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1
남명학파 고문헌 소개

『黃江實紀』

金 敬 洙
(本院 事務局長)

1. 저자 및 간행경과

木活字本으로 된 『黃江實紀』의 원래 제목은 『黃江先生實紀』로 되어 있는데, 이 책은 黃江 李希顔의 후손들이 黃江의 글 두 편과 다른 사람들의 글들을 묶어서 간행한 것이다. 黃江은 합천 이씨로 字는 愚翁인데, 燕山君 10년 (1504)에 합천의 草溪(현재의 쌍책면 성산리)에서 아버지 參判公 諱 允儉과 어머니 通川 崔氏(右議政 潤德의 孫女) 사이의 3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希曾과 希閔 두 형은 金安國의 門人으로 일찍 登科하여 벼슬에 나아갔으나, 伯兄 月暉堂은 20代의 나이에 卒하고 仲兄 校理公은 己卯士禍 때에 趙光祖의 門人으로서 이에 연루되어 2년 뒤에 역시 20代의 나이로 졸하였다. 또 그 1년 전에 부친 參判公의 喪을 당했으니, 이 때부터 황강은 실질적으로 집안을 이끌어 가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황강의 3형제는 옛날에 흔히 그랬던 것처럼 孔子의 제자들인 曾子, 閔子騫, 顔淵과 같은 賢人이 되라는 뜻으로 그 이름자를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3형제의 삶을 3賢人과 비교해 보면 마음에 와 닿는 감회가 있겠다. 그는 20세에 府使 權中愼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26세에는 黃江亭을 짓고서 학문에 열중했다.

그는 스스로 11세에 『論語』를 읽고서 豁然開明하였다고 했으며 그의 학문과 孝悌忠信도 『論語』에 근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그는 14세에 처음으로 司馬試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몇 번에 걸쳐 鄕試에 합격하였지만 大科에는 합격하지 못했는데, 35세에 晦齋 李彦迪의 천거로 典獄署 參奉을 제수받은 것으로부터 벼슬길과 인연을 갖게 된다. 이로부터 수차에 걸친 벼슬 중에서 50세에는 高靈縣監을 지내고 53세에 마지막으로 造紙署 司紙를 제수받은 것으로 되어있다.

황강은 남명보다 세 살 年下이지만 교분이 매우 깊어 서로 자주 왕래한 것을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松溪 申季誠과 더불어 이른바 세칭 ‘嶺南三高’라 불리기도 한다. 남명은 황강이 56세로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에 그의 墓碣銘을 지었는데, 이 비석은 그의 문인인 탁계 전치원의 글로 세겨 세워 지금 남아 있으며, 뿐만아니라 母夫人 崔氏의 墓碑銘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황강의 사후 5년 되던 해에 사림에서 淵谷書院을 세워 춘추로 향사하였다. 뒤에 전탁계가 淸溪書院으로 옮겨 세웠으며, 그 뒤에 그의 首門인 탁계와 외손자이자 문인인 설학 이대기가 배향되었는데, 지금 서원은 철폐되어 남아있지 않고, 탁계의 글씨로 쓰여진 청계서원의 현판만 남아있고, 현재는 매년 3월 中丁日에 황강정에서 채례를 드리고 있다. 『黃江實紀』의 간행 경과에 대해서는 책 끝에 있는 崔宇文의 跋文을 보면, “원래 황강의 文集이 있었으나 불에 타 소실되어 남은 것이 겨우 두 편 뿐이었는데, 여기에 선생의 흩어진 文蹟들은 남명의 문집에서 뽑아내고 또 『東國儒生錄』 『羹장錄』·『國朝寶鑑』 및 大賢君子들의 遺稿에서 두루 가려서 겨우 한 책을 만들었으니, 그 나머지 여러 문중의 책 속에 산재해 있는 것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므로 어찌 가히 다 수집하여 실을 수 있겠는가? 이 또한 후손 埰壽와 埰得이 수습한 힘이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대체로 황강과 관련된 여러 글들을 여기 저기서 수습하여 편집한 것으로 보면 무난하겠다. 이 내용을 다시 후손인 埰壽가 쓴 발문에서 보면, 황강의 文集이 불에 타 없어진 후에 先父老들이 널리 수습하고 두루 궁구하여 斷爛 중에서 수집한 끝에 겨우 한 두루마리로 만들어 궤짝 속에 보관하였는데, 이 때 己亥年(1899) 겨울에 문집 간행의 논의가 시작되어 다음 해인 庚子年(1900) 여름에 일을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황강실기』의 간행은 위 두 사람의 글 내용과 발문 끝에 명시된 年記로 보아 庚子年이 확실한데, 특히나 崔宇文의 발문에 숭정 五庚子 天中節이라 하였으므로 1900년 여름임이 확인된다. 여기서 하나 덧붙일 사항은 후손 埰壽가 쓴 발문에 「先生歿距今四百四十三載之久」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年譜」에 의하면 황강은 56세 때인 己未年(1559)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 책이 간행된 1900년과 비교해 보면 342년이라고 써야 옳은 것이며, 443년이라고 쓴다면 계산상으로 이 책의 간행은 아직 이르지도 않은 2002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이 책은 원래 별도의 단행본 一冊으로 간행된 것이라기 보다는 『陜川李氏世稿』에 포함되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이 책의 目次 첫 머리에 ‘陜川李氏世稿卷之四 황강선생실기목록’이라 되어 있고, 책의 板心에도 ‘황강선생실기권4’라 되어 있으므로 『합천이씨세고』에 포함된 것을 별행본으로 간행한 것이 아닐까하고 추정되는 것이다.

2. 체제 및 내용상의 특징

이 책의 체제를 보면 첫머리에는 李晩燾의 序文이 있어 先生學德의 대략을 서술하고 있고 이어 目錄이 있다. 그 다음은 「年譜」를 실었는데 황강의 一代記가 비교적 자세하게 나타나 있으며, 그 다음은 황강이 직접 쓴 글인 두 편의 碑文(鄭判書光繼碑文, 長興任氏墓碣銘)이 있고, 그 뒤는 附錄으로서 여러 관련 기록들을 수습하여 묶었다. 이어 누가 쓴 글인지 명기되어 있지 않은 「言行總錄」이 있고, 그 뒤에는 南冥이 황강을 柳下惠와 陳同父에 비유한 내용이 들어 있는 「墓碣」이 실려 있다. 그 다음은 詩 9首를 실었는데 南冥의 詩가 6首이고 遊軒 丁 의 詩가 2首이며 庵 宋寅의 詩가 1首이다. 이 가운데 南冥의 試 6首 중의 3首는 黃江에게 준 것이며 나머지 3首는 黃江亭에 쓴 것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書黃江亭楣’라는 詩는 『南冥集』에 보면 五言律詩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絶句로 되어 있어 뒤의 4句가 빠져 있으므로 참고삼아 그 전부를 실어 본다.

이 詩는 『황강실기』에서는 제4구의 ‘行藏’이 ‘行裝’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는데, 앞의 것을 따라야 끝 글자인 能이 자라라는 뜻의 ‘내’로 읽혀져 의미가 통하게 된다. 그 뒤에 宋 庵과 丁遊軒의 「輓」이 실려 있고, 이어 辛夢參이 撰한 遺事가 있으며, 다음은 문인인 濯溪 全致遠과 雪壑 李大期를 淸溪書院에 配享할 때의 告由文이 있다. 그 뒤에는 全義人 李種杞가 撰한 行狀이 있다. 그 뒤의 師友錄을 보면 황강이 가히 당대의 명현들과 두루 교유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년보」를 보아도 어떤 인물과 언제 왕래가 있었는지 많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선생으로 표기한 인물은 慕齋 金安國, 思齋 金正國 兄弟와 晦齋 李彦迪 세 사람이고 나머지는 종유한 인물들인데 책에 실린 인물을 순서에 따라 나열해 보면 松溪 申季誠, 退溪 李滉, 南冥 曺植, 聽松 成守琛, 大谷 成運, 遊軒 丁 , 七峰 金希參, 東洲 成悌元, 知足堂 金大有, 金禧年, 新菴 李俊民, 葛川 林薰, 圭菴 宋麟壽, 逍遙堂 朴河談, 警齋 郭珣, 淸香堂 李源, 二樂堂 周怡 등 실로 당대의 名儒이다. 그 다음은 南冥의 지리산 유람록인 「遊頭流錄」중에서 황강과 관련된 부분을 뽑아서 싣고 있으며, 그 뒤에 『三先生通記』를 실었고 맨 끝에 跋文 두 편을 붙혔다.

이상으로 『황강실기』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이 책에는 황강이 직접 쓴 글이 두편 밖에 없어 그의 학문과 사상을 직접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없다는 점에서는 많은 아쉬움을 남기지만, 당시 황강이 강우지역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위상이나 남명과의 깊은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앞으로 황강에 대한 연구 뿐 아니라 남명학의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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