 의미상으로 볼 때 못이 봄을 만나 물이 푸른 가운데 마침 봄비가 내리면서 수면에 파문을 지으니 마치 푸른 구슬이 비단결 처럼 무늬를 띠운다는 시적 감흥이 다분히 내포되었다고 본다.
  7. 월기(月器)마을은 산촌이고 그 건너 산에는 가야국 왕능이 산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마을이 망했다가 다시 일어섰다 함은 보름달이 나타날 때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8. 남명집에 나오는 시의 자와 다른 곳은 百年이 萬年으로, 綜이 徑으로, 消가 銷로, 香이 寸으로 되어 있어 『月潭先生實記』와 달리 표현하고 있다.
  9. 신덕린(申德隣)은 생몰년 미상. 고려말 조선초 서화가로 호는 순은(醇隱), 자는 불고(不孤), 예의판서를 지냈다. 이색 정몽주 등과 친교가 있었고 고려가 망한 후에는 광주(光州)에 은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10. 박은(朴闇 1479~1504)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邑翠軒)이다. 갑자사화 때 동래로 유배 29세 때 신원 회복되고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11. 홍익한(洪瀷漢 1586~1637)은 병자호란 때 3학사중 한사람이다. 자는 백승(佰升), 호는 화포(花浦)이다.
  12. 서유방(徐侑方)찬 <靈淵書院廟庭碑文>
  13. 13)閔丹岩鎭遠撰享文曰. 高蹈山林襟懷 麗落矜式當時興起後學(靈淵書院廟庭碑文) <月潭先生實記>
  14. 14)<題鄭月潭師賢墓碣銘> 秀士鄭公之墓 系之以文曰 君早年業文未就 尙能裕父之蠱 (南冥集補遺)

참고문헌

  1. 月潭先生實記
  2. 南冥文集
  3. 晋陽鄭氏文獻錄
  4. 國朝人物考德川師友淵源錄
  5. 晋陽鄭氏世德行實錄
  6. 晋陽鄭氏世譜
  7. 高靈邑誌
  8. 龍蛇世講錄
  9. 國朝榜目
  10. 韓相奎,선비정신의 교훈적 발견 <敎育思想硏究> 제3집 韓國敎育思想硏究會 1993, pp.1∼2


 g_home2.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